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국보1호 숭례문과 서울시장 출신 대통령
[정문순 칼럼] 서울의 독점적 패권주의, 지방의 잠재력과 역량 독식해
 
정문순   기사입력  2008/02/29 [23:45]
“숭례문의 화재는 단순한 문화재 소실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이다. 우리의 600(여) 년 역사가 한 순간에 불에 타고 재가 되어 버렸다.”

인터넷에 올라온 비분강개한 발언은, 잿더미가 된 숭례문을 보며 눈물 짓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인지 모른다. 화재 사고가 난 후 한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조화를 바치고 조문을 지어 올리기도 하는 등 과연 국보 1호는 그 이름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국장을 치르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만약 다른 국보가 만신창이가 되었다면 그만한 대접을 받았을까.
 
2005년, 역사를 따지자면 숭례문보다 훨씬 더 유서 깊은 천년의 고찰 낙산사가 거의 타다시피 하고 보물인 동종을 화마로 잃었을 때 나라 전체가 떠들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낙산사가 국민적 애도를 받으려면 궁벽한 시골이 아닌 서울에 주소를 둘 뿐 아니라 서울을 상징하는 건물이어야 하며, 타버린 유물들이 보물이 아닌 국보, 그것도 국보 1호란 이름을 달아야 가능했을 것이다.

▲화재로 무너져 버린 국보1호 숭례문을 지키는 경찰들이 12일 오후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CBS노컷뉴스

국보에 붙여진 번호가 문화재 가치의 우열이나 등수와 무관한 것임은 자명하다. 국보 1호니, 2호니 하는 것은 일제가 관리 편의상 붙인 일련번호를 해방 이후 정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기표는 기표에 머물지 않고 의미를 새롭게 생성하기도 한다. 같은 국보라도 사람들은 국보 2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숭례문이 국보 1호라고 할 때 사람들은 옛 서울의 관문을 서울만의 문화재로 머물게 하지 않고 한국의 상징으로 확대하여 해석한다. 숭례문은 국보 1호란 명칭을 얻은 후 나라 보물 중 으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왕조 시대 옛 서울의 상징을 ‘민족’이나 ‘역사’적 자긍심과 일치시키는 서울 시민들의 눈물은, 서울 시민이 아니어서 600여 년 역사를 오롯이 증언하고 있는 유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살갑게 느낄 기회가 없던 나로서는 왠지 불편하다. 만약 잃어버린 국보가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석굴암, 또는 해인사 팔만대장경 정도라면 그 눈물에 기꺼이 동참했을지 도 모른다.

서울의 힘은 문화재뿐만 아니라 최고 권력자를 뽑는 데까지 미치고 있다. 서울 시장이 대권을 꿈꾸는 자리라는 세간의 눈길을 받게 된 것은 광역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시작된 1995년 이후다. 당시 첫 민선 서울시장인 조순 전 시장은 대선 직전까지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 중 하나로 임기 내내 세인의 입길에 올랐고, 중도에 접긴 했지만 예상대로 출사표를 던졌다.

뭐니 뭐니 해도 서울 시장의 위력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지금의 대통령이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서울시장 경력이 없었다면 한나라당 안에 연고가 별로 없는 그로서는 청와대 입성은커녕 그 당의 후보로 선출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부산 시장 경력으로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웃음만 사고 말지 모른다.
 
서울을 상징하는 문화재가 국보 중 국보로 승격되는 데 어떤 중간 단계도 필요 없었던 것처럼, 서울 시장 경력에서 최고 권력자가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시장 자리를 청와대 직행 코스로 보장해준 것은 서울 유권자의 힘이기도 하다. 15대 대선 이후 이 지역 유권자들은 막강한 여론 장악력으로 대통령 선출권을 손에 쥐다시피함으로써 서울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서울에서의 승리는 곧 대선 승리였다.
 
이명박 내각의 상당수 인사가 영남 출신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성인이 된 뒤에는 하나 같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수도권 인구가 절반을 육박하는 지금 이후로 자라날 세대들이 정부에 입각할 나이가 될 때면, 그 때는 각료 중 지방 태생조차 찾아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서울이 곧 표준이요, 규범으로 통하는 현실은 지방 사람들의 자존심까지 건드린다. 대하소설 <토지>에서 양반 가문의 후예인 주인공 최서희는 하동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줄곧 서울말을 쓴다. 심지어 어릴 때 사투리를 쓰더라도 성장 후 성격이 점잖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는 사람들은 서울 한 번 가본 적 없어도 서울말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아무리 사람의 처지가 달라진다고 해도 경상도 사람 입에서 서울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는 없다. 이를 무시하는 건 소설적 기법일 수는 있어도 차별 의식의 소산이라는 혐의를 피해갈 수 없다.
 
지역 언어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대중매체가 더욱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방송 드라마에서 호남 말은 깡패들의 표준 언어가 되고, 충청도 말은 지력이 낮고 둔한 사람의 입에 갖다 붙인지 오래 되었다. 서울 ‘사투리’가 얼마나 품위 있고 정갈한 언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서울말 쓰는 젊은이들이 말끝을 가파르게 끌어올려대는 버릇은 내 귀에는 품위나 고상함과는 번지수가 멀게 느껴진다.
 
서울의 패권주의를 증언하는 사례는 그밖에도 많을 것이다. 몇 년 전 김해 지역에 유례 없는 물난리가 났을 때 그것을 제대로 보도하는 중앙 언론은 없었다. 그 피해는 지역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전국이 관심을 쏟아야 할 만큼 심각했다. 당시 수해 보도에도 지방을 차별하느냐고 하던 지역 언론의 울분이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서울의 패권화는 서울이 스스로 노력하여 힘을 기른 덕분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 이후 지방의 피땀을 몽땅 서울에 쏟아 부어 비대하게 살찌웠기 때문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진 것이다. 그러나 역대 정부에서 수도권 집중화를 막으려는 노력은 별로 없었거나, 있더라도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수도 이전 정책이 서울을 기득권의 표상으로 삼고 있는 세력의 반발로 침몰하자 그 대안으로 추진된 혁신도시 건설은, 현재로선 알맹이는 없이 그 지역 땅값만 잔뜩 올려놓아 땅 부자 좋은 일만 시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서울 패권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효율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정부는 지방이 죽든 말든 서울의 경쟁력만 높이면 대한민국이 잘 산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대통령직 인수위는 수도권 규제의 ‘합리적’ 해소를 새 정부 밑그림으로 잡아 놨다. 좋은 것은 서울이 몽땅 차지하고, 지방 사람들은 자신의 혈세로 서울을 살찌우면서도 찬밥 대우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자들에게 무슨 기대를 걸어야 할까. 지방의 역량과 잠재력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도 욕심을 누그러뜨릴 줄 모르는 공룡 도시가 있는 한 민주주의는 멀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02/29 [23:45]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