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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권 100일, 교육개혁의 과제는?
국가주의 교육과 내면화된 질서 이데올로기
 
홍세화   기사입력  2003/06/16 [10:20]

노 정권의 '시계추 운동'

  

▲ 노무현이 우리사회에 네오가 될 것인가?
사진출처: http://cafe.daum.net/caricatures     

미국에 종속적인 군사·외교 부문은 말할 것도 없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로 인해, 노무현 정권의 '개혁'은 애당초 한계를 안고 있다. 하지만 그 한계는 객관적 정세나 조건에 대해 항상 긴장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그것들에 무조건 순응하라는 게 아니다. 특히 '참여정부'라고 말하려면, 국민의 적극적 참여를 끌어들여 주체적 역량을 고양시킴으로써 사회개혁을 이루어내는 한편, 객관적 조건의 변화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노무현 정권 100일은 깊은 우려를 낳게 한다. 객관적 조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 부문, 그 중에서도 교육 부문의 개혁이 그 첫걸음을 떼기는커녕 퇴행적 파행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네이스 파동은 노무현 정권에게 교육개혁의 의지가 있기나 한 것인지 묻게 하고, 앞으로 교육개혁의 중심과제가 되어야할 '국가주의 교육 혁파'에 대해 말하기조차 만망하게 하고 있다.

  교육개혁 없이는 진정한 사회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현 단계가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때, 반세기 동안 교육과정을 통해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조작하고 통제해온 국가주의 교육을 혁파하지 않는 한, 개혁은 말의 성찬으로 끝날 것이다. 이 점에서 노 정권은 그 어떤 긴장감도 성찰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아니, 긴장감과 성찰은커녕 '개혁성'의 일관성조차 보여주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방미 후 태도가 바뀌었다는 일부 비판에 대해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변한 것은 없고 무식한 것"이라고 날카로운 일침을 가했다. 리 선생은 노 대통령에 대해 "애초 국가의 원수로서 국제관계의 기본적인 움직임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나 인식이 너무도 막연했다"고 평가하면서 사람들에게 노 대통령의 방미외교를 '굴욕외교'라고 몰아붙이지 말 것을 주문했다. "정견 없는 사람이 시계추 운동을 하는데, 몰아붙이지 말고 바른 자리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를 바른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그 '시계추 운동'에 무식함 말고도,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고 할만한 미숙함까지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을 것", "대통령 못해먹겠다"와 같은 실언은 그런 예를 보여준다. 노 정권에게서 교육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지 심각한 우려를 낳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광신자들은 광신이어서 열성을 부리듯, 반세기 동안 헤게모니를 쥐어온 사익추구집단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열성을 보인다. 네이스 파동을 통해 다시금 한통속임을 증명한 교총, 한나라당, 조중동을 보라.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으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 뻔뻔함들은 열성을 부리는데, '개혁'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교육계에 강력하게 둔치하고 있는 수구기득권 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개혁'은 치열성을 동반한 성숙함을 가져야 하건만, '개혁적' 인사라는 교육부총리는 교육철학의 빈곤으로 수구적 관료들에게 포섭되는 모습을 보였고 말 바꾸기를 일삼았다. 또 전교조 등 개혁 세력과 힘을 합쳐도 개혁을 이룰까 말까 할 판인데 전교조와 대립각을 세웠다. 교무 학사, 보건, 진·입학 부분을 제외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가 있었을 때 바로 단안을 내리지 못할 만큼 소신도 없고 줏대도 없었다.   

