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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체벌금지, 효과 보려면 인내가 필요
초중고교 교사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교사들의 의지와 인내가 절실
 
류상태   기사입력  2010/11/18 [09:03]
11월 16일(화), KBS-1TV는 저녁 9시와 11시 뉴스를 통해 학교 체벌을 금지한 서울시교육청의 지침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보도했다. 이날 뉴스에는 설문 조사 결과 서울시민의 60% 이상이 체벌금지령에 반대한다는 통계, 교사의 징계에 불만을 가진 학생이 교사의 차에 송곳으로 구멍을 낸 사건, 체벌을 받은(또는 목도한) 학생이 휴대전화로 신고해 경찰이 출동한 사례 등이 보도되었다.

이 날 보도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학생 지도의 고충을 호소한 어느 교사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학생들은 미성숙한 아이들입니다." 미성숙한 아이들이기에 체벌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하지만 나는 '미성숙한 아이들이기에' 체벌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학생들이 자기 잘못을 충분히 인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는 학생과의 충분한 대화 없이 교사의 일방적인 판단으로 체벌을 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나와 동료 교사들의 직접 경험을 소개해 보겠다.

나는 1985년 3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19년 반 동안 중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교사 초년 시절이었던 25년 전, 나는 한 선배교사로부터 그의 젊은 교사 시절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그가 학교에 부임하고 얼마되지 않아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하던 어느 날, 학생 한 명이 한쪽 발을 책상 바깥으로 삐딱하게 내민 채 계속 발을 떨어대고 있었다.

그는 학생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학생은 계속 발을 떨었다. 노골적인 반발이라고 생각한 그가 학생을 불러내 엉덩이에 매질을 했다. 단단히 혼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 학생은 계속 발을 떨었다. 그 때서야 문제가 있음을 느낀 선생님은 아이가 무릎이 충분히 굽혀지지 않고 자주 경련을 일으키는 불편한 발로 수업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생활지도부장(당시의 직책명은 학생부장)이었던 선배교사는 눈에 보이는 학생의 언행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되며 교사의 일방적인 판단 아래 학생의 불량 여부를 단정하여 체벌하는 것이 얼마나 비교육적이고 성급한 것인지를 자기 체험을 통해 초임 교사인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나 역시 현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수업 시간에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며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이 있었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첫 수업이었는데, '흥'하고 비웃는 듯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몇 번 주의를 주었지만 학생의 비웃음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관찰해보았다. 잠시 후에 나는 학생이 나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후두 이상으로 목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제어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생이 벌을 받아야 할 만큼 잘못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교사는 징계를 하기 전에 학생에게 그런 언행을 하게 된 이유를 물어보고 충분히 해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학생의 해명을 듣고 나서도 잘못이 명백하여 징계를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징계의 이유와 정도를 설명한 후 학생이 납득한 상태에서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시절,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과의 충분한 소통 없이 교사의 일방적인 판단 아래 학생의 불량 언행 여부를 단정하고 즉시 체벌을 가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하지만 그건 교육이 아니라 힘을 가진 자가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위에 든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며 또한 신체적으로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었기에 교사가 즉시 자신의 실수를 느끼고 조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문제에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있다. 교사가 볼 때는 불량인데 학생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앞의 보도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인터뷰 교사는 학생들을 '미성숙한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다. 만일 학생들은 아직 다 자라지 않았기에 그 인격의 가치가 성인과는 다르며 그러기에 체벌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말했다면 나는 결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어린 학생들이나 성인이나 그 인격의 가치는 똑같다. '하늘 위에 사람 없고 하늘 아래 사람 없다'는 명제는 학교 안에서 교사와 학생 간에도 똑같이 통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체와 함께 아직 지적 능력과 판단력도 충분히 자라지 않았다는 의미로, 즉 인격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판단력의 측면에서 "아직 미성숙하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일정 부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판단력이나 지적 능력이 충분히 자라지 않은 아이들이기에 체벌은 더욱 더 피해야 한다.

