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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슬기 맑힘', 민중을 담아내야 합니다"
[서평] ≪철학은 슬기 맑힘이다≫ 구연상 "우리 생각, 우리 말로 학문해야"
 
김영조   기사입력  2009/04/13 [07:46]
▲ 구연상 지음 <철학은 슬기 맑힘이다> 책 표지     ©도서출판 채륜
일반 대중이 학술서를 읽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건 왜일까? 대중들은 학자들만이 읽는 글이어서 그렇다고 치부해버린다. 그들만 아는 어려운 말을 쓰고, 문장도 난해한 것이 그들 글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정말 어려운 한자말, 외국어를 쓰고, 난해한 작문을 해야만 할까? 하지만, 여기 쉬운 우리말로 학문을 할 수 있다고 아니 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가 있다. 

우리말사상연구소 연구실장 구연상 씨가 바로 그 사람인데 그는 최근 도서출판 채륜을 통해 ≪철학은 슬기 맑힘이다≫이란 책을 펴냈다. 책은 우선 철학이란 한자말을 우리 생각이 담긴 우리말 “슬기 맑힘”이라고 바꾸면서 우리말로 학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슬기 맑힘”을 끌어내려고 ≪월인석보≫(1459), ≪능엄경언해≫(1461), ≪남명집언해≫(1461), ≪구급방언해≫(1466), ≪석보상절≫(1447) 따위의 조선 전기 옛 책들을 뒤적이고 헤맸다고 한다. 그 근거를 찾으려 온갖 노력을 했고 간단히 찾은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는 말한다. “슬기는 ‘저마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살아나갈 줄 아는 힘입니다.’ 이때 <저마다>는 ‘오직 나에게만’을 뜻할 수 없습니다. ‘저마다’에는 나를 비롯한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속합니다. ‘저마다’의 범위는 우리가 서로 더부는 울타리의 넓고 좁음에 따라 넓어지거나 좁아집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이지만, 이때 ‘나’는 ‘외곬-나’가 아니라 ‘서로-더부는-나’입니다.” 

또 그는 “‘슬기 맑힘’만으로는 실제 ‘실제 저마다에게 보다 나은 삶’이 선사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삶은 사람의 슬기를 짓밟고 그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악’을 물리칠 때 가능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저는 철학의 문제를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에로 되돌려 놓고자 합니다. 아니 철학은 본디 삶에 이바지해야 하는 ‘하나의 학문’에 불과합니다. 철학자들은 새롭게 출현한 지중(智衆)의 안목을 배워야 합니다. 지식의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체계의 사슬에서 좀 벗어날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노력을 단순히 말밑(어원) 밝히기에 불과하다고 낮춰버린다. 하지만, 제나라 말이 아닌 한자말이나 외국어로만 철학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어찌 제 나라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학문은 우리말로 담아낼 수 있을 때 그것은 진정 제 나라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 점에서 지은이의 이런 노력은 정말 가상한 일이 아닐까? 

구연상 교수가 몸담은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정현기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학문에서의 바른 글쓰기나 말하기는 우리말로 학문하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  

“올해는 안중근 큰사람이 온갖 한자말 투성이 <을사오조약>을 맘대로 만들어 우리를 겁주고 억지로 찍어누른 일본 부라퀴(제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사람)를 총으로 쏘아 죽인 지 10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안중근 큰 사람을 여순감옥에 가둔 채, 우리들 모여살이 곧 삶의 바른 일에, 눈을 감고 있었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게 바로 바른 글쓰기나 말하기와도 아주 깊이 맺어져 있다는 생각은 저를 괴롭게 합니다.” 

이 책은 구연상 교수의 제1강 “슬기 맑힘과 악(惡)”, 제2강 “개인(個人)의 유래”라는 강의록을 바탕으로 낸 것으로 “사이의 사무침” 제1권이다. 사이는 그의 호인데 그곳엔 “천지인” 사상이 들어 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 자연과 사람 사이 등 온갖 사이를 규명하려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어지는 “사이의 사무침” 제2권은 “행복”을 주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큰 노력이 담긴 이 책은 약간의 흠이 있다. 기독교 성경 “욥기”를 제시하는 대목에서 기독교의 신을 하느님, 하나님, 여호와, 주 등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여 약간의 혼란을 느낀다. 또 우리말로 학문하며, “슬기 맑힘” 같은 아름다운 우리말 용어를 찾아냈음에도 악창, 평강, 초석, 절멸, 성채, 거하는 등의 좀 까다로운 한자말을 사용했다는 점도 아쉽다. 

