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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떼~한민국'으로 떼쓰기
사회집단의 목소리를 ‘떼쓰기’와 ‘깽판’으로 매도하지 말라
 
권태윤   기사입력  2003/06/21 [11:01]

▲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들은 월드컵 때 메아리쳤던 ‘대~한 민국’이라는 함성조차‘떼~한 민국’으로 부르며 비아냥거린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들은 우리사회 각층의 다양한 욕구분출과 집단행동(group behavior)에 대해 ‘떼를 써서 목적을 이루려는 무모한 행위’로 비난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이들과 이른바 ‘코드’가 맞는 사람들은 월드컵 때 메아리쳤던 ‘대~한 민국’이라는 함성조차 ‘떼~한 민국’으로 부르며 비아냥거린다.

조선일보 문갑식기자는 6월18일자 “‘깽판’쳐야 들어주는 정부”라는 제목의 글에서 “현 정부가 집권 이후 ‘목소리 크고 집단행동에 나서면 무엇이든 수용해준다’는 이상한 전통을 만들어 준 게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그는 “정부 스스로 목소리 크고 집단행동에 나서면 대화와 타협을 앞세우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주장에는 법과 원칙을 내세우지 않았는지 반성해봐야 한다.”고 충고(?)를 한다. 여당인 민주당 이희규 의원 또한, “정부가 집단이기주의에 흔들리고 있다”며 “대한민국은 떼만 쓰면 통하는 떼~한 민국”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사회단체의 요구를 무작정 ‘떼쓰기’로 몰아가는 수구언론과 일부 정치인들의 비아냥거림을 보고 있자면 분노를 넘어 서글픔이 들 정도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미디어오늘> 정은경기자는 6월10일자 “‘사회단체는 떼쟁이’ 몰아가기”란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일부 언론은, 시민사회단체를 사익 추구 집단으로 규정하며 정부가 집단의 힘을 동원해 ‘떼를 쓰는’ 쪽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며 특히 “일부 언론은 시민단체가 개인적 이해관계를 좇아 국정을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면서 국정 혼란의 책임을 시민사회에 전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같은 이익집단이라도 보수언론의 가치관과 일치하는 유사 시민단체의 집단행동을 매도하지 않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며, “언론이 갈등을 조정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꼬집은 바 있다. 옳은 지적이다.

수구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의 이런 비난을 전혀 정당하지 않다.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이들이 ‘집회와 결사의 자유(헌법 제21조 1항)’가 보장된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이런 식의 단세포적인 분석, 일방적 비난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위(demonstration)는 ‘집단의사의 형성과 표현 및 그것의 전달과 실현’을 위해 너무도 정당한 사회 각 집단의 권리다.

게다가 사회의 다양한 욕구가 자유롭게 분출된다는 것은 우리사회가 그만큼 민주화 되어있다는 긍정적인 증거다. 독재시대처럼, 일방적으로 찍어 누르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었던 시절에 향수를 갖는 ‘노예근성’에 물들지 않은 자주적인 사람이나 집단이라면 사회집단의 다양한 욕구표현에 대해 오히려 그 건강성을 칭찬해야 마땅하다.

▲누가 우리사회에 진정한 떼쟁이인가?     ©대자보
오랜 과거부터 피지배층은 늘 억눌림을 강요당해 왔다. 민초들이 권력층의 핍박에 한없이 시달리며 일방적 희생과 복종을 강요당한 왕조시대는 물론이고, 일제나 군사독재시절 무자비한 폭력으로 굴종을 강요당해 온 이 땅의 민초들은 언제나 ‘그들’로부터 ‘짓눌림을 받아야 할’ 존재로만 취급받아 왔다. 그런 굴종의 세월을 견뎌온 민초들에게 민주화된 세상이라는 오늘날에도 “나라를 위해 양보하고 순종하라”고만 주장한다면 복장이 터질 일이 아니겠는가. “부당하더라도 입 다물고 복종하라”는 주장이 진심이 아니라면 더 이상 당연한 사회적 욕구분출에 대해 ‘깽판’이라느니 ‘떼쓰기’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헛소리는 그만둬야 할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일본 식민지 지배 하에서 일어난 자주적 비폭력 항일운동인 3 ·1운동도 “자유를 달라”는 피지배 민족의 ‘떼쓰기’요 ‘깽판’이라는 말과 같고, 1960년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룬 학생들의 반부정(反不正) ·반정부(反政府) 항쟁인 4.19의거나, 계엄령 철폐와 전 두환 퇴진을 요구하여 벌인 광주민주화운동 역시 “자유와 민주를 달라”는 시민들의 ‘깽판’이었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 수구보수언론과 권력층은 이 땅의 민초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까라면 까지 뭔 말이 많으냐!”고 윽박지르는 강압적 논리에 굴종하길 원한단 말인가.

오늘날 이 땅의 서민과 노동자들이 집단행동을 하고 거리로 나오도록 한 원인은 지배 권력의 일방적 복종강요와, 이들 지배 권력의 선전도구 역할을 해온 보수언론을 비롯한 수구언론들의 ‘찍어 누르기’ 논리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옳다.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가장이라는 이유로 아이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찍어 누르기만 한다면 제대로 된 가정이 될 수가 없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욕구를 억누르라고만 하고, 욕구를 표시하기만 하면 ‘깽판’이라고 비난한다면 개인이나 집단의 가슴에 분노와 화만 축적이 되고, 결국에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되는 어려움을 자초하기 마련이다.

사전에서는 ‘분노’를 “자기 요구의 실현을 부정 및 저지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결과 생기는 정서”라고 정의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사회 각 집단의 다양한 분노는 부정 불합리에 대한 공적 의분(indignation rage)의 성격이 짙다. 그동안 상대적 약자였던 집단들은 늘 표리부동한 권력과 특권층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태에 신물이 났다.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서는 제정신을 온전히 지키며 살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특권층들은 자신들이 먼저 반성하고 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언제나 국민 개인과 사회집단에만 비난의 초점을 맞추는 뻔뻔스러움을 견지해왔다. 이러니 불신은 극에 달하고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정부와 특권층 그리고 수구보수언론들이 진정으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간의 화해와 통합을 통한 조화로운 공생(共生)의 나라를 만들고 싶은 의지가 있다면, 상대적 약자들과 민초들의 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과 집단의 분노가 행동으로 폭발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조용한 분노가 감지되는 초기단계에 적극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노력을 할 것이다.

솔직히 우리 사회의 특권층들은 사회적 약자들의 소리에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 오죽하면 군사독재 때 숱한 젊은 생명들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가면서 까지 “이내 말 좀 들어 보소”라며 항의했을까. 이국의 틱낫한(Thich Nhat Hanh) 스님의 『화(anger)』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여전히 분노가 가득한 우리사회를 치유하는 길은, 진심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진정한 대화’ 밖에 없다. 원칙과 엄정대응을 ‘분노의 제공자’에게 먼저 적용하는 것이 ‘분노의 피해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우리사회의 진짜 ‘떼쟁이’ 집단인 수구보수언론과, 타락한 특권층을 먼저 개혁하라는 말이다.

* 필자는 '좋은 글을 통해 우리를 생각하는 PEN21사이트( http://www.pen21.com/ ) 운영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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