교사가 보기에 문제가 되는 언행을 학생들이 했을 때,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교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체벌이 이루어지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체벌을 받는다. 이런 경우 학생들은 자기 행위에 대한 비판적 반성 없이 "이런 언행을 하면 징계를 받는다"는 강한 주입을 수동적으로 받게 되고,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자기 행동을 스스로 판단하고 제어하는 능동성은 사라진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교사의 독자적 판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징계에 대해 학생이 "나는 부당한 징계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당한 항의를 하지 못한다. 우리의 학교 현장에서 그에 항거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체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교육,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육이 아니다. 교육이란 '가르침을 통해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가르침이 없이, 즉 학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언행에 대한 잘못을 충분히 깨닫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해지는 징계는 교육이 아니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충분히 자신의 과오를 인식한 후라면 체벌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인의 잘못을 체벌로 다스리는 것은 비효과적 또는 비문화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학생들의 경우는 그와 다른가? 다시 말하지만 미성년자나 성인이나 그 인격의 가치는 똑같다. 오히려 그 인격이 자라는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의 인격은 성인들보다 더욱 보호되어야 한다.

기성세대의 눈에는 불량해 보이는 학생들의 언행이 어쩌면 교사들의 기존사고를 뛰어넘는 창조적 사고의 결과일 수도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학생의 돌출 행동이 어쩌면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답답한 문화에 대한 창조적 저항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이런 저항을 수용하거나 조화를 이루어내지 못하면 교육도 역사의 발전도 없다. 역사는 '기존 문화에 대한 항거'를 통해 발전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저항이 발생할 때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사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 있다. 학생은 '미성숙한 아이들'이기에 대화보다는 지도 또는 징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기 쉬운 것이다. 6년 전, 학교에서 예배를 강요하지 말아달라는 강의석군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같은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현재의 언행'은 가정환경 등 지난 시절의 오랜 경험의 반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아픈 경험으로 축적된 언행은 그 원인을 풀어주어야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단순한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인격의 성숙'을 학교 교육의 중요한 목표라고 할 때, 체벌은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 채 행위를 억압하는 것이기에 '인격의 성숙'을 가져오지 못하고 기존 문화체계에 쉽게 타협하게 만들며, 창조적 저항정신을 소멸시킨다. 그것은 명백하게 '비교육적'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다. 나는 요즘 <자이언트>라는 TV 드라마를 즐겨 본다. 드라마에 나오는 여러 성격의 인물 중에 미워하기 어려운 악역이 있다. 조민우라는 이름을 가진 캐릭터다. 그는 자신의 악행을 인지하지만 잘 제어하지는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깊이 받아온 마음의 상처와 그로 인한 불안한 정서로 이 인물은 이미 삶의 희망을 잃어버렸다. 하여 그는 자신의 악행을 통제하기보다 아버지와의 힘들고 불편한 갈등으로부터 도피하는 쉬운 선택을 한다.

미주라는 연인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듯 했지만 그의 인생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지닌 철면피 아버지에 의해 다시 무너지고 만다. 조민우라는 인물은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가 안고 살아가는 배경이, 또한 이미 어려서부터 형성된 가혹한 경쟁에 시달려온 거친 삶이 그를 끊임없이 옥죄고 무너뜨린다.

드라마 속의 조민우는 자기 언행에 대해 스스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성인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형성된 환경과 그로부터 받은 영향은 성인이 된 후에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조민우에 대한 연민은 나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드라마를 즐겨 보는 많은 시청자들이 조민우의 회심과 그로 인한 새롭고 밝은 인생의 반전을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비록 드라마 속의 캐릭터일 뿐이지만 그의 얘기를 좀 더 나누고 싶다. 조민우의 현재적 언행만으로 그를 판단하고 벌을 가하는 것은 그의 회심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마음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고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사람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이런 상황을 우리 학생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 하나하나가 모두 조민우처럼 각기 아픈 기억이 있고 벗어나고 싶은 환경이 있으며, 그 과거의 아픔이 현재의 성격과 삶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랜 축적의 결과로 나타나는 학생들의 현재적 언행을 과연 체벌로 해결할 수 있을까? 혹 체벌에 의해 단기적인 효과를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문제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사실 '문제아'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아이에 대한 전체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아가 아니라 '문제를 가진 아이'가 있을 뿐이다. 언행에는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아이 자체는 귀하다. 무엇보다 문제를 가진 아이들(다시 말하지만 문제아가 아니다)에게서 보여지는 현재의 언행만 보면 아이가 밉고 싫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자란 환경과 현재의 언행을 함께 보면 아이들이 환경의 피해자일수 있다는 점에 눈을 뜨게 된다.

