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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 캠페인에 깃든 자발적 예속의 프로그램
[분석과 비평] 금연운동, 남한 사회 부르주아 소통권력의 기대에 찬 실험
 
벼리   기사입력  2007/07/06 [18:47]
욕망-소통의 장악과 금연 캠페인

오해를 피하자. 이 글은 해석을 위한 것일 뿐 특정 가치 판단에 대한 옹호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글이 중립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글의 수용자에게서든 필자에게서든 궁극적으로 그런 관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매우 첨예한 찬반이 예상되는 사안인 경우 더 그러하다. 이럴 때 가장 손쉬운 변명은 아마 ‘판단을 각자에 맡긴다’는 것이 될 것이다. 차라리 이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 더 낫다.
 
거두절미(去頭截尾). 캠페인은 공공정책의 일환이며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서 그 실효성이 매우 탁월하게 입증되고 있는 정책 아젠다 중 하나다. 알다시피, 노무현 정부는 탄생에서부터 지금까지(노사모로부터 국정홍보처까지) 미디어의 효과를 십분 활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파급력을 그 어느 정권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조중동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박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정권의 사활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쉽게 추론해 볼 수 있는 바다.
 
문제는 캠페인이 가지고 있는 전달력, 또는 파급력, 인지의 강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비등한 상황이 현재 남한 사회의 처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처지의 하드웨어적 측면은 주로 권력의 주도로 이루어 지고 있다. 정권의 인터넷 보급과 통신산업에 대한 편집증적인 관심은 자본의 편에서 이윤의 획득을 용이하게 해준다는 의도도 있지만, 통치론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또한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욕망과 소통의 장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의 지향은 그 전사(前史)가 꽤 오래된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광고 마케팅과 사무자동화, 유비쿼터스 감시체제는 그 일부의 예에 불과하다. 특히 인터넷을 통한 통제는 신민의 행위 차원이 아니라 욕망과 일상의 차원을 중앙권력으로 집중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권력이 노리는 전일적 통제에 극대의 효율성을 제공한다.
 
통제의 현실화는 제도화의 시점이다. 그 이전에 욕망과 소통은 권력의 편이 아니라 다중(multitude)의 것이다. 제도화는 따라서 다중권력의 제도적 탈취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것 또한 자본주의 역사에서 낯설지 않다. 제도화는 자율적 다중의 욕망을 영토화한다. 인터넷은 이제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사면이 폴리스 라인으로 막힌 감시의 바다가 된다. 이런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리고 변화는 매우 은밀하고 음모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도메인 관리에 대한 중앙집중화는 정보통신윤리법 내에서 다중으로부터의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이를테면 미디어를 통해 유출되는 것을 애써 막으면서, 하나하나 추진되고 있다. 다중의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흐르고, 어떤 사안에 대해 민감한지에 대한 데이터는 전문가들의 손에서 분석된다. 이런 일은 어쩌면 매우 간단하다. 인터넷 포탈 사이트에 등장하는 카페의 테마와 네티즌들의 선호도, 그 카페의 가입자수의 추이 등을 분석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시간이 없을 뿐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권력은 이러한 수단과 시간을 아주 많이,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동기도 분명하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권력이 소통과 욕망을 장악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실행이 문제다. 즉 어느 정도 제도화가 진행되고 그 저항을 최소화하는 능력이 생겼을 때 권력은 본격적으로 통제의 실행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다중의 욕망이 분석되었으며, 그 동선이 근사치에서나마 측정가능하다면 이제 다중에 ‘앞서’ 전략을 세우고 그들을 ‘동원’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그러나 ‘동원’이라는 개념이 권력의 최근의 움직임에 적당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동원’이라는 말에는 ‘의식적이고도 지속적인 개입’이라는 함축이 강하다. 그러나 최근의 권력은 애써 이렇게 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지속적인 개입은 욕망과 소통을 장악하기 전의 경우에나 필요하다. 다중의 욕망과 소통의 알고리즘이 권력에 의해 포착되고 그것이 예측가능한 수준에 있다면, 지속적인 개입은 자원의 낭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동원’이기 보다 ‘자극’과 ‘관리’라고 하는 편이 더 낫다.
 
