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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 : 난쟁이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을영의 시사 인물 포커스] 100만 부 넘은 <난쏘공>, 그 기록의 역사
 
최을영   기사입력  2007/09/24 [21:43]
난쟁이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하 난쏘공)이 2007년 8월 100만 부를 넘어섰다. 1978년 6월 5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초판이 발행된 지 29년 만이다.(2000년부터는 도서출판 이성과힘에서 출간) 1990년대 초에 100쇄를 돌파했던 『난쏘공』은 2007년 8월 현재 228쇄, 100만 부를 돌파하며 그 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책을 내고서 작고한 평론가 김현을 출판사 근처 다방에서 만났어요. 김현은 ‘밤새워 읽었다. 좋다. 8000부는 나갈 거다’라며 흥분하더군요. 그게 벌써 30년 전입니다.”1)
 
밤새워 『난쏘공』을 읽고 흥분했다던 김현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난쏘공』은 3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많은 이들의 책장에 자리를 잡았고, 그와 함께 조세희란 이름도 사람들의 가슴에 자리를 잡았다. 김현처럼 밤새워 『난쏘공』을 읽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난쏘공』은 꾸준하게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별다른 책 광고도 없이 출간된 지 30여 년이나 지난 책이 아직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난쏘공』이 주는 울림이 여전히 유효함을 반증한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난쟁이’ 가족 같은 이들은 존재한다. 조세희는 그 부분을 강조한다.
 
“처음 책을 낼 때는 몇 부가 팔릴 거라는 예상보다는, 검열에 걸리지 않고 세상에 나가 제 몫을 다할 수 있기만을 바랐어요. 이제 30년이 지나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100쇄 기념판’ 출간 같은) 흉한 짓을 하는 이유는 지금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사회가 풍요롭고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난쏘공』을 처음 내던 때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봅니다. 난쟁이 가족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죠.”2)
 
난쟁이 가족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조세희는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에게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조세희는 암울했던 197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난쟁이 얘기를 전하려 하고 있다. 때로는 글로, 때로는 행동으로 말이다.
 
철거촌에서의 마지막 식사
 
▲1978년 출판 이래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운 조세희 원작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2000년 개정판
조세희는 1942년 8월 20일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에는 양장본으로 된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조세희는 이 책들을 탐독하며 문학 청년 시절을 보냈는데 특히 그가 아꼈던 책은 포크너의 소설 『음향과 분노』였다고 한다. 얼마나 아꼈는지 『음향과 분노』만은 절대 다른 이들에게 빌려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조세희의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1년 선배인 소설가 김원일은 “세희가 아마도 『음향과 분노』를 한 열 번은 읽고 달달 외웠을 것”이라며 “『음향과 분노』에서 백치 벤지의 눈을 빌려 서술되는 짧은 문장들과 『난쏘공』의 단문들이 서로 관련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짐작하기도 했다.3)
 
1953년 서울로 올라온 조세희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가 경희대 국문과에 다시 들어갔다. 한국 문학의 양대 사관학교라 불리는 두 학교를 모두 거쳐간 것이다. 소설에 대한 그의 욕심은 남달랐고,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그는 스물세 살의 나이로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돛대 없는 장선」이 당선되면서 문학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조세희의 작가로서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돛대없는 장선」이 당선되던 해, 그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1969년 결혼과 동시에 가장이 되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또 좋은 작품을 쓸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70년 학생들 수험서인 『진학』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조세희는 이런 이유들로 인해 문학에서 멀어져갔다.
 
직장생활을 하던 조세희가 문학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3년 무렵이었다. “한 작가로서, 아니 한 시민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조세희는 1974년 10년간 놓았던 펜을 다시 잡았다.4) 그가 경험한 빈곤층의 핍박받는 생활이 그를 다시 문학의 길로 인도한 것이다.
 