 
▲출처: 내가 꼭 알아야 할 정보화시대의 권리  http://rights.jinbo.net/   
노무현 정부가 끝내 네이스를 강행키로 한 것도 사회구성원들의 정보 인권에는 관심조차 없고 사회구성원들을 통제, 관리하기 위한 국가주의 교육의 관행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때, 이는 거꾸로 교육개혁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하겠다. 실상, 이 땅에 오랫동안 관철된 국가주의 교육은 정통성 없이 이 땅을 지배해온 사익추구집단의 강력한 지배 무기였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구성원들에게 '자발적으로 순응하도록' 함으로써 지배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노 정권이 진정한 개혁 정권이라면 사회구성원들에게 비판적 시민의식과 함께 민족적, 사회경제적 정체성에 상응하는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가령 힘의 논리로 무장하여 굴종을 강요하는 미국의 신제국주의에 대해서도 사회구성원들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노 정권은 문제의식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노 대통령이 국가주의 교육과 공교육의 차이점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 못한 점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토론공화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국민과 토론 한마당 나누지 않고 부시와의 전화 통화 하나로 이라크 침략전쟁에 동의하고 파병까지 결정했으며 마침내 부시에게서 '말하기 쉬운 사람' 즉 '말 잘 듣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김상헌과 최명길을 끌어들이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그에게서 국민들은 이심전심으로나마 '와신상담'의 낌새를 느낄 수 있었어야 마땅하다. 아니, 와신상담까진 아니더라도 일종의 긴장감은 느낄 수 있었어야 마땅하다. 특히 동네 부랑배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어들어간 한신의 예를 들 때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가 한신이 아니라는 점은 전교조의 반전평화수업에 대해 '반미는 안 된다'고 딴죽을 걸 때 확인된다. 그렇다면 노무현은, 다른 날도 아닌 자주독립의 정신을 기리는 삼일절 날 시청 앞에 모여 "우리는 주한미군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친 '성도'들의 대통령이기를 바라는 것인가. 점령군을 사랑하는 그들에겐 아무 할 말이 없는 반면, 반전평화수업을 펴는 전교조 교사들에겐 할 말이 있는 대통령과 교육의 중립성을 훼손한다고 비난하는 교육부총리도 국가주의 교육의 희생자가 아니겠는가?      

  이번 방미외교의 성과라고는 한국 정부의 대미 저자세를 만방에 확인시킨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미국이 자기를 추종하여 뒷줄에 선 국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점이, 그래서 미국에 대한 굴종적 외교는 굴종 그 자체로 끝난다는 점이, 노 대통령의 방미에 뒤이은 미일 정상회담 과정에서 부시에겐 한국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으로 다시금 확인되었다. 노 정권은 어줍지 않게 '국익'을 위해서라거나 '실용주의 외교' 노선이라고 치장할 일이 아니다. 우리 현실이 미국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어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국민에게 솔직히 말해야 한다. 사회구성원들이 '한미공조'라는 허울좋은 명분에 속지 않고 민족적 자존의식과 반전평화의식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국제관계의 힘의 역학관계에서 약한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아니 약한 처지에 있다면 더욱 그래야 마땅한 것이다.       

국가주의 교육과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 형성

  모든 정치사회적 현상은 그 근저에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흐르고 있다. 촛불시위의 시위대도, <우리는 미군을 사랑합니다>를 자랑하는 시위대도, 조중동이 신문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익추구 세력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한나라당이 다수당인 정치현실도, 지역패권주의가 판치는 것도, 때마다 진드기 정치인이 등장하는 것도, 모두 그런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구성원의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물음은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이고 앞으로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일찍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조물주에 대한 인간의 선언이기도 했다. 그 뒤, 스피노자, 피에르 바일을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즉,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게끔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본성 자체가 수많은 결정론에 매여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마침내 19세기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는,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사회경제적 정체성을 부여했다. 즉, 사회경제적 정체성에 따른 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여, 가령 노동자의 존재는 노동자의 의식을 갖도록 하고, 자본가의 존재는 자본가의 의식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자의 의식을 갖고 자본가는 자본가의 의식을 갖는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 명제는, 그러나,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통제하는 과정이 없을 때에만 참 명제가 될 수 있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은, 노골적이거나 교활한, 소리 있거나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 기제인 교육과 언론을 통해 조작되고 통제된다. 우리는 자본권력이 19세기 후반 이래 보편화된 교육과정을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이용했으리라는 점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피지배자들에게 자기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함으로써 자본권력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순응케 하는 것이다. 지배자들이 의도한 국가주의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그것인 바, 우리에겐 그것이 사회경제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의식뿐만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의식까지 갖도록 작용했다. 민족적 정통성을 찾을 수 없는 친일부역 세력-친미사대독재 세력이 계속 이 사회의 주도권을 쥐어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구성원들의 의식형성에서 교육과정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사회화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과정이다. 결국, 한국 사회의 현 단계를 가늠케 하는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은 대부분 학교에서 형성되는 것으로서 국가주의 교육을 통해 그 대부분이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돈 들여서 말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대해 노 정권은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교육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자유주의 보수 세력은 이 땅의 진보 세력이 자주 꺼내는 '1300만 노동자, 400만 농민, 400만 도시 서민'이라는 계급분석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진보 세력은 그럴 수 없다. 1300만 노동자, 400만 농민, 400만 도시서민은 진보정치의 주체들이며 동반자들이다. 진보정치 세력이 '1300만 노동자, 400만 농민, 400만 도시 서민'을 말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진보정치의 주체들이며 동반자라는 점을 확인하려는 데 있다. 그들이 그 존재에 상응하는 정치사회의식을 갖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1300만 노동자'를 자주 꺼내는 것인데,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그들 중 노동자의 의식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자신이 노동자라는 것조차 부인하고 있다. 또 400만 농민이라고 말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농민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도시 서민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이들에게 교육과정이 없었다면 존재에 상응하는 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제 때 소작쟁의를 일으켰던 농민들의 의식이 오늘날의 농민들보다 더 농민의식으로 무장돼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작년, 대선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부유세 신설과 더불어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내놓았다. 한국 사회구성원들 중에는 식구가 병에 걸리면 병 걱정보다 돈 걱정부터 해야되는 존재들과 소득에 비해 과중한 교육비로 어려움을 겪는 존재들이 무척 많다. 그들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당연히 무상교육, 무상의료 정책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대부분은 귀 기울이기는커녕 접근 자체를 스스로 피하고 있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주의 교육의 영향이 아니라면 그 무엇 때문이겠는가.

