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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역할, 왜 소설과 영화가 떠맡나
[정문순 칼럼] 언론 보도와 다큐멘터리가 약한 사회, 도가니 재발 못막아
 
정문순   기사입력  2011/10/10 [17:02]
한국 사회는 한 영화가 낳은 엄청난 파문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인권 단체들이 아무리 목청을 내질러도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던 일부 법이 꼬리를 내리고 있으며, 저 권위 높고 뻣뻣하던 판사와 검사도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내가 사건을 담당했다.”며 자발적으로 변명하는 글을 다투어 내놓고 있다. 당시 사건을 맡은 일선 경찰도 자기변명인지 반성인지 알 수 없는 심경을 공개했다.

창작물로도 이렇게 사회가 떠들썩한데 사건이 창작의 몸을 입지 않고 날 것 그대로 세상에 나왔을 때는 왜 사회를 건드리지 못했는지 의아스럽다. 6년 전, <PD수첩>에서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루었을 때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온 사회가 영화 <도가니>의 도가니에 빠진 듯하지만, 창작물이 시사 프로그램을 대체하고 있는 현실을 무작정 기뻐해도 좋을지 혼란스럽다.

영화의 원작소설 <도가니>는 이미 2년 전에 인터넷에 연재되면서 세상에 나왔다. 영화의 위력에 비하면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정도이지만, 소설이 당시 세상에 던진 파장도 컸다. <도가니>는 공지영의 이전 소설들과 비슷한 구성을 따르고 있다. 특수학교 교사자격증도 없는 문외한이지만 외롭고 소외된 처지의 주인공이 심리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장애 학생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서로 연대를 맺는다는 설정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이미 선보였다. 다만 실의에 빠지거나 의욕 없는 주인공에게 삶의 원기를 주는 청각장애 학생들의 역할이 사형수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사형수의 시각이 아니라 사형수에게 연민과 동정을 느끼는 일반인의 시각에 머물러 있듯이, <도가니>의 장애인들도 비장애인 주인공의 시각으로 한 번 걸러진 후 독자에게 전달된다. 소설에서 장애인들은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보이고 느껴지는 존재들이다.

소설에서 장애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주체를 비장애인으로 설정하는 힘의 불균형은, 무진이라는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주인공들을 외지인으로 설정한 것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서울 출신 남녀 주인공이 연고 없는 먼 남도에서 각각 해당 학교 교사와 인권단체 실무자로서 장애 학생들의 성폭력 피해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지역 연고가 없다는 것이 인물들의 활동 폭을 넓히는 데 유리함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당사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소설의 배경인 실제 현실에서는 피해 학생, 학부모, 지역 인권단체가 문제 해결의 중심 주체였다.

소설 후반부에 가면 당사자인 장애인이 두드러지는 설정도 있지만 무리하다는 인상이 짙다. 피해 아동의 처지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법한 법정에서 연두라는 학생이 어른의 혀를 내두르게 할 만한 총명함으로 피해를 똑 부러지게 증언함으로써 피고인들과 변호사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 사람을 영웅처럼 만드는 설정은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면 소설 <도가니>는 장애인을 다룬 이야기일 뿐이지 장애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비장애인 교사 강인호가 젊은 날의 기백을 잃고 무력한 생활인으로 전락한 자신을 성찰하거나, 장애 아동이 성적 학대를 받는 현실에 맞닥뜨린 소시민으로서 겪는 갈등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사회참여형 시민으로 살 것인가, 현실을 외면하는 소시민으로 안전하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을 다루는 소설에 적합한 소재로 장애인이 선택되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영화는 원작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작의 결함도 그대로 가져오게 되었다. 오히려 소설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결함이 더 돌출한 것도 있다. 외지 출신인 남녀 주인공이 사건의 중심에 서서 활약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지역 토박이임에도 장경사라는 경찰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몸에 맞지 않는 듯한 서울말을 쓰고 있다.

소설에서 배경을 무진이라는 지방 도시로 설정한 것은 아무 의미 없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지역일수록 대대로 뿌리를 내린 토호가 위세를 누리고 있고 동창이나 혈연을 통한 자기들만의 동맹 의식이 견고하다. 인화학교가 서울에 있었어도 사건의 규모나 양상이 똑같을 수 있었을까. 한 학교에서 수년 동안 아이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파렴치한 범죄가 조직적으로 저질러질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사회의 암세포와도 같은 연고주의가 이 도시에 두터운 안개를 둘러쳐 주었기에 가능했다. 경찰-검찰-변호인-사법부-교육청-교회, 심지어 피해 아동을 진찰했던 의사마저 가해자 편인 교육청 장학사와 같은 동창회 소속일 정도로 연고 의식으로 똘똘 뭉친 이들의 입에서 전라도 사투리(무진은 실제 사건에서 광주광역시에 해당한다)가 아닌 서울 표준말이 나오는 것은, 배우들이 사투리를 익힐 시간이 없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작품의 핵심을 간과한 것이다.