“내가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 또 정의가 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택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나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 가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철거반이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 담을 쳐부수며 들어왔다. 나는 그들과 싸우고 돌아오다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5) 
 
그 작은 노트에 글을 쓰며 그는 다시 펜을 쥐었고 1975년 말에 『문학사상』에 단편 「칼날」을 연재하며 『난쏘공』을 시작했다.
 
단문의 이유
 
『난쏘공』의 문장은 짧다. 『한겨레』의 문학 전문기자 최재봉은 이를 두고 조세희의 트레이드마크인 “스타카토식 단문”이라고 평한다.6) 그런 단문이 나오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당시 조세희는 출판사에 다니며 틈틈이 다방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6년 『학생중앙』으로 직장을 옮긴 후에는 근처에 있던 서소문공원에서 소설을 써나갔다. 틈틈이 나는 시간이라 조세희는 항상 시간에 쫓겨야 했고 회사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세희의 문체는 점점 단문이 되어갔다. 『난쏘공』의 스타카토식 딱딱 끊어지는 문체는 모두 조세희의 소설 창작 여건 때문이었다. 또한 조세희는 당국의 검열을 무사 통과해야 했다. 자신이 일궈낸 창작물이 온전히 전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때문에 조세희는 『난쏘공』을 동화처럼, 현실과는 한발 떨어진 꿈처럼 써나갔다. 즉, 사실을 그리되 그 형식과 문체에서 동화적인 냄새를 풍긴 것이다.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일반인들과는 달리 사회의 약자로 취급받는 난쟁이, 꼽추 등을 등장시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난쏘공』의 단문은 아무래도 1970년대적 상황의 산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직설이 아닌 은유와 상징을 강요했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긴 문장을 생각해 쓸 수 없었던 개인적 사정이 겹쳐서 나온 것이었다. 단문을 쓰고자 하는 내적인 요구도 있었다.”7)
 
‘내적인 요구’는 조세희가 영향을 받은 소설들에서 기인한 것이다.

“습작 시절 내게 영향을 준 작가는 사르트르를 비롯한 참여파들이었지만, 스타일이랄까 형식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스타일, 독일의 볼프강 보르헤르트나 하인리히 뵐과 같은 전후문학의 짧은 문장들, 영화로 치면 흑백영화 같은, 전쟁의 상처를 빼어나게 그린 것들, 또 포크너의 의식의 흐름과 카프카 소설의 독특한 분위기 역시 영향을 주었다.”8)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난쏘공』의 공간적 배경은 빈민과 공장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산동네 철거촌이다. 실제 그는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동대문구 면목동, 구로구 가리봉동, 인천 동구 만석동 일대를 취재해 글을 썼다. 면목동에서는 셋방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경험과 취재는 소설 『난쏘공』에 오롯이 녹아 있다. 빈민과 공장 노동자의 삶이 녹아 있는 『난쏘공』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황석영의 『객지』와 함께 197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소설로 평가된다.

이 두 소설은 당시로선 금기시되던 경제성장의 어두운 면, 즉 극빈층의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줬다. 떠돌이 노무자의 삶을 보여준 『객지』와 철거된 산동네에서 생활하던 난쟁이를 등장시킨 『난쏘공』은 경제성장의 그늘 아래서 신음하던 이들을 대변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객지』를 썼다는 황석영과, 철거촌의 마지막 식사를 침범한 포크레인을 본 뒤 『난쏘공』을 쓰게 된 조세희는 닮지 않은 듯 닮아 있었고, 또 닮은 듯 닮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소설집 『난쏘공』은 나오자마자 논란거리가 됐다. 당시 민족문학 진영은 리얼리즘을 고수하고 있었다. 황석영의 『객지』처럼 어떤 꾸밈도 없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해야 인정받았던 당시 풍토에서 조세희의 『난쏘공』은 『창작과비평』(창비)으로 대변되는 리얼리즘 계통의 문학인들에게는 현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동화적인 권선징악, 악과 선이 분명히 나뉘어져 있는 선악구도 등이 『난쏘공』이 비판받은 이유였다. 당시 창비를 이끌고 있던 백낙청 교수는 『객지』에 대해서는 호평을 내놓으면서 『난쏘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그러나 리얼리즘에서 흔히 강조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이라든가 그 현실을 묘사함에 있어 되도록 순탄한 묘사 방법을 요구한다든가 하는 것이, 단순한 방법상의 고집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사는 세상에서 함께 겪는 일을 함께 이야기하고 전달하려는 어떤 뜨거운 열정에서 불가피하게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조세희 씨의 실험적 수법에 대해서 어떤 불만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은가, 현장을 세밀히 알고 거기에 대해 작가 나름으로 분노하고 공감하고 열심히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 바닥 자체의 뜨거움 속에서 울려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라는 느낌을 준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노동자 문제를 다루면서도 노동자들은 읽기 어려운 일종의 지식인 소설에 그치고 있지 않느냐는 건데, 다수 노동자들의 독서 능력이 높으냐 낮으냐를 떠나서 집단적으로 노동하고 단결하여 투쟁하는 인간들의 체질에는 근본적으로 안 맞는 걸 느끼게 해요.”9)
 