  민족적, 사회경제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사회구성원들이 올바른 의식을 가졌을 때, 개인으로도 민족의 일원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올바른 정치적 선택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 1항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익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민주공화국의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의  권리이며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이 땅의 국가주의 교육은 민주공화국을 철저히 배반하면서 관철돼 왔다. 그런데 개혁정권이라는 노 정권도 이를 혁파하는 대신 네이스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국가주의 교육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면화된 질서이데올로기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통제하려는 국가주의 교육에 친미반공 의식과 같이 노골적인 프로파간다만 담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5·16 쿠데타 이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른바 '혁명공약'의 제1항을 암기하고 있다. 즉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돈독히 한다"이다. 반공과 친미를 일찍부터 세뇌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아주 노골적인 세뇌가 있는가 하면,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와 같은 사회경제적 자아를 매몰시키려는 프로파간다도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이른바 5060 세대들이 2030 세대들에 비해 수구적인 선택을 했던 이유 중에는 이처럼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어렸을 때부터 세뇌해온 프로파간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다녔던 국민학교의 '국민'은 본디 '일제 천황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국민'을 말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불령선인이라 했고 또 '비(非)국민'이라 했다. 즉, 국민학교란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는 국민을 길러내기 위한 학교였던 것이다. 정작 일본은 2차대전에서 패망하자마자 국민학교를 '소학교'라고 개칭했는데 우리는 국민학교를 90년대까지 계속 꿰차고 있었다. '일제에 충성하는 국민'에서 '반공의식과 친미의식으로 철두철미 무장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국가주의 교육이 계속 관철돼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꾼 지금은 국가주의 교육이 완전히 없어졌는가. 물론 사회 민주화와 더불어, 또 전교조 교사들의 문제의식과 함께,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노골적인 의식 통제로서의 국가주의 교육은 많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교과 내용도 개선된 점이 많다. 그러나 국가주의 교육을 관철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리인 교장·교감 임용제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교장·교감 임용제도는 가장 민주적 공간이어야 할 학교를 계속 권위주의, 관료주의의 터전이 되도록 하고 있다. 국가주의 교육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교장·교감이 될 수 있는바. 그들은 국가권력의 지침 하달에는 아주 충실한 마름 노릇을 하면서 단위 학교에서는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다. 현재의 교장 임용제도가 있는 한, 구조적으로 국가주의 교육은 계속 관철될 것이다. 또 교사들에게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펴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이런 저런 잡무들도 알고 보면 국가주의 교육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반공의식 세뇌하기, 친미사대의식 심어주기와 같은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노골적, 공격적으로 통제하는 국가주의 교육은 엷어졌다고 하더라도 은근하면서도 노회하게 통제하는 질서 이데올로기는 계속 강력하게 관철되고 있다. 질서 이데올로기는 한국의 사회구성원들에게 철저히 내면화되었다. 친미반공 사대의식에 대해서는 문제제기가 되고 있지만 질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의식은 국민학교의 구조 자체가 군국주의 일본시대에 병영을 본떠서 만든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찾기 어려운 만큼 아주 희박하다.

