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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뻔한 300년 된 고택 영사정(永思亭)을 구하다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한 문화재수리기술자의 400여 일간 투쟁
 
김영조   기사입력  2010/05/05 [23:40]
▲ '영원히 잊지 않고 생각한다'란 뜻의 고양시 영사정(永思亭)은 숙종의 장인 김주신이 지은 300여 년 된 조선시대 건축양식이 잘 보존된 고택이다     © 김영조
 
며칠 전 나는 한 문화재수리기술자 아내라는 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이렇게 문화재적 가치가 많이 남아 있는 집을 왜 나라는 외면하고 버려두는 것일까? 우리는 문중 어른 김씨에게 공사를 시작하지 말아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문화재 지정’을 해서 건물을 헐지 않고 보존하는 쪽으로 노력해보자고 다짐하고 돌아온 날 남편은 잠도 자지 않고 밤새 고민하더니 ‘문화재청장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얼마 뒤의 일이다. 풀이 죽어 퇴근한 남편은 ‘300년 된 집이 헐릴지 모른다.’라고 했다. 문화재청장 앞으로 보낸 편지가 경기도 내 문화재청 관련 부서로 이첩되었고 그곳에 근무하는 담당자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온 것이다. ‘이보세요. 최 선생! 하시는 업무나 하지 골치 아프게 왜 이런 것을 문화재청장한테 편지를 보냅니까?’” (어느 “문화재수리기술자 아내의 편지” 중에서)

편지를 보낸 이의 남편인 문화재수리기술자 최우성 씨는 문화재청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지만 결국 그 결과는 담당공무원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300년 된 조선시대 한옥의 문화재 지정을 위해 뛴 기술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물거품이 될 절체절명의 순간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 최씨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몸부림을 친 결과 400여 일의 기나긴 투쟁 끝에 영사정은 올 3월 23일 경기도로부터 문화재자료 제157호로 지정받았다. 대관절 이 한옥이 무엇이기에 기술사가 그렇게 온몸으로 매달려서 마침내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받았던 것일까? 

▲ 영사정 편액, 이 글씨는 인원왕후가 쓴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지나 문헌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2005년 도둑맞아 지금은 없다.     © 김영조
    
▲ 영사정 현재 모습, 비 맞는 것을 막으려고 비닐을 씌워 놓았다.     © 김영조
 
이 한옥은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958번지에 있는 영사정(永思亭)이란 이름의 집이다. 영사정은 조선후기의 문신인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 1661∼1721)이 지은 제사(祭舍)로 아버지 김일진(金一振)을 제사 지내며 살림도 했던 집이다. 1709년에 지어 올해로 301년째가 되었다. 영사정(永思亭)은 ‘영원히 잊지 않고 생각한다.’라는 뜻인데 김주신은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딸은 조선 19대 왕 숙종(1661∼1720)의 계비인 인원왕후(1687∼1757)다. 이 집을 지은 김주신은 곧 숙종의 장인인 것이다.

이러한 유서깊은 영사정을 최씨가 만나게 된 것은 2009년 1월 말로 석비연구가며 친구인 우종훈 석비문화연구소장의 권유로 영사정 바로 옆에 있는 숙종의 장인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공덕을 새긴 신도비를 답사하러 나서게 된 게 계기였다. 최씨는 물어물어 찾은 경은부원군의 신도비를 찾아가서 석비연구가인 친구가 석비를 살펴보는 동안 신도비 옆에 낡고 허름한 기와집 한 채가 눈에 띄어 들어간 것이 영사정과의 첫 대면이었다고 한다.

“낡고 허름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으나 전국의 문화재를 수리하고 복원하는 것이 본업인지라 처음 대하였을 때에는 비록 몰골이 차마 눈뜨고 보기조차 민망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집의 배치와 구조 그리고 집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부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 집은 근래 보아오던 조선시대 후기의 집들과는 사뭇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라고 말하는 최씨는 오랫동안 전통건축에 대한 열정을 가진 눈 덕분에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그런 ‘보물’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 문화재 지정신청을 포기한 문중에서 자체 예산으로 보수하려고 목재를 사다가 작업 중이었다.     ©김영조
 
이 보물은 그동안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회가 1990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고양시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으나 ‘고양시에는 이러한 집이 수십 채 있다.’라며 정성껏 준비한 서류뭉치를 몇 번이나 되돌려 보내 버렸고 또한 학계의 교수들도 빈번히 드나들었으나 사진만 찍어가고는 함흥차사였다. 그러는 사이 집은 낡을 대로 낡아 버려 흉물로 변해 가는 통에 문중 어르신들이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집의 개축을 위해 목재를 사다가 대들보를 깎고 다듬는 중이었다. 

최씨가 현장에 처음 가던 날도 곧 착수할 목재 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했다. 한발만 늦었어도 300년 된 귀중한 집은 원형이 손상되는 운명을 맞이할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고 최씨는 회상한다.