사실적이지 않고, 현장과 떨어져 있다는 것이 리얼리즘 계열에서 『난쏘공』을 비판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문학과지성』(문지)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계통의 문학인들로부터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오히려 동화적인 어법을 통해 현실세계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냈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세희의 『난쏘공』은 이같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대립, 창비와 문지의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조세희는 이 논쟁에서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불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난쏘공』을 왜 모더니즘으로 몰아가는가? 내 소설을 모더니즘의 틀 안에 가두려는 논의를 접하면 숨이 막힌다. 『난쏘공』을 쓸 당시 나만큼 노동 현장에 익숙하고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노동자들과 똑같이 생활하면서 그들과 똑같이 흥분하고 분노하고 울었다. 그 흥분과 분노의 백 분의 일도 소설 속에 담지 못했다. 당시 나는 스스로에게 ‘나는 기록자다’라고 최면을 걸었다. 독자나 비평가들이 당혹해 한 것은 내 기록이 낯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형식이 낯설다고 해서 그 안에 현실이 담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10)
 
그에게 『난쏘공』은 피맺힌 절규였다. 그는 낯선 형식 안에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1970년대 상황을 『난쏘공』에 담아냈다.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한번 피 마르게 아파서 소리 지르는 때가 있어요. 그 진실한 절규를 모은 게 역사라고 나는 봅니다. 『난쏘공』은 내가 너무 아파서 지른 간절하고 피맺힌 절규였어요. 그래서 아마 20년이 흘러도 그 난쟁이들의 소리에 젊은이들이 귀를 기울이는 걸 겁니다. 시대 문제의 핵심, 인간의 마음에 가까이 갔었기 때문에.”11)
 
침묵의 시간

 
조세희는 『난쏘공』 이후 침묵하다 1983년 『시간여행』을 내놓는다. 그리고 1985년에는 사진산문집인 『침묵의 뿌리』를 내놓았다. 1979년 사북사태12)의 연장선상에서 1984년과 1985년에 사북을 세 차례 방문해 100여 장의 사진을 찍어 내놓은 산문집인 『침묵의 뿌리』는 “긴급하다는 한 가지 생각” 때문에 출간된 것이었다.13)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 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조세희는 『침묵의 뿌리』를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한 기록으로 남겼다.14)
 
조세희는 앞의 두 창작물 이외에는 1980년대에 침묵했다. 박정희 군부독재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듯한 1980년, 전두환에 의해 피로 물든 1980년 광주의 영향이 깊었기 때문에, 그리고 다시 한번 무산된 희망 때문이었다. 이것은 조세희를 절망 속으로 밀어넣었고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고민에 빠져 그는 1980년대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15) 그러나 조세희는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1991년 자신의 첫 장편소설 「하얀 저고리」를 연재했다. 조세희는, 1980년 광주의 아픈 상처를 그린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키득키득거리면서 1980년대를 보냈다. 잘못되면 침묵보다 못한 말로 너스레를 떨기 싫었다. 침묵은 내 방식대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행위였다. 그러나, 나는 잠자지 않았고 침묵 속에서 치열했다고 자부한다. 이 작품은 침묵 속에서 내가 준비했던 말들의 일부다.”16)

