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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패권주의 용어가 거부감을 줍니까?"
'지역감정'이란 담론 속에 숨겨진 위악과 진실을 찾아서
 
이경렬   기사입력  2003/09/04 [11:17]

본지에서는 앞으로 대표적 '한국병'이라 할 수 있는 '지역차별 조장'의 원인과 그 결과인 망국적 '지역감정'의 뿌리를 찾아 그것을 주도한 세력의 본질과 폐해를 규명하고 바람직한 대안을 찾고자 합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우선 '영남패권주의'의 형성과 그 공세적 이데올로기의 출발과 운영에 대한 심층탐사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독자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그리고 활발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편집자주


 
▲지역주의 들여다보기    
<영남패권주의>란 말이 적어도 인터넷 문화의 흐름에 민감한 네티즌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어로서 서서히 자리잡아 가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이 사회 곳곳에 섬세한 촉수를 뻗쳐있는 영남패권의 존재 자체만큼은 검증 과정을 거쳐 점차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이 용어의 지속적 쓰임과 의식의 확산은 그것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픈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적지않은 압박으로, 스트레스로, 위기의식으로 작용하게 될 것 같다.
 
1. "지역차별"
 
이전까지 이 용어를 대신해왔던 말은 기껏했자 <지역차별>이었다. 지역차별이란 어느 지역인가의 소외를 전제하는 것이되,  정신이상의 상태를 진단하는 피해'의식'이란 말을  피해 당사자 위에 교활하게 덧씌우므로써 정작 소외를 불러 일으키는 그 <가해 주체>를 어디엔가 꼭꼭 숨겨놓고 말았다. 
 
<지역>이란 일반 명사 속에, 특정한 지역의 가해적 위치와 피해적 위치의 구분이 끼어들 여지를 아예 없애므로써 차별의 실체를 부정하겠다는 의도를 그 안에 감추어온 것이다. 
 
게다가,  <차별>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발생시킨 '피해사실'보다는, 다분히 피해 당사자가 실제와는 다르게 그저 망상적으로 갖을 수 있는 '피해의식'이 진정한 문제의 본질이라는 식의 어의조작이 어이없게도 대중에게 폭넓게 먹혀들은 결과,  피해 당사자들의 <저항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역할을 하였다. 
 
가장 첨예한 갈등 주체인  영남과 호남이란 두 지역의 실체를 묻어두는 용어로서 <지역차별>을 사용할 때, 그것은 문제의 본질이 노출되기를 경계하는 자들의 깊이 배인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2. "지역감정"
 
가장 미개한 수준의 인식을 시사하고 있는 <지역감정>은 아직까지도 일반 매스미디어(종이신문, tv)는 물론 그 중 진보적이라는 한겨레 신문의 '인터넷판'에서조차 부동의 대표용어로서 질긴 수명을 자랑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 우리 사회가 갖는 패권주의에 대한 인식 수준이 일천하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보수 집단일수록 이 논의가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지역감정'이란 어휘를 고집하는 것은 역사적 인과성과 사회적 발생 조건을 깡그리 배제함과 동시에 그 현상을 일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 편견의 결과물로 묶어둠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끝내 엄폐시키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지역차별'과 함께 그보다 덜 진화된 어휘인 지역갈등, 지역감정, 호남소외 등의 쓰임새가  영남패권주의란 용어와 다른 점은, 한결같이 <가해자를 실종>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의 소산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용어들이 어떻게 생성 진화해 왔으며 누구에 의해서 의미 왜곡이 자행되고 대중 조작이 이뤄져왔는지를 유추하는 것은 전혀 곤란한 일이 아니다. 그 주체는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실체를 기어이 덮음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집단을 보호하겠다는 이 사회의 정치경제적 기득권계층일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언론과 정치권은 물론 대단히 진보적인 극소수를 제외한 사회 일반은, 그것이 패권이라는 구조와 사회학적 집단의 문제라는 본질을 애써 외면하면서 관심을 오직 <개인>의 사소한 선택적 문제로 한정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공론의 경험이 전무한 일반 대중은 여전히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이 거대한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지역감정'의 저차원 논리를 너무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왔다.
 
일천한 단계일망정 <온라인> 상의 논의는 그 성역의 맨 가장자리를 깨뜨리는 성과를 갖어왔다. 지역감정을 거쳐 담당주체를 슬며시 빼낸 지역갈등이라는 용어를 지나, 그나마 한결 진실에 접근한 지역차별이라는 어휘를 거부감 없이 사용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다 지역차별의 문제 핵심이 결국 <지역패권주의>에 있다라는 본질 규명의 차원으로 인식의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3. "영남패권주의" 논의주체의 이전(移轉)
 
이렇듯 <영남패권주의> 논의가 본격화 되기까지 거쳐온 발전 과정이 시사하고 있는 것은 인식과 논리의 발전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논의 주체>의 주도권 이전이란 점이다. 이전까지는 그 주체가 기득권계층이었다. 마음대로 용어의 본 뜻을 비틀고 진실을 은폐 호도하고 논의를 독점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파워와 도구의 소유자인 기득권세력이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그 주체는 진실을 벗겨냄으로로써 이제까지 자신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그 계층이 당해왔던 불균형을 바로잡아 놓겠다는 피해 당사자들이 중심에 서게 된 사실이다.
 
<영남패권주의>의 논의가 주류 비주류를 막론하고 언론의 기피 영역으로 남아  있는 사실이 암시하는 것은, 이 논의가 갖는 <엄청난 사회적 폭발력>이다. 이제 인터넷의 환경으로 인하여 논의의 주체가 그것을 억압해왔던 보수언론으로부터 피억압 일반민중으로 넘어옴으로 인해, 조만간 영남패권주의의 실체와 패악이 완전히 까발려지며 혁파의 해법 또한 다양하게 분출될 것이다.
 
보수 언론과 사회의 모든 기득권 계층은 일시에 뒤집어지고 만 정세 반전의 환경 속에서, 이제 논의의 <수세>에 몰리며 기존 논리가 깨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목도할 수 밖에 없다. <영남패권주의>란 용어의 발명과 <인터넷> 상의 공론화는 힘의 주도권을 네티즌에게 이양케 하였다. 이것은 또한 단순히 '논의의 주도권' 쟁취만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의 지배논리 그리고 그 지배층의 존재 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사회 <가치체계의 변동>을 유인하고 말 거대한 사회운동의 물결로 발전할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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