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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광우병 공포와 북한의 식량난
[정문순 칼럼] 북한 식량위기는 세계화의 공통된 피해, 대북지원 나서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8/05/30 [16:08]
전세계를 휘감고 있는 식량위기의 격랑이 북한에서는 폭풍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간 1995년 이후 4년여 동안 몰아쳤던 대기근이 다시 올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공식 통계 200여만 명의 아사자를 낳았던 끔찍했던 대기근 당시 어느 도시의 영아원에는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들이 하나같이 보채지도 울지도 않은 채 눈만 휑하게 뜨고 있는 장면이 세계에 전파되었다. 한 국제기구 관계자가, 아기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울어도 밥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받은 충격이 아직 잊어지지 않는다. 국제기구 사람들의 방문이나 외신 기자의 취재를 통해 알려진 북한의 이런 참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세계화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 자신만의 표준과 규범으로 살아온 나라가 속절없이 세계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는 건 참으로 역설적이다.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에 식량을 크게 의존해왔던 북한을 다시 굶주림으로 몰아넣고 있는 국제 식량값의 폭등은, 세계화의 본질이 부와 번영을 골고루 나누는 의미의 세계화가 아니라, 중심국과 주변국의 위계적 구도 속에서 빈곤이 주변국에 집중되는 빈곤의 세계화일 뿐임을 잘 말해준다.
 
중심국이 풍요를 구가하는 동안 주변국은 빈곤해지며, 중심국이 이전보다 덜 풍요로워질 때 주변국은 굶어죽을 위기에 빠진다. 세계화에 편입되든, 편입을 거부하고 고립을 택하든 주변국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주변국에 그나마 남아 있는 자원은 물론이고 미래의 성장 잠재력까지 갈퀴로 솎아내듯 하는 중심국의 횡포는 주변국 주민들을 자신의 근거지에서 벗어나 전세계를 떠도는 이주민 신세로 만들었다.
 
북한의 대기근 당시 국경을 넘은 주민들은 30여만 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에서 딸부잣집 일곱째 막내딸 바리데기는 대기근의 여파로 가족과 뿔뿔이 흩어지자 어린 나이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들어간다. 세계화의 고통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되며 여성에게 한층 더 가혹하다. 빈곤을 면하기 위해 낯선 땅으로 떠난 이주여성들에게는 인신매매나 성폭력, 매매혼 등의 새로운 질곡이 기다리고 있다.
 
바리데기의 언니 중 하나는 중국에서 가축 몇 마리 값에 시골 노인에게 매매혼으로 팔리며, 바리데기 역시 중국 땅에 안착하지 못하고 인신매매 집단을 통해 배 밑바닥에 숨어 영국까지 이르는 밀항을 한다. 당장 현실만 보아도 식량을 구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잠입한 북한 여성들이 인신매매와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고가 끊이지 않는다.
 
급증하는 북한의 식량위기가 하필 상호주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의 집권기와 맞물리고 있다는 것은 북한의 불운이다. 냉전 시대의 ‘구라이트’ 정부처럼 남북 대결주의를 내세울 수 없는 뉴라이트 집단이 들고 나온 상호주의는, 이익을 포기할지언정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약은 셈법인 것 같지만 실상은 챙길 수 있는 자기 몫마저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 쉽다.  
 
자신이 남한테서 받는 만큼만 내놓겠다는 사고에 빠진 사람에게서 미래를 전망하고 세상을 경영하는 역량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일의 성패를 자신이 아닌 상대방의 의지에 떠넘김으로써 주도력을 빼앗기고 그에게 끌려가는 것은 어설픈 형평을 내세운 상호주의의 자가당착적 귀결점이다. 북한과의 관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정부가 대북 발언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부는 북한이 지원을 요청하면 그때 가서야 도와주겠다며 손을 놓고 있더니, 자신들이 떠받드는 미국마저 식량 원조에 나서겠다고 하자 할 말이 없어져버렸다.
 
북한의 대기근 당시 남한 정부는 2백여만 명으로 잡힌 사망자 수치를 무슨 이유 때문인지 10배 가까이 줄여 통계를 냄으로써 이후 대북 지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 착오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아니 북에 정말 이끌려가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조건 없는 식량 지원에 나서라. 뉴라이트 집단이 흠모해마지 않는 ‘구라이트’ 집권기인 1984년에 남한이 물난리를 겪자 북한의 쌀 원조를 받은 적이 있을 정도이다.
 
한·미 FTA도 광우병 위험 소의 유입도 모두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낳은 산물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인 식품을 먹지 않을 권리를 빼앗기고 있는 남한 주민이든 병든 쇠고기마저 아쉬울 북한 주민이든 세계화의 피해자라는 똑같은 처지에 있다. 대북 지원과, 밥상의 공포에 대한 대처는 서로 맥락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남북이 동병상련의 처지임을 확인하고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만, 대북 정책의 비전도 전략도 없는 이 정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소설 <바리데기>는 10여년 전의 비극을 옮겨놓았다.  훗날 어떤 작가에 의해 이 소설의 2편이 쓰이는 세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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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5/30 [16:0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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