하지만, 그런 옥에 티에도 우리말로 철학을 할 수 있다는, 또 그로써 우리의 진정한 철학을 보여주었다는 그의 노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저 관습대로 학문하면 칭찬도 받고 좋은 자리에 갈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런 쉬운 타협에 만족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면이 있더라도 제대로 된 한국철학을 하고 싶다는 그의 소망과 정성에 우리는 손뼉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은 민중을 담아내야만 한다
[대담] ≪철학은 슬기 맑힘이다≫(채륜) 지은이 구연상  

▲ 대담을 하는 지은이 구연상     ©김영조
- ≪철학은 슬기 맑힘이다≫를 쓰게 된 배경은?


“나는 철학공부를 15년 했고, 그래서 철학을 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강의 도중 한 학생이 ‘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밝을 ‘哲’과 배울 ‘學’ 자를 쓴 것이고 서양에서는 “philosophy”라고 한다고 답을 해줬다. 그랬더니 “philosophy”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나는 우리말로 정확하게 짚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에게 사과하고 다시 공부하여 알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본격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자유로운 우리말로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서양·고전의 철학 용어를 모두 뒤졌지만 요즘의 의미와는 많이 다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철학용어가 학술어지만 낯설면서도 새로운 낱말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각오를 했고, 온갖 옛 문헌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얻어낸 것들을 정리하여 강의를 했고, 이를 보완하여 책을 낸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자칫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으며, 외면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각오도 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에겐 엄마보다는 ‘맘’이, 음악보다는 ‘뮤지션’이, 문화보다는 ‘컬쳐’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런 까닭에 지금은 ‘슬기’란 낱말이 낡아빠진 것일 수도 있지만, 영어에 익숙한 다음 세대에겐 새로운 경험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런 시도야말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 일반적으로 철학은 어렵다고들 생각한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철학 낱말들은 그물과 같다. 한 코, 한 코도 의미가 있겠지만 전체가 연결되어야 그 뜻이 확연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한 낱말만 이해해서는 조각그림일 수밖에 없고 전체 그림을 알 수가 없어서 어려운 학문으로 보인다.  

또 한국 철학 낱말들은 사실은 낱말이 아니고 기호일 뿐이다. 예를 들면 존재(存在)는 ‘Being’을 가리키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 기호만으로는 철학을 할 수 없다. 거기에 더하여 한국의 철학은 현실을 설명해내지 못한다. 현상을 설명하면 쉬운데 현실이 내재하지 않았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철학에 닥친 과제가 바로 이점인데 기호가 아닌 용어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현실을 설명해낼 철학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 지은이는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면 우리말로도 철학을 할 수 있는지, 또 우리말로 철학 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말해달라?

“철학 속에 삶이 담겨 있지 않으면 공허하다. 민중에게 삶의 길을 제시해주지 못하면 진정한 철학이 아니다. 거기에 더하여 철학은 보편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에 철학은 그들의 민중을 담아내야만 하는데 한국 철학을 모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한다거나 완전하게 우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한자말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양 철학은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로부터 정립해왔지만, 우리는 우리말로 정립해놓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우리말로 우리의 정서에 맞게 재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말로 철학 하는 것이 시작은 낯설고 어려울지 모르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며,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란 생각이다.”

대담은 끝이 없었다. 그가 평소에 가졌던 철학에 대한, 사회에 대한, 삶에 대한 끝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런 그의 말들은 합리적이면서도 진보적인 그리고 가슴 따뜻한 내용이어서 오랜 시간 얘기했지만 따분한 느낌을 가질 새는 없었다. 그 같은 철학자만이 앞으로 우리 겨레의 앞날을 환하게 비춰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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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4/13 [07:4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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