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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들의 배치와 범람, 급진론의 함성
[책동네] 들뢰즈의 급진성 다룬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 민음사
 
벼리   기사입력  2006/09/14 [19:43]
21세기에 존재론이 있다면 그것은 들뢰즈의 존재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이하게도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존재론이다. 서양철학이 항상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같은 심급으로 다루어 왔다면, 들뢰즈에게 그러한 시도는 존재에 대해 오캄의 면도날과 같다. 너무 많은 규정이 형이상학의 이름으로 있어 왔다는 것은 니체 이래의 서양철학의 문제의식이 아니었던가. 일종의 <고등사기>(니체)와 같이 존재는 너무 헐거운 형이상학의 옷을 입고 불편하게 철학의 오솔길을 뒤뚱거렸던 것은 아닐까?
 
저자가 들뢰즈를 경험론의 계보 안에 위치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들뢰즈의 경험론은 소박한 영국식 경험론은 이미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가 들뢰즈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과 같이 우리가 보는 실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실재 이전의 또 다른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경험의 가능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경험의 '배후'를 살핌으로써 다시 형이상학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경험은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이며, 그 이외의 것은 부질없다.
 
그렇다면,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 경험의 축과 한계가 '존재' 아니었던가? 우리 인식은 이 경계 내에서만 움직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다시 우리는 '존재 안'에 있는가? 경험론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우리 인식을 옭아매는 '존재'는 없다. 실체로서의 존재는 폐기되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경험의 가장 근원적인 사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경험' 배후에 뭐가 있단 말인가?
 
“경험론의 근본 정신 … 계사는 존재 동사가 아니라, 접속사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하늘은 est/is 푸르다>는 존재를 그 근저에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임>과 et/and <푸름>이라는 두 속성이 이웃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 요컨대 <존재>는 경험론이 설명해 내지 못하는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먼저 경험론이 제거해 버려야 하는 허구인 것이다. 문법이 일으키는 환각에 대항해, 계사는 존재 동사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들의 배치를 의미하는 접속사임을 밝히는 것, 그것이 경험론의 사명이다”(p. 64).
 
그렇다면, 이제 데카르트의 악신은 여기서 문법적 환각의 주술이다. 니체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우리가 들뢰즈의 경험론으로부터 건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것, 다시 말해, 존재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성의 이웃함, 즉 '배치 dispositif'라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에게, 또한 스피노자에게 속성은 강도적 차이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실체와 양태의 본질이다. 속성은 양태를 통해 스스로 배치될 것이며, 그러하다면, 여기서 배치는 '양태적 구도'가 된다. 들뢰즈의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양태적 구도, 또는 내재성의 구도. 한 마디로, '하나의 삶'
 
“최후의 영광은 <속성들>에게 돌려진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 내재성을 구성하는 것은 존재하는 힘과 사유하는 힘, 바로 속성들이다. <무엇보다도 내재성은 '속성들의 일의성'을 의미한다>(SPP, 100). 이 강도적 크기들 또는 양태들을 들뢰즈는 말년의 대작에서 <수많은 고원들 Mille plateaux>라고 불렀다. 내재성 안에서의 이러한 사건, 즉 이러한 힘의 들끓음, 혹은 수많은 고원들 사이의 기호 해독, 변용, 그들의 합성과 분해는,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낱말들로 쓰자면, 생기(生氣)를 가진 모든 것들의 사랑과 죽음과 기쁨과 슬픔의 소용돌이이다. 우리는 이 소용돌이를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피히테에게서 들뢰즈는 이것을 일컬을 말을 발견한다(Ⅳ, 4 참조). 그것은 바로 <하나의 삶 UNE VIE>, 하나의 삶이라고 밖에는 불릴 수 없는 것이다”(p. 248). 
 
들뢰즈의 독해를 독해하는 이 책은 들뢰즈 철학으로 가는 유익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 민음사, 2002
삶, 이것은 들뢰즈에게 양태들의 강도적 배치며 매개되지 않은 욕망의 들끓음을 긍정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강도적 배치를 산다. 그 와중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사건들과 기호들은 미리 예정된 질서를 형성하지 않으며, 온전히 우발성 안에 맡겨질 것이다. 영원회귀. 또는 기관 없는 신체 위에 등록되는 욕망의 배치들. 반복되는 것들은 이러한 차이와 생성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삶의 변하지 않는 진실은 삶이 영원히 변한다는 사실뿐이게 된다.
 
저자는 들뢰즈를 통해서 결국, 이런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법이든, 체제든, 실체든 그것은 오로지 시뮬라크르들의 배치와 범람을 통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 그 미세 지각들의 잠재성이야말로 우리 경험의 가능근거며 변전하는 모든 것들의 영원회귀가 윤리와 존재의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는 것 말이다.
 
들뢰즈는 이 깨달음을 위해 스스로를 급진적으로 벼루어 내야만 했던 것일까? 오이디푸스에 대한 증오는 그가 왜 정치적으로 급진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아버지 살해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혁명가의 모습이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 삼각형 안에 갇힌 불쌍한 엠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삼각형을 깨부수는 분열자가 되는 것이다.
 
“부분충동으로서의 욕망은 무목적적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혁명을 가져올 수 있는 까닭은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자본 씨, 대지 부인,' 이 둘의 아이 노동자>(A, 315)라는 오이디푸스적 구조, 즉 가족주의적 표상을 통해 지배하려는 데 반해, 욕망은 본질적으로 오이디푸스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이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이상, 욕망의 본성에 대립적인 체제인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 욕망이 억압적인 모든 상징계적 장치를 넘어, 실재계의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에, 오이디푸스적으로 짜인 자본주의적 상징계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p. 202-203).
 
“부성적 시니피앙은 욕망을 굴복시키는 장치로서, 전복되어야 할 것이지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p. 221).
 
오이디푸스는 체제의 산물이며 정신분석은 그것을 정당화한다. 자본주의를 탈구조화시키는 혁명은 다시 말해, 이 욕망의 차원에서 일어날 것이다. 68혁명의 함성소리와도 같은 이 글귀들은 저자가 들뢰즈를 참으로 옳게 독해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그래서, 들뢰즈 철학의 급진성과 함께 그것의 윤리적·정치철학적 변주를 가능하게 한다.<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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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9/14 [19:4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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