게다가 교사로부터 지속적인 성적 농락과 폭행을 당하고 동생까지 잃어야 했던 민수라는 남자 아이가, 할머니의 손에 의해 고소가 취하됐다는 말을 듣고는 동생이 죽은 철길에서 술 취한 가해자를 응징하다 다가오는 기차에 깔려 함께 죽는다는 드라마 같은 설정에 이르면 영화는 비교적 냉정히 지켜오던 균형을 더 이상 지킬 힘을 잃었다는 듯 마구 요동친다.

물론 영화가 소설보다 성취한 점도 있다. 영화에서는 소설에 비해 힘의 비중이 아이들에게 다소 분산되었다. 이 때문에 운동권 후일담 소설 마냥 주인공이 청춘 시절을 회상하며 현재의 소시민적인 모습에 자책하는 구질구질한 모습을 과감히 생략했다. 소설에서는 악당 소굴 속에서도 양심을 지키고 아이들 편에 선 몇몇 교사들의 위상이 제대로 부각되지도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어정쩡했는데, 원작이 자신 없어 하는 부분도 가지를 쳐냈다.

<도가니> 소설과 영화가 한국사회에서 몇 십년이 걸려도 할 수 없는 큰일을 해내고 있지만, 예술적 측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소설과 영화를 통해 충격과 감동을 느꼈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방송에서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으로 접할 때만큼의 울림과 경악을 받지 못했다. 한 사람의 시청자로서 사건이 보도되던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나는 지금의 아우성이 번잡스럽고 요란한 뒷북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내게는 소설과 영화의 적나라한 묘사보다 <PD수첩>에서 피해 학생들이 한 증언이 더 충격적이었다.

몇년 전 인화학교 강간범 교사들이 슬그머니 복직했을 때 학생들이 재단 이사장에게 몰려가 항의의 표시로 달걀을 던진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사람 얼굴에 맞지 않도록 목 밑에 닿게 던졌는데도 계란물 세례를 받고 병원에 덜컥 누워버린 이사장이 아이들을 고소하고 배후를 캐겠다며 분노를 토했고 기어이 고사리손들의 반성문을 받아냈다. 죄 없는 아이들이 반성문을 쓰게 한 것은 교장이 아이들을 강간해도 관심이 없던 언론이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격인 소설 같은 사건에 언론들은 사건의 앞뒤 본말은 따져볼 생각도 없이 아이들을 스승을 폭행한 패륜범으로 몰고 갔고 멋모르던 네티즌들이 동조했을 때 받은 충격을 아직 잊을 수 없다.

현실의 모순을 당장에 해소하는 것은 예술이 의도하지 않은 기능일 뿐이다.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하여 실패한 예술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검은 현실을 희게 바꾸는 힘은 창작이 아니라, 창작적 가공 없는 사건 보도나 시사 프로그램이 맡아야 할 역할이다. 법과 제도를 뜯어고치는 일이 왜 현실을 재구성하거나 가공한 창작물에게 떨어져야 하는가. 예술은 현실을 형상적으로 반영할 뿐이지 그 자체가 현실이 될 수 없다.

작가 장정일은 소설 <도가니>가 창작이 아닌 르뽀로 나왔어야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술이 아무리 잘 만들어지더라도 실제 현실의 감동을 넘은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는 점은 예술의 숙명이긴 하지만, 르뽀나 다큐멘터리, 언론 취재가 해야 할 일을 명예훼손 피소 걱정이 없는 소설이나 영화가 하도록 내버려 두는 건 누군가의 직무유기이다. 허구적 가공의 옷을 걸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활동이 활개를 칠 수 없는 현실이 곧 인화학교, 소설의 자애학교 파렴치범 못지않은 유죄일 것이다.
 
창작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만 추악한 죄인들을 세상에 고발하고 사람들을 감응시킬 수 있는 숨막히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도가니 사건은 장담컨대 법을 아무리 뜯어고치더라도 앞으로도 줄줄이 예비해 있을 수밖에 없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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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10/10 [17:0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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