실제로 권력은 다중의 욕망과 소통을 ‘자극’하고 ‘관리’한다. 이러한 시스템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시점이 바로 선거와 조사통계다. 이때 다중은 스스로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가능한 퍼센티지 안의 미세한 한 부분이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바라본다. 즉 그렇게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망각이 바로 또 자극의 원천이다. 대상화된 자신에 대한 망각은 권력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신민들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자극을 가능하게 한다. 비록 다중이 그러한 자극을 통해 움직이는 스스로를 어렴풋이 자각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수동적인 움직임이라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움직임, 동선, 욕망의 원천은 언제나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Lacan)
 
남한 사회 캠페인은 욕망과 소통에 대한 위와 같은 최근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자극-관리-더 큰 자극-더 광범위한 관리 ….’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자발적 예속’(Spinoza)이다. 이 테제의 철학적 함축을 살피는 것은 지금 할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 테제의 외연이 ‘자발적 참여’라는 노무현 정부의 이데올로기와 매우 잘 부합한다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여기서 참여는 권력의 바운더리 내부에서의, 또는 내부로의 참여며 그 이외의 참여는 ‘일탈’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이 참여는 ‘예속’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발적’이라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한다는 건데, 권력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신민들이 ‘알아서 기’는 축복할 만한 상황을 일컫는다.
 
놀랍게도 이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현실화되고 있다. 나는 이 현실화의 극명한 모습을 금연 캠페인에서 본다. 애초에 이 캠페인은 ‘국민건강진흥’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여기에 상당한 정책적 고려가 투입되고 있다. 즉 애초의 ‘자극’에서 ‘더 큰 관리’로 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욕망의 경로가 파악된 쪽으로 선회하면서 발생하는 정책적 고려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러한 ‘더 큰 관리’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새로운 연구와 자극이 요청될 뿐이다.

▲국가적인 캠페인, 특히 금연 캠페인에 깃든 자발적 예속의 프로그램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인터넷 이미지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노무현 정권의 금연 캠페인 프로그램이 가지는 의미가 실제 정책적인 고려의 중요한 부분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담배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연간 6조원에 달하는데, 어째서 그토록 극렬한 캠페인을 국가가 주도하는가가 의문의 요점이다. 그런데 사실상 금연 캠페인의 실효성은 그러한 정책적인 고려가 아니라 정치적인 고려에서 더 크게 획득된다. 정치적인 고려라는 것은 통치의 효율성이며, 그것은 현재 정책적 모순이 있다 하더라도 ‘현실정치 일정’ 속에서 그것이 해소된다는 예측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측이 없다면 정책도 없다.
 
금연 캠페인의 현실정치는 바로 욕망과 소통에 대한 주도권이 권력 측에 있다는 파악과 다중의 욕망의 경로가 예측 가능하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전자의 ‘파악’은 어떠한 명시적인 또는 폭발적인 저항도 현재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즉 아직 신민들이 그 방면에서 닥쳐올 효과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에 정당성을 두고 있으며, 후자의 ‘자신감’은 정보 소통의 경로를 장악하고 예측하는 인력과 자본이 권력에 안정적으로 제공되고 있다는 현실에서 발생한다. 금연 캠페인의 발전 양상은 이러한 권력의 파악과 자신감이 누승적으로 커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바로메터라 할 수 있다.
 
국민건강진흥 프로그램 상에서 추진되던 금연 캠페인은 흡연자 자신의 건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며, 이것이 ‘캠페인’이라는 대의에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중요한 변화는 흡연의 위험에 ‘타인’도 노출되어 있다는 이념을 개입시키면서 발생한다. 이것은 굉장한 자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렇더라도 담배는 여전히 팔리며, 세금은 여전히 걷힌다’는 자신감 말이다. 사실상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여성흡연과 아동, 청소년 흡연 인구는 증가추세에 있다. 그래서 흡연자를 ‘살인자’의 위상에 맞추는 것은 애초의 국민건강프로그램 상의 캠페인 수위를 넘으며, 또 이미 그것이 허용된 것이다. 저항은 극히 미미하며, 이제는 ‘타자 살해’가 아니라 ‘존속살해’의 위상이 흡연자에게 걸맞게 된다. 그동안 파묻혀 있었던 간접흡연피해에 대한 사례와 일련의 연구물들이 제시된다.
 