그러나 이 작품은 아직까지 출간되지 않았다. 작가가 아직까지도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대비평』의 창간
 
1997년 가을, 조세희는 문부식과 소설가 윤정모와 함께 계간지 『당대비평』을 창간했다. 평상시 느꼈던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1995년 프랑스 노동자 총파업과 1996년 한국의 노동자 대투쟁을 겪고 느낀 격차 때문이었다.
 
“아는 이들이 저더러 그래요. ‘조형, 왜 그렇게 힘들게 삽니까. 세상이 바뀌었는데 얼굴 좀 피고 즐기면서 사세요.’ 그 사람들 머리에선 1970, 1980년대가 벌써 화석이 돼 있어요. 그게 지금도 이어지는 형편인데. 벌써 역사를 만들어버리면 어쩝니까. 군부독재가 이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이미 IMF 체제는 시작된 거였어요. 박정희가 한 일이 뭡니까. 외국 자본에 땅 주고 비쩍 마른 노동자 대준 것뿐이잖아요. 그 노동자들마저 지금은 거리로 쫓겨났고요. 우린 여전히 제3세계 언저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겁니다. 옛 것은 여전한데 새 것은 자라지 않았어요.”17)
 
“진실한 목소리에 목말라 하는 젊은 친구들을 위해 이 난쟁이가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 화가 나서 분노가 치밀 때마다 새로운 매체가 있어야겠구나 생각은 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없으면 만들자, 하고 의기투합한 이들이 있어 『당대비평』이 태어난 거예요. 또 1970, 1980년대 내가 내 일을 제대로 못했기에 그때 희생자들에게 진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나왔어요. 근데 그 사이 싸움꾼, 일꾼 숫자가 굉장히 줄어들어 섭섭해요.”18)
 
“동족 학살 집권자 밑에서 일하는 그들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면, 서울대 교수 출신이건, 어느 신문사 기자 출신이건, 또는 긴 세월 동안 독재에 찬성한 일 이외에 한 일이 없는 전문 정치인이건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짚어가며 ‘저것들은 전두환네 종들이고 저것들은 노태우네 종들’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일은 독재에 항거한 지식인들이 운동을 팔아 입신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짓말처럼 권력과 부를 나누어 갖는 대열에 합류했다. 악은 얼굴만 바꾸었을 뿐인데…….”19)
 
변하지 않았지만 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1970∼1980년대를 역사로 인식하는 사람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 아직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같은 조세희의 생각은 『당대비평』 창간호에 실린 「무산된 꿈, 희망의 복원」이라는 글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보면 『당대비평』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조세희가 『당대비평』을 창간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조세희는 한국 자본주의에 메스를 들이댄다. 그는 한국을 “물론 경제강국도 아니고 선진국도 아니며, 넙죽넙죽 빌어다 쓴 외채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많아 해마다 피땀이 밴 수십억 달러, 가슴이 미어지는 백억 달러 안팎을 원통하게도 국내의 눈물과 한숨 어린 긴급한 문제들에 못 쓰고 자본과 기술의 ‘본국’들인 선진세계에 고스란히 이자로 바쳐야 되는, 분수 모르고 설치기만 하는 만년 허풍선이 개발도상국”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나라 한국은 “경제 위기의 원인을 노동자 고임금에서 먼저 찾으며 노동법을 개악하고 재개악하려는” 나라, “소수의 낙원”이 된 나라라고 규정하고 “우리처럼 숨막히고 슬픈 모순의 나라는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로 말한다. 그가 바라보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북한과 남한 모두 실패한, 그래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 나라다. 그는 이 절망을 희망으로 돌리려 『당대비평』을 창간했다.20)
 
