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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없는 촛불집회, 자찬하기는 이르다
[정문순 칼럼] 분노만이 아닌 공동체에 대한 시민적 감수성 회복 시급
 
정문순   기사입력  2008/06/13 [17:53]
노도와 같은 촛불 물결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이명박 대통령을 싫어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을 재개발하여 땅값 올리고 재산을 불려주겠다는 한나라당 후보들의 공약에 앞뒤 가리지 않고 혹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쌀 시장 개방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농민들에게 지금의 청와대 주인과 같은 논리로 값싸고 질 좋은 수입 쌀을 못 먹게 한다고 비난을 던지고, 보조금만 축낼 뿐 경쟁력 없는 농사는 지어서 무엇 하느냐고 비아냥대던 도시민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농민들이 시위 중에 진압 경찰의 방패에 맞아 죽어가도 시위가 과격하니 어쩌니 하는 말로 여론이 달궈졌던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쇠고기 시장 개방 확대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 한·미 FTA 협상의 선결 과제 중 하나였다. 도시민들이 진작 한·미 FTA 협상과 쌀을 위시한 농축산물 시장 개방이 농민들만의 생존권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과 가족의 일임을 깨달았다면 오늘 촛불을 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농축산물의 대책 없는 시장 개방을 막느라 피땀을 흘렸던 농민들로서는 농민의 목숨줄이 달린 문제가 자신의 밥상 문제가 되니 들불 같이 일어서는 도시민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미친 소를 먹지 않겠다는 함성이 가득한 집회장에서 자신들의 요구에도 지지의 촛불을 켜달라고 한 농민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건 당연하다.
 
집회장에서 촛불은 어두운 밤을 밝히기 위해 켜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한 개의 미약한 불빛을 넘어 어둠을 몰아내는 촛불의 물결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연대의 힘이다. 이웃의 고통에 무심하지 않으며, 약자와의 공감과 결속이 궁극적으로 나를 비롯한 만인의 밥상 안전을 지키는 일임을 아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다. 그런 점에서 촛불 집회가 6월 항쟁이 낳은 민주주의 성과보다 진전이 있다고 단언하는 데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당시 시민들의 요구는 독이 든 쇠고기가 자기 입에 들어가는 실용의 문제가 아닌, 죄 없는 이웃의 피를 볼 수 없다는 연대의 외침이었다. 
 

촛불집회는 시민들이 집권자에게 보냈던 지지를 스스로 거둬들이는 것을 나타낸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경우 지난 20년 동안 힘들게 일궈온 민주적 가치들이 하루아침에 없던 일이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게 어렵지 않았음에도 그저 돈다발을 안겨 주겠다는 근거 없는 약속에 홀려 민주주의 대신 돈을 선택한 시민들의 자기반성적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총칼로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니고 선거를 통해 당당히 선택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그동안 시민에게 가해온 폭력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대학생을 고문하여 죽이고 시위 학생을 최루탄으로 쏘아 죽이는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은, 내 몸만 조심하여 숨 죽여 살면 나하고는 얼마든지 무관한 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내 한 몸, 내 가족이 권력자의 눈밖에 나지 않게만 살면 안 다칠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이에 반해 학교 다니는 내 아이가, 군에 간 내 자식이 치명적인 쇠고기를 선택의 여지도 없이 먹어야 하는 건 독재 정권의 정치적 폭력에 비해 훨씬 더 폭이 깊고 삶의 전 영역에 스며든 일상의 문제다.
 
군사정권의 폭력에는 시민들을 이끄는 단일하고 조직적인 중심 세력이 없으면 시위대는 오합지졸이 되기 십상이지만 쇠고기 문제의 경우는 다르다. 피를 본 것이 아니니 시민들이 비장하고 결사항전의 결의에 차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긴장이 없는 대신 그 지속성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누구의 지시에 의하지 않고도 스스로 타올랐던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을 것이다.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바로 자신의 문제이고, 회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랄하고 자유로운 지금의 촛불집회 문화는 당면한 쇠고기 의제가 시민들에게 정치가 아닌 일상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뿐 민주주의 성숙도를 말해준다고 보기에는 성급하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사회라면 애초에 이명박 정부의 선출도, 생존 기반을 빼앗기는 농민들에게 보내는 도시민들의 냉소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자랑하는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한 자성과 성찰의 마당이 되어야 마땅하다. 30개월 미만의 살코기 수입만으로 촛불이 꺼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건 광우병을 막기 위한 이전 정부의 방침이었을 뿐 영세한 한우 농가의 위기의식을 달래는 대책과는 무관했다. 미국산 쇠고기를 안 먹겠다는 게 아니라 안전한 걸 먹고 싶다는 뜻이라며 자신이 촛불을 든 이유를 설명하는 이들에게도 소 사육 포기를 고민해야 하는 농민의 처지는 안중에 없어 보인다.
 
한·미 FTA의 재고 없는 촛불도 무력하다. 경제 주권을 망치는 내용이 허다한 한·미 FTA 내용을 그대로 두고 쇠고기 검역 주권만을 논할 수는 없다. 집회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토론 마당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은 쇠고기를 넘어서 농민, 화물 노동자 등 이웃과의 연대 의식을 통한 민주주의 학습이다.
 
이 과제가 서울보다 지역에서 더욱 절실해 보인다. 귀청을 울리는 노랫소리 속에서 쌔근쌔근 자는 유모차 속의 아이가 있고, 교복 입은 학생들이 연단에 올라 발랄하고 톡톡 튀는 발언을 토해내는 것은 서울과 다를 바 없지만, 내가 사는 창원 지역의 집회는 대책위원회라는 단일 조직이 집회를 주도하는 양상이다. 집회장에서 소규모 토론이나 모임은 보기 힘들며 연단 위의 행사와 가두 행진이라는 단조로운 레파토리로 일관하고 있다.
 
운동권이 일반 시민들에게 훈장 노릇하려는 모습도 나타난다. 6월 초 인도로만 행진하고 있던 시위 대열을 예고도 없이 차도로 돌리려 함으로써 가만히 있는 전경 무리들을 불러 모아 시민들과 대치하게 했던 민주노총의 태도가 그렇다. 나중에 민주노총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한창 서울에서 폭력 진압이 일어나던 때라 열 받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쇠고기로 열 받은 수천 명의 시민들은 민주노총 깃발을 보고 모인 것이 아니었다.
 
운동 단체의 지도 없이도 시민들은 쇠고기 문제에 있어 스스로가 주인임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생존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촛불을 스스로 꺼뜨리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에 아직 둔감한 이들이 있다. 공권력과의 대치 상태를 일부러 만듦으로써 분노를 표현하는 것 못지않게 놓아버렸던 공동체에 대한 시민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게 시급한 일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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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6/13 [17:5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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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08/06/15 [13:56] 수정 | 삭제
  • 좋은 지적입니다.

    촛불집회의 축제적 성격과 생활정치적 성격의 자발적 참여는 그대로 존중하고 유지하면서 동시에 간과되고 있는 연대감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글쓴이의 지적처럼 연대감이나 조직적 지도가 없는 대규모 시위는 자칫 무정부적 방향으로 흐를 오류의 위험성도 있고 (물론 지금까지는 자체적으로 잘 걸러져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 지속가능한 형태가 아닌 일회성의 이벤트 행사로 그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필자가 지적하는 연대감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로 모두들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과제로 좋은 화두를 던져주는 좋은 글이 분명합니다.
  • 항상 2008/06/13 [22:02] 수정 | 삭제
  • 항상 머하는지 모르다 뒷북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