이쯤해서 여론조사가 실시된다. 결과는 예상과 맞아 떨어진다. 이 와중에 비흡연자들은 그동안의 불편함을 넘어, 계속되는 (있지도 않은)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 공공연하게 흡연자들을 적대적으로 대한다. 흡연자들은 애써 예의를 갖추던 것을 그만둔다. 거리에 휴지통과 재떨이가 없어진다. 공공건물에 이어 모든 건물들에서 금연이 정착되며, 버스 정류장을 비롯하여 사람들 몇몇이 모이는 곳에서는 그 사람들이 흡연자든 아니든 금연이 제도화된다. 흡연자들은 더 극렬해 진다. 고립되었고, 감시당하고 있다고 느끼며, 담배를 필때면 누군가가 자신을 적대시한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더 뻔뻔스러워지려고 노력하며, 위악적이 되어 간다. 
 
▲미디어를 장악한 국가권력의 캠페인에는 욕망-소통의 장악과 이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배여 있다.     © 국방부 금연광고 포스터

금연 캠페인의 로드맵이 본궤도에 올라 자동적인 피드백을 달성하는 시점이 여기서부터다. 흡연에 대한 적개심이 일상화된 시점. 흡연자와 비흡연자 간의 갈등이 잠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뚜렷한 강도로 표현되는 이 시점에 권력은 캠페인의 일정을 정책적 고려에서 제외시킨다. 그것은 의식적인 정책의 선을 넘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책은 자동화되었고, 신민에게 내면화(internalization)되었으며, 거대한 판옵티콘이 흡연자(죄수)-비흡연자(간수)라는 구도 속에 펼쳐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감옥의 설계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망각은 ‘내면화’의 필수적인 기제다. 망각되지 않았다면 아직 내면화가 완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발 앞서 흡연에 대한 욕망과 관심을 진단하고, 한 발 앞서 ‘자극’을 추진하며, 한 발 앞서 힘을 발휘한 그 ‘누구’는 이제 권력일수도 있고, 흡연자들일수도 있고, 비흡연자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초의 충격은 바로 ‘일상’에 속한다. 그 일상을 권력으로 가공한 것은 관료들이며, 통치계층이다. 그러므로 이 감옥에서 죄수와 간수는 둘 모두 죄가 없다. 권력은? 권력은 이 감옥의 설계에 있어서 유죄가 아니라, 그 효과를 무상으로 향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유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금연 캠페인의 현실정치 일정 속에서 권력이 거두어들이는 효과는 무엇인가? 동서를 막론하고 통치계급은 피통치계급을 직접적으로 대면하기를 꺼렸다. 통치자와 신민들 사이에는 귀족이, 제후가, 또는 관료가 매개된다. 현대 정치 속에서 통치계급은 관료 질서의 최상층부에 속한다. 즉 (입법권이 아니라) 정책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의 결정은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사적인 라인을 통해 매개체를 통과하며, 제도적 적용은 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이것은 통치와 피통치를 가르는 분할이다. 이 분할선은 만리장성 축조에 동원된 부역 농민과 진시황의 거리만큼 아득하지만, 그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분할이 있다. 이것은 제도적으로 분할된다기 보다 정치적으로 활용되기 위해 분할된다. 신민들 사이의 분할이 그것이다.
 
신민들은 농, 공, 상으로 분할되며, 천민들 중에서도 불가촉 천민으로 분할되고, 성내 백성과 성외 천민으로 분할되며, 정규직으로부터 비정규직이 분할되고, 외국인 노동자와 자국 노동자가 분할되고, 정상인과 광인, 장애인이 분할되며, 기독교와 이슬람이 분할되고, 정의로운 자와 부정한 자가 분할되고, 이 모든 것을 아울러 선과 악이 분할된다. 통치와 피통치를 가르는 분할이 제도를 통해 권력의 아우라를 강화하고 그 상징성을 최고로 높이는 효과를 달성한다면, 이 신민들 사이의 분할은 정치적 기량(statecraft)을 통해 권력에 대한 신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저항을 최소화하며, 내부갈등을 부추기면서 현실권력이 신민들의 정치토론상의 의제로부터 배제되도록 한다.
 
금연 캠페인은 일차적으로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기존의 뚜렷하지 않은 분할선을 매우 뚜렷하게 강화시킨다. 개별적인 사례들의 일반화를 미디어를 통해 유포하는 정치적 기량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 기존 권력의 몫이지만, 이 최초의 ‘자극’은 이후 일파만파가 되어 인터넷상을 떠돈다. 혁명적 상황 속에서의 그 불가사의한 냉철함과는 달리 일상 속에서 다중은 그리 이성적이지 않다. 그들은 소문에 민감하며, 부화뇌동하고, ‘호기심’과 ‘잡담’에 익숙하다(Paolo Virno). 흡연과 금연의 경계는 마치 넘을 수 없는 심연처럼 ‘확정’(assertion)된다.
 