  실제로, 우리가 다녔던 국민학교는 병영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수위실은 위병소이며 운동장은 연병장이다. 연병장에는 사열대가 있어서 어린 우리들은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마다 병사들처럼 도열하여 교장 선생님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애국조회'라는 이름 아래 세뇌 받은 뒤에 막사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우리가 국민학교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가나다라"나 "1, 2, 3, 4"가 아니었다. 그것은 "앞으로 나란히!"라는 군대식 명령어였다. 질서 이데올로기의 내면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 뒤 우리는 줄기차게 질서의식을 교육받았다. 우리는 왜 질서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묻지 않은 채, 타율적 질서의식에 점차 익숙해졌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교문에서부터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복장 단속, 두발 단속으로 우리들의 질서의식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 내면화되었다. 무조건의 타율적 질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남에 대한 배려가 요구하는 자율적 질서의식은 실종되었다. 우리에게 질서의식은 자유인의 그것이 아니며, 남이 보지 않거나 규제 당하지 않을 때엔 그 어떤 질서도 지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자유의 반대는 무엇인가. 이 질문을 받은 수험생들은 '억압'이라고 정답을 내놓지만 사회구성원들이 실제 생활에서 내놓는 반응은 결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에게 자유의 반대는 억압이 아니라 '무질서'이며 '불안'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을 때를 가정해보자.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의식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같은 사회구성원으로서 파업 소식에 대해 제일 먼저 물어야하는 것은 "왜 파업을 일으켰는가?"라는 물음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사회구성원 대부분의 즉자적 반응은 파업 이유에 대해 알기도 전에 파업은 곧 무질서이고 사회 불안 요소이므로 반대하는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의 이러한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조중동 등 수구신문들은 파업이 일어났을 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하지 않은 채, 파업의 결과, 즉 '시민 불편', '수출에 비상', '우려되는 국가 신인도', '국가 경쟁력에 악영향' 등으로 신문을 도배한다. 사회구성원들은 파업에 대한 반대의사를 더욱 공고히 하고 파업노동자들은 집단이기주의자로 몰리고 국가권력의 탄압을 받게 된다.

  결국 이 사회에서 사회정의의 요구는 내면화된 질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척되고 공화국의 원칙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봉건시대의 신분질서 이데올로기에 대해 자유와 평등 이념으로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공화국이 성립되었음을 되돌아볼 때 질서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는 기존 질서와 기존 권위 구조의 수혜자들인 기득권 세력을 위한 가장 강력한 지배장치임을 알 수 있다. 

  지금 노 정권은 노사관계의 정상화를 요구하는 사회구성원들의 목소리에 대해 수구신문들과 똑같이 국가기강을 말하고 있다. '국가위기관리특별법'을 운운하는 데 이르러선 경악할 지경이다. 사회구성원들에게 내면화돼 있는 질서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겠다는 심산인가. 그렇다면, 노 정권은 참여정부가 아니라 수구정권 그 자체다. 

결론

  나는 노 정권이 합리적 보수정권이기를 바란다. 즉 사회구성원들에게 민족적 정체성, 사회경제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자기 존재를 배반하지 않는 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사회환경, 나아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마련해주기를 바란다. 노 정권이 진정 공익을 추구하는 개혁 세력이라면,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에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게 하는 국가주의 교육을 청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무에 속한다. 이 점에서 국가주의 교육 관철의 중요한 고리인 교장 임용제도와 교감 제도를 없애고 교장선출보직제로 대신하는 것은 교육개혁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나아가,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여 학원의 민주화를 이루고 현대판신분제인 학벌체제를 부숴 사회적 불평등구조를 없애고 교육정상화의 길을 모색할 때, 노 정권의 개혁에 진정성이 담보될 것이다.   

* 필자는 격월간『아웃사이더』편집위원입니다.
* 본문은  아웃사이더』13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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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6/16 [10:2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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