이러한 집이 고양시에 수십 채가 있기는커녕 전국을 뒤져도 몇 채 나오기 어려운 보물인 것을 발견한 기쁨도 잠시 최씨는 제일 먼저 김씨 문중을 설득해야 했다. 다행히 문중 어르신들은 사다 놓은 목재 다듬는 톱질을 멈추게 했고 적극적으로 일의 추진을 도왔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일의 추진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하고자 우선 고양신문에 사라져갈 위기에 놓인 영사정을 살려야 한다는 기고문을 냈다. 

이어 문화재청장에게도 탄원서를 냈다. 그러나 담당 공무원은 힘과 용기를 주기는커녕 핀잔을 보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전 현직 문화재위원의 자문과 문화재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분이면 쫓아가서 영사정의 가치와 보존에 대한 협조를 구했다. 

최씨는 본업도 제쳐놓고 영사정 보존을 위해 힘이 될 만한 사람은 모두 만났다. 그 가운데 특히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이은만 전 회장은 영사정의 충분한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하다는 조언을 해주어 국회도서관을 뒤져 30년 전에 영사정의 모습처럼 훼손되어가던 상주의 “양진당 실측조사보고서”까지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이 실측보고서는 회의적이던 공무원들의 생각을 돌려놓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을 것으로 최씨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고비도 있었다. 현장조사를 나왔던 경기도 문화재위원이 “너무 낡고 변형이 심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별로 없다.”라는 소견서를 내는 바람에 기사회생하려던 영사정은 다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해 낙담했던 순간을 최씨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고 했다. 경제적 손실을 무릎 쓰고 기다려준 문중에도 도리가 아니었지만 귀중한 문화유산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은 어떻게든지 막아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는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어 몇 차례 연기를 거듭하던 경기도 문화재위원회가 드디어 지난해(2009년) 11월 열리게 되었고, 전체 회의결과 “현재의 상태는 비록 많이 훼손은 되었지만, 그 역사성과 건축학적 자료로서의 귀중한 가치를 인정받아 이제 당당히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한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영사정은2010년 3월 23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7호로 지정받게 된 것이다.

▲ 대청마루 위 천정에는 상량문이 있다. “歲己丑 四月初”라는 문구가 보여 이 집을 지은 때가 1709년임을 알 수 있다.     © 김영조
 
최씨는 그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어디 아니 그럴 것인가. 문화재의 운명이 마치 자신의 운명인양 생각했던 최 씨로선 당연한 눈물인 것이다.

영사정에서 만난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회 김덕경 회장(78)은 “영사정은 조상의 숨결이 밴 아주 소중한 집입니다. 그런데 이 집을 그대로 보존할 수 없을 것 같아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최우성 씨 같은 분이 나서서 헌신적으로 뛴 결과 문화재 지정을 받았습니다. 이제 겨우 조상 뵐 면목이 섰습니다.”라고 말하며 감회가 서린 듯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나이가 적지 않은 김덕경 회장은 영사정을 찾은 기자를 데리고 영사정을 중심으로 경사진 뒷산 여기저기에 모신 조상의 산소를 날아다니듯 가뿐히 안내해주었다. 전혀 힘들지 않은 듯 그저 얼굴엔 잔잔한 웃음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덕경 회장의 동생으로 “영사정 복원추진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순경(75) 씨는 “영사정을 저희가 보존하기에는 벅찹니다. 문중이 여력이 안 돼 재산세나 종합부동산세를 감당할 길이 없는데다가 집은 허물어져 가고 있어 정말 조상 뵐 면목이 없던 터였지요. 그런데 이렇게 영사정을 보존할 수 있게 돼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역시 이 문화재 지정 건에 일등공신은 최우성 씨입니다.”라고 말했다.  
 
▲ 영사정 행랑채 앞에서 영사정을 설명하는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회 김덕경 회장(위 왼쪽), 영사정 복원추진위원회 김순경 회장(아래 오른쪽)     © 김영조
 
7년 전까지 이곳 영사정에서 40여 년 동안이나 살았던 김덕경 종중회장의 4촌 동생 김시경(77)씨는 “영사정에서 사는 동안 비만 오면 천정에서 비가 새 물받이용 세숫대야가 없으면 안 되었습니다. 비를 막으려고 지붕에 처음엔 비닐을 씌웠다가 나중엔 거적을 씌웠는데 후에 보온덮개가 나오는 바람에 이것을 씌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영사정을 지키려는 후손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보는 듯했다.