“20세기를 우리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보냈다. 백 년 동안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이 헤어졌고, 너무 많이 울었고 너무 많이 죽었다. 선은 악에 졌다. 독재와 전제를 포함한 지난 백 년은 악인들의 세기였다. 이렇게 무지하고 잔인하고 욕심 많고 이타적이지 못한 자들이 마음  놓고 무리져 번영을 누렸던 적은 역사에 없었다. 다음 백 년의 시작, 21세기의 좋은 출발을 위해서라도 지난 긴 세월의 적들과 우리는 그만 헤어져야 한다.”21)
 
『당대비평』은 이후 한동안 한국 자본주의의 허점을 짚어내고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에도 예리한 칼날을 들이댔다. 그리고 그동안 끊임없이 노동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언급했고, 1999년 가을호부터는 한양대 임지현 교수의 일상적 파시즘론을 실으면서 논쟁을 촉발시키기도 해다. 그러나 2000년 가을호에 『조선일보』와 ‘안티조선운동’에 대해 입장을 표명한 홍윤기 교수의 글이 실리지 못하면서 내부적인 잡음이 일어났고, 2003년 2월 주간이던 문부식이 『조선일보』에 「폭력의 세기를 넘어-문부식의 시간여행」을 연재하면서 편집위원 4명이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당대비평』은 2005년 재정상의 이유로 휴간하게 된다.
 
조세희가 『당대비평』과 언제 결별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998년 여름호 『당대비평』 통권 4호까지 그는 『당대비평』 편집인으로 머리말을 썼으며, 1998년 겨울호(통권 5호)에는 ‘조세희’란 이름만으로 머리말을 썼다. 그리고 1999년 봄호(통권 6호) 이후로는 더 이상 『당대비평』에서 조세희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언론의 인터뷰 기사 등에서도 2000년 초반 이후로는 조세희와 『당대비평』을 같이 엮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쯤 『당대비평』에서의 활동을 그만두지 않았나 추측한다.
 
온전한 항아리 같은 세상
 
사정이야 어찌됐든 조세희는 자신의 작품으로 그리고 『당대비평』을 통해 과거나 지금이나 잘못되고 온갖 모순 속에 빠져 있는 세상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다. 그중에는 한국 문학에 대한 비판도 들어있다. 작가로서의 조세희는 1990년대 한국 문학에 대해서도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는 한국의 문학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자꾸 과거만 돌아보고 있는 것이 1990년대 문단의 현실입니다. 현실을 버리고 과거로 가는 것은 정신적 망명이자 도피입니다. 문학이 지금만큼이나 시대의 요구에 무능하고 현실과 맞대면할 힘을 잃었던 시기가 있었습니까?”22)
 
“얼마 전 어떤 계기가 있어서 최근에 나온 소설 10여 편을 읽어보고는 매우 슬퍼졌다. 나이 든 이들이나 젊은 작가들이나 마찬가지로 커다란 상처를 입었는데, 그 상처의 이름은 상업주의였다. 작가들은 거기에 깊이 빠져 병증이 심해졌다. 젊은이들은 자기들 삶의 일부를 소설로 쓰다 보니 섹스와 연애에 치중한다 치자. 그런데, 나이 든 이들까지 부화뇌동해서 섹스소설, 대중소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려서 문학을 처음 접하고서 그에 대한 꿈을 키울 때 생각했던 문학의 모습에서는 많이 멀어져 있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 것이 문학인가?”23)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조세희 선생님처럼 한 작품에 문학적 염결성과 진정성을 몽땅 쏟아 부은 작가도 흔치 않다”며 “『난쏘공』 30년의 발자취는 한 시대의 정치·사회적 핵심과 대결한 작가 정신의 산 증거”라고 평했다.24) 이런 평가를 받는 조세희에게 문학이란 어떤 의미일까? 『난쏘공』이 피맺힌 절규였다는 점에서,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침묵의 뿌리』가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조세희가 갖고 있는 문학관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 그에게, 현실을 버리고 과거로 가는 문학이나 현실과 맞대면할 힘을 잃어버린 문학은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을 터이다.
 