권력이 단지 한 번 던져 놓은 개별화된 사례들이 다중들 각자의 처지인 양 받아들여지며, 이것은 논증이나 추론의 방식이 아니라 지고한 ‘명령’처럼 인식된다. 즉 ‘흡연자들은 위험한 살인자들이다’라는 명제. 이 명제는 더 이상 증거나 논변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중들 간의 논쟁은 가열되고 욕설이 오가며, 서로를 적대시한다. 이와 다른 정치일정은 여기서 토론의 의제조차 되지 못한다. 권력이 그 효과를 일차적으로 향유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잔치상이 권력을 위해 차려진다. 신민 전체를 일방의 다른 일방에 대한 상호적 적개심을 통해 무력화시킨다는 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정치적 성취라 할 만하다. 금연 캠페인에 있어서 이러한 내부투쟁은 일방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 자신이 이미 금연을 추진하고 있으며 저항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자극이 ‘자동화’되고 투쟁의 원천이 은폐되었을 때 발생하는 또 하나의 환상(simulacre)은 투쟁의 일방이 스스로 승리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방이 사라지지 않는 한 승리한, 또는 승리가 확실시 되는 일방은 스스로 ‘힘’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즉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승리가 내면화된다. 그러나 그 내면화와 그를 통한 정당화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그 정당화의 논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며, (미디어의 것이며), 정당하다는 그 ‘느낌’ 외에, 그 승리의 진정한 열매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반대로, 패배한 쪽은 패배의 내면화 단계로 진입한다. 과거에 애연가로 자처하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하며, 금연 기호가 보이든 그렇지 않든 건물 안에서는 담배를 피지 않는다. 담배를 꺼내들기 전에 주위를 살피고, 이상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금연을 결심한다. 모든 국가적 제도화가 노리는 바는 이런 식이다. 국가가 생긴 이후 발생한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도덕적 합의가 제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통해 도덕적 합의를 강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적 합의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공론장에서의 토론이 그 하나고, 일상 속에서의 권력을 통한 위협과 두려움의 조장이 그것이다. 국가는 자신 있게 점점 더 후자의 효율성 쪽으로 기운다. 그러므로 국가는 내면화된 기율(생체권력, biopower)을 기반으로 다음 단계의 통제로 들어간다. 즉 제도화 단계. 금연에 있어서 이 단계로 진입한 국가가 많으므로 남한 사회에서는 그 수순이 더 손쉽다.
 
그런데 이것이 최종결과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최종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은 제도화를 통해 신민들을 질서 잡는 것이 아니다. 제도화가 정착되면,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진다. 즉 내면화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효과가 더 중요하다. 제도화는 정착되어서는 안 되며 무한히 연기(延期)되어야 한다. 금연은 캠페인으로 머물러야 하며, 완전히 법제화되더라도 흡연자들의 죄책감과 두려움, 비흡연자들의 적개심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효과가 아니다.
 
신민의 30%에 달하는 흡연자들은 일상적 두려움 속에 방치하는 것이 좋다. 나머지 70%는 일상적 적개심 속에 방치하는 것이 더 좋다. 이 두려움과 적개심 속에서는 권력 자체에 대한 비판이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비판이 있더라도 그것은 소극적인 논변이 되며, 이 가운데 어떤 적극적인 저항의 행위는 점점 더 불가능하게 된다. 이 비판의 제로지대를 될 수 있는 한 무한히 연기하는 것, 이것이 두 번째 잔치상이다.
 
욕망과 소통은 본래 다중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상품으로 가공하고, 권력으로 치장하는 것은 다중의 몫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차라리 다중은 욕망과 소통의 장으로부터 상품화의 논리와 권력을 추방하고, 무시하며, 제도화된 모든 것들에 냉소를 날린다. 그러나 다중은 상처 입기 쉬우며, 중독되기 쉽고, 권력을 모방하는 것에서 더 손쉬운 길을 발견한다. 이 양가성 중 후자를 건드리는 것이 권력의 관심사며, 관건이다. 금연 캠페인은 이 방면의 술책에서 세계적으로 일취월장하고 있는 남한 사회 부르주아 소통권력의 기대에 찬 실험일 것이다. - 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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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7/06 [18:4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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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고릴라 2007/07/19 [19:46] 수정 | 삭제
  • 11번째 단락에서 말씀하신 자신감의 이유를 좀 더 상세히 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