학생과 교사는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야 한다. 체벌은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갈등이 있을 때는 힘들더라도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 체벌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 쉽고 편한 방법일 뿐이다. 물론 교사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학교 현장은 이 쉽고 편한 문화에 너무나 익숙해 있다. 하기에 새로운 시도가 받아들여지기 힘들고 정착되기도 어려운 것이다.

체벌 금지 문화를 학교 현장에서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교육청 지침으로 하달된 현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는 점을 학교 현장에서 빨리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학교 체벌 금지 문화가 정착되고 그 효과를 보려면, 당장의 혼란과 불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쳐나가려는 교사들의 의지와 인내가 절실히 필요하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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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1/18 [09: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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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물인 2010/11/19 [00:42] 수정 | 삭제
  • 학벌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애교심의 발로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분위기는 사실, 이제는 없어진듯하다. 신자유주의체제가 비정규직노동자문제가 그런 학벌사회에 유지에 대한 부가가치를 상실하게 했다. 어딜 감히 명문대 나왔다고 취직이 가능이나 할 일인가? 자본의 재생산이 먼저이지..훗..이런걸 자승자박이라고 하던가? 출세를 위한 교육은 그 종말이 훤히 보인다. 그러나 자기성찰을 위한 공부는 인생 전반을 통해서 해야될 일, 그것이 반드시 무슨 도덕이나 윤리가 아닌것이다, 기술 기능 돈버는 방법 등..실용적인 학문이나 지식정보는 꾸준히 공부하거나 교육받아야 할 사항이다. 이런 모든것을 학점제로 해서 그 경력을 공인하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왜 명문대를 나와야 ..그 명문대에서 받은 학점이 실용가능한 학점인가? 물론 기초지식은 있겠지만..그것이 직업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직업에 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이나 시스템이 필요한데, 그저 자격증 따기 위한 직업훈련소가 고작이다. 물론 그런 시도도 좋다고 본다. 하지만 좀더 적극적인 직업을 위한 공부시스템이 마련되야 한다. 인간이 생산활동을 70까지는 할 수 있다고 보면, 사실 정년제를 두는 것도 국민연금 때문에 그런건데..연금생활보다는 직업을 새로 가지는게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공격적인 직업이 있는 반면 복지차원에서 이룰 직업도 개발되야 한다.
    그리고 요즘 예산편성하면서..국방비줄여서 복지비에 사용한다고 하는데..사실 그것에 나는 반대한다. 전에 어릴적에 그런 말을 하곤 했는데, 그래서 그런 논리가 나로서는 굉장히 대단한 깨달음으로 인식되었다. 국방비줄여서 복지비에 써야 한다고..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다. 아이엠에프 체제를 경험하면서..신자유주의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이건 아니다 싶다. 뭔가 다른 마인드가 있어야 할 것 같다.
  • 다물인 2010/11/19 [00:26] 수정 | 삭제
  • 계층간 마찰이 생기고, 전문가집단과 그렇지 못한 구성원 사이에 생기는 마찰 때문에 국민은 학교에 가야 하고 최소한 고졸은 되야 한다. 라는 것인데..고졸의 나이제한과 군대문제등..공부는 할 때 해야 된다라는 둥..은근히 나이제한을 둔다. 나이먹으면 머리나빠지나? 그런 공부는 무엇인가? 머리안나빠지고 나이제한없이 다닐 수 있는 학교제도가 아닌, 공부의 방식, 즉 고등학교과정도 학점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제한과 나이제한이 있는듯한 정서를 얼릉 깨우쳐야한다. 그리고 3년이란 기간동안 모든걸 한꺼번에 가르칠려고 하는 방식은 일제의 교육방식에서 빌려온 것이다. 어떤 틀에 시간표에 끼워넣은 그래서 공부의 자유가 없는 교육제도가 지금 한국의 교육제도이다. 공부의 자유는 반드시 학점제가 되야 하고, 졸업제도도 없애야 한다. 학교를 졸업한다고 공부를 졸업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졸업이 곧 학벌문화로 만들어지는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교육받을 권리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공부할 자유가 더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