자본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노동자, 빈민, 그리고 이 세상의 난쟁이들에게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그는, “온전한 항아리” 같은 세상을 원한다. 그의 말로 이 글, 마무리 짓자.
 
“전래동화 한 편을 기억할 것이다. 팥쥐 엄마가 콩쥐에게 물 항아리 하나를 주면서 돌아올 때까지 채워놓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한다. 콩쥐는 열심히 물을 길어 부었지만 항아리를 채울 수 없었다. 밑이 빠졌던 것이다. 우리 땅에도 도덕과 질서를 채우는 항아리가 하나 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항아리는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다. 군부·정치인·재벌·관료들이 저마다 빨대를 들이대고 무엇이 채워지는 족족 빨아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든 담으면 차곡차곡 쌓이는 온전한 항아리를 보고 싶다.”25) 
 
[각주]
1) 최재봉, 「“난쟁이 가족 불행,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 2007년 9월 3일, 25면.
2) 최재봉, 「“난쟁이 가족 불행,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 2007년 9월 3일, 25면.
3) 최재봉,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초등우리교육』, 1997년 12월호, 156쪽.
4) 김언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책의 탄생 Ⅱ』, 한길사, 1997, 73쪽.
5) 김경환,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 난쟁이에게」, 월간 『말』, 1998년 1월호, 24~25쪽.
6) 최재봉,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초등우리교육』, 1997년 12월호, 156쪽.
7) 최재봉,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초등우리교육』, 1997년 12월호, 156쪽.
8) 최재봉,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초등우리교육』, 1997년 12월호, 155~156쪽.
9) 이호규, 「1970년대 저항의 두 지점-황석영의 ?객지?와 조세희의 ?뫼비우스의 띠? 비교연구」, 『현대문학의 연구』, 한국문학연구학회, 2006, 341쪽에서 재인용.
10) 최재봉,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초등우리교육』, 1997년 12월호, 155쪽.
11) 「“너무 아파, 나는 피를 토한다”」, 『한겨레21』, 1998년 7월 2일, 75면.
12) 10?26사태 이후 1980년대 노동자 투쟁의 발화점이 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산노동자들의 파업투쟁. 한국사사전편찬회 편, 『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1990, 515쪽.
13) 최재봉, 「소설가 조세희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 배고푼 눈물이 있다 그곳에는…」, 『한겨레』, 2000년 12월 6일, 12면.
14) 최재봉, 「소설가 조세희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 배고푼 눈물이 있다 그곳에는…」, 『한겨레』, 2000년 12월 6일, 12면.
15) 김경환,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 난쟁이들에게」, 월간 『말』, 1998년 1월호, 26쪽.
16) 장인철, 「5월 광주 ‘한의 역사’ 속에 치환」, 『한국일보』, 1991년 5월 30일, 15면.
17) 「“너무 아파, 나는 피를 토한다”」, 『한겨레21』, 1998년 7월 2일, 75면.
18) 「“너무 아파, 나는 피를 토한다”」, 『한겨레21』, 1998년 7월 2일, 75면.
19) 김경환,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 난쟁이에게」, 월간 『말』, 1998년 1월호, 27쪽.
20) 조세희, 「무산된 꿈, 희망의 복원」, 『당대비평』, 1997년 창간호, 13~14쪽.
21) 조세희, 「무산된 꿈, 희망의 복원」, 『당대비평』, 1997년 창간호, 13~14쪽.
22) 이영미, 「“문학이 지금만큼 무능한 적 있었나”」, 『국민일보』, 1999년 3월 10일, 34면.
23) 최재봉,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초등우리교육』, 1997년 12월호, 157쪽.
24) 최재봉, 「“난쟁이 가족 불행,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 2007년 9월 3일, 25면.
25) 김경환,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 난쟁이에게」, 월간 『말』, 1998년 1월호, 29쪽.  
 
* 본문 월간 <인물과사상> 2007년 10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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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9/24 [21:4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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