김덕경 종중회장, 김순경 복원추진위원회장 두 분과 대담을 하면서 느낀 것은 어쩌면 이분들이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선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은 물론 조상의 덕을 기리고, 문화재를 지켜준 이에 대한 고마움을 말하면서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숙종이 하사했던 박동(현재 조계사 터)의 340칸의 큰집과 말죽거리의 50여만 평에 이르는 막대한 재산은 김씨 문중의 대한제국 말기 후손 김교헌(단군교 2대 교주)이 팔아 독립군 군자금으로 대는 바람에 종가집이 이후 어려움을 겪었다는 비화를 들으면서 “독립운동 지사 후손의 어려움을 여기서도 목격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영사정은 먼 곳에서 보기보다 가까이에서 보니 제법 한옥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튼튼해 보였다.     © 김영조
     
▲ 영사정 뒷산에 있는 영사정을 지은 인원왕후의 아버지 김주신 뫼     © 김영조
 
김덕경 종중회장은 “조상 김주신 할아버님은 말을 타고 아버님의 묘소를 찾아오다 약 4km쯤 떨어진 송강고개에 이르러 멀리 아버님의 무덤이 보이면 말에서 내려 걸으셨습니다. 그만큼 효성이 대단한 분이셨지요.”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최우성 씨는 “영사정을 관리해 온 종중 어르신들은 정말 훌륭한 분들입니다. 후손들이 10대를 살아오면서도 자기들의 편리성에 맞추어서 집의 구조와 부재들을 바꾸지 않고 거의 원형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살기에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도 그 흔한 새마을 보일러조차도 깔지 않은, 불편하지만 조상의 숨결을 고스란히 지켜냈기에 저는 그분들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며 감탄했다.

문화재 당국의 무관심 속에서 그냥 허물어질 뻔했던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는 이렇게 한 문화재수리기술자의 정성으로 우리 곁에 남게 되었다. 자신의 안녕이나 사업적 이해타산을 돌보지 않았던 문화재수리기술자 최우성 씨는 우리 문화계에 적지 않은 태풍을 일으켰고,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일깨워줌은 물론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준 쾌거를 이루어냈다.

말로만 우리 문화 사랑을 외치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온몸으로 문화재를 지켜낸 최우성씨야말로 실천하는 문화지킴이요, 우리 문화의 진정한 보배가 아닐까? 


"문화재를 지켜내는 것은 내게 맡겨진 소임이었다"

[대담] 영사정의 문화재 지정을 이끌어낸 최우성 문화재수리기술자

▲ 영사정 문화재지정에 온몸을 바친 최우성 한겨레건축사무소 대표     ©김영조
- 전통건축 전문가의 눈으로 본 영사정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인가?

“아주 드문 평4량의 지붕구조, 부엌과 곳간 사이의 판자벽이 커다란 자귀로 툭툭 쳐서 거칠게 다듬은 판자라는 점, 대청마루에서 뒤꼍으로 난 문은 판자를 붙여서 만든 양여닫이문인데, 문짝 가운데에 문설주가 서 있는 아주 희귀한 구조라는 점들이 영사정의 값어치를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영사정이 흔한 제실(祭室)이 아니라 좀 더 규모가 큰 제사(祭舍)한겨레건축사사무소 최우성대표 였다는 것과 300년 전 전통집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좌절을 겪기도 했는데, 어떤 마음으로 계속할 수 있었나?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땐 초등학생도 알면 신고해야 할 것이 문화재관련 일이기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불이익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라고 한 문화재위원이라는 분은 이렇게 귀중한 가치를 왜 모를까 하는 마음에서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만일 여기서 주저앉으면 김씨 문중으로부터 ‘되지도 않을 일로 평지풍파만 일으켰다.’라는 꾸중을 들을 것이란 생각에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 이번 문화재 지정에 종중에서는 최 기술사를 최대공로자라고 말한다. 실감하나?

“아니다. 물론 내가 힘쓴 점도 있지만 만일 종중 어른들의 굳건한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개축하려고 이미 사들인 목재 값만 해도 2억 5천여만 원은 되는 것으로 들었는데, 그런 손실을 감수하고 언제 지정될지도 모르는 불투명한 상황에서 한없이 기다려 준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분들이야말로 일등공신이다. 그리고 문화재지정을 위해 뛰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 다시 힘을 실어준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이은만 전 회장도 큰 힘이 되었다.”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요즘 불교 전각들은 옛날보다 초라하다. 절의 대표적 가람인 대웅전이 예전과 달리 대부분이 1층짜리이다. 일본에 불교를 전수해주고 가람의 설계와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일본 호류지(법륭사) 금당만 보더라도 2층인데 이를 전수해준 우리나라의 대웅전은 고작 1층짜리밖에 없다. 이제라도 2층짜리 대웅전을 번듯하게 설계하여 찬란한 불교국가였던 한국 절의 위상을 보여주고 싶다.”

귀중한 문화재 영사정을 지켜낸 한겨레건축사사무소 최우성 대표. 그는 적어도 우리 문화 특히 전통 집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모습에서 역시 그도 이 시대의 선비로 살아가는 사람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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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5/05 [23:4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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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림 2010/05/07 [03:11] 수정 | 삭제
  • 문화재만큼 귀중한 유산은 없습니다. 물론 유무형 모두입니다. 최소장님의 열정에 고개 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