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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언론의 마녀사냥, '에이즈 임산부' 낙태 종용
[바라의 에이즈는 없다] '모자보건법' 시행, 정부-언론 '낙태종용' 논란
 
이훈희   기사입력  2009/07/02 [11:37]
HIV 양성 판정을 받은 임산부의 낙태를 금지하는 내용의 ‘모자보건법’ 시행령 개정안이 30일 오후 국무회의에서 의결돼 오는 7월 8일부터 시행된다.

기존에 낙태가 허용되던 천성면역결핍증·풍진․수두․간염 등이 제외되고, 풍진, 톡소플라즈마증 및 그 밖에 의학적으로 태아에 미치는 위험이 높은 경우에만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된 것.

이 같은 법 개정에 따라 지금까지 HIV 양성 판정을 받은 임산부에 대해 정부 지침에 따라 조직적으로 낙태를 종용해왔던 관례와 언론 보도에 의해 널리 양산된 사회적 혐오감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HIV 양성인 부부의 출산은 규탄의 대상

HIV 양성 임산부의 출산이 비윤리적이라고 성토한 최초의 언론 보도는 지난 98년 4월 문화일보의 ‘에이즈부부 출산 “겁난다”/서울대병원서 또 분만… 윤리성 논란’이다.

이 기사에 문화일보는 “3월 하순 서울대병원 산부인과에서는 서울에 사는 에이즈에 감염된 H씨가 보건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자아이를 출산했다.”면서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의료계와 학계 및 사회단체에서 윤리성 논란이 본격적으로 제기”된다고 주장했다.

복지부에서 HIV 양성인 관리 차원에서 ‘낙태’를 종용하긴 하지만 출산을 원하는 양성인에 대해 현행법으로 강제 낙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요지다.

이어 2003년 10월에는 각 일간지마다 아이를 출산해 양육 중이던 HIV 양성인 부부에 대한 비난의 기사가 쏟아졌다. 
 
세계일보 - 에이즈 감염 알고도 출산
동아일보 - 이해못할 父母…에이즈 감염사실 알고도 출산
서울경제 - 에이즈 감염 알고도 출산 아이도 감염 국내 첫 확인
서울신문 - 에이즈감염 알고도 출산/보건당국, 10세 여아 뒤늦게 확인 금지할 법적수단 없어 대책 시급


이 때도 언론사들은 복지부의 입을 빌려, 현행 에이즈 예방법에는 보건당국이 HIV 양성인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강제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문제 삼으며, 부모는 물론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며 건강하게 생활하던 아이까지 싸잡아 ‘반사회적인 위험 인물’로 낙인찍기에 바빴다.

낙태 종용당한 임산부 대다수 낙태해
HIV 재검사에서 다시 음성으로 나타난 임산부도 있어

그렇다면, 보건당국의 임신 금지 및 낙태 종용 요구가 강제력이 없었을까. 한국 에이즈 재평가를 위한 인권모임의 부대표인 김종성(가명) 씨에 따르면, 임신 중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HIV 혈청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인 여성들 중 대다수가 낙태를 했다고 한다.

올해도 양성 판정을 받은 여성이 낙태를 했다는 것. 김 씨는 “그 여성은 두 번째 임신 때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남편은 음성이었다”면서 “보건소 담당자가 낙태하라고 했지만 부부의 결심으로 정상 분만을 했고, 아이는 HIV 음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올해 세 번째 임신을 하게 되었고, 또다시 정부와 싸우면서 출산해야 하는 게 큰 부담이 되어 결국 낙태를 하게 되었다”라고 전해주었다.

또 김 씨는 “그 여성이 낙태를 하긴 했지만, 두 번째 아이 출산 후 재검사를 했을 때는 음성으로 나타났다”며 “외국에 가서도 재검사를 했고, 그 나라 국가기관에서 음성 받은 사실을 공증까지 받아 귀국했다”라고 말했다.

강보미(가명) 씨 역시 보건소로부터 낙태종용을 받은 적이 있다. 강 씨는 지난해 4월 병원으로부터 임신을 했다는 말과 함께 HIV 양성이란 통보를 같이 들은 것. 그러나 검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해 2주 후 다시 재검사를 받았고, 이때는 HIV 음성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 대해 강 씨는 “HIV 양성판정이 나왔을 때 보건소 직원이 ‘100% 확실한 결과’라고 말했다”면서 재검사에서 음성판정이 나온 것에 대해선 “보건소 직원도 ‘의문이다. 아마 피가 바뀐 것 같다’며 변명했다.”고 회상했다.

정상 분만으로 건강한 아이를 낳고, 모유 수유를 열심히 한다는 강 씨는 양성 판정 받았을 때만 생각하면 “정말 무섭고 두렵다. 그리고 치가 떨린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아기에게도 미안하다“며 “양성 판정을 받은 뒤 재검사를 하지 않은 임산부들과 태아, 가족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왜 정부는 확실하지 않은 HIV 검사를 해서 한 인간과 가족을 파탄까지 몰고 가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고 혀를 찼다.

이어 지난 2002년 일명 여수 에이즈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박수진(가명) 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나는 건강하고, 5살된 아이도 건강하다. 이 아이는 여러 번 HIV 혈청검사를 해봤지만 그때마다 음성이었다”며 “내가 HIV 양성 판정을 받았을 때는 두 번째 임신 중이었다. 아이를 낳았더니 아이는 HIV 음성이었고, 남편도 음성이었다. 보건소에선 내게 재검사를 해보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 같다”고 검게 탄 속내를 털어 놓았다.

임신이 HIV 위양성을 초래한다는 논문이 있어

외국에서도 HIV 양성판정을 받은 임산부의 출산에 대한 비난은 국내와 다를 바 없는 실정이다. 에이즈 리포트인 셀리아 파버의 저서 <검열되지 않은 에이즈의 역사>에서는 “여성 HIV 양성인은 낙태를 강요받았고, 임신을 감행했을 경우 혹독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고 실태를 밝힌다.

이 책에 소개된 HIV 양성인 크미엘은 출산을 감행했고, 귀여운 딸을 낳았다. 딸은 HIV 음성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에 의문을 품은 크미엘은 HIV 재검사를 해보았고, 첫 번째 결과는 ‘판정보류’, 그 다음 결과는 ‘음성’이었다.
 
스스로 HIV 혈청 검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크미엘이 발견한 것은 ‘64가지에 이르는 HIV 테스트에서 위양성을 유발할 수 있는 잠재조건을 열거한 논문’이었으며, 위양성을 초래하는 요인 중 하나는 ‘임신’으로 드러났다.

정부차원의 과학적 조사 필요

HIV 양성 임산부에 대한 비난이 모자보건법의 개정으로 멈추진 않을 것 같다. 반체제 에이즈 활동가인 고홍식 (48세) 씨는 “에이즈는 과학이 아니라 언론의 장단에 움직인다”고 지적하며 “정부의 임산부에 대한 낙태강요는 국민 기본권 압살이었지만, 정확한 진상도 확인해보지 않은 기자의 손끝은 마녀사냥이었다”고 진단했다. 

고 씨는 이어 “에이즈에 대한 국민의 인식 개선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임산부에 강제적으로 실시되는 HIV 검사”라고 규정하며, “임신이 위양성을 초래한다는 논문이 있고, 외국에선 이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있다. 국민의 행복권을 위한다면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의 과학적 조사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현재 에이즈 단체에서는 감기 등 일상적인 가벼운 질병들도 HIV 위양성을 일으킨다는데 공감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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