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녀’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요즘 사람답지 않게 된장 같은 토속적인 데 별난 취향이 있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인가 보다 생각했다. 정작 ‘된장’과 인연이 맺어진 여자의 정체를 알고 나니 입맛이 영 썼다. 나는 음식에다 경멸적인 표현을 갖다 붙이는 걸 환영하지 않는다. 음식 만드는 노동의 힘겨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간 해서는 먹는 것 가지고 희롱하는 법이 없다.
요리하는 사람이 주로 여성이다 보니 이런 식의 이름 짓기에는 음식 이름을 통해 여자를 경멸하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된장’이라는 낱말 자체에 이미 남성의 여성 비하 의식이 녹아 있는 것이다.
‘된장녀’가 유행어가 됐다고 하여 뭔가 별스럽거나 새롭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남자한테 의지하여 분에 넘치는 소비를 즐기거나 제 분수도 모르고 돈을 펑펑 쓰는 여자, 곧 성실하게 사는 남자를 피곤하게 하는 ‘된장녀’의 초상은 전혀 낯설지 않으며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것이다.
사치와 허영의 물욕에 빠진 속물적인 여성상은 생산은 남자, 소비는 여자의 몫으로 할당해버린 근대 자본주의 이후 사회와 문학에서 여성 폄하용으로 단골로 다루어져 왔다. 허영과 사치를 즐기는 여성의 사회적 평가가 얼마나 인색한지는 같은 여성조차 이들에 대한 공격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데서 알 수 있다.
여성 비하 의식 녹아있어 인간 내면의 욕망과 어둠을 가차없이 헤집어놓으면서도 이해심을 잃지 않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같은 작품에서조차, 일제 밀정이나 살인자 못지않게 독자의 가슴에 부정적으로 새겨지는 이들은 당대 사회에서 속물의 대명사였던 ‘신여성’을 포함하여 정신적 허영심에서 헤어나지 못한, 알고 보면 평범한 여자들이다. 여성에 대한 붙박이 허상 중 하나인 물신에 사로잡힌 속물로서의 여성상은 사회 변동기에, 더 정확하게는 남자의 지배력이 흔들리기 쉬운 때에 더욱 빈번히 나타난다.
‘된장녀’는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이 가진 돈으로 재려는 사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찾아낸 희생양이자 먹잇감이라고 할 수 있다. 풍요롭고 소비가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오히려 양극화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어긋난 사회에서 더 이상 우월한 경제력으로 여성을 압도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자괴감이 여성에 대한 이유없는 적대 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된장녀’라는 딱지가 붙여진 여성은 따지고 보면 결코 남자를 피곤하게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물론 부담을 주긴 하지만 남자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줄 수 있을 뿐이다. 허영기 있는 여자가 부담스럽다면 지적으로 똑똑하거나 자질이 출중한 여자는 남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가? 그건 부담 정도가 아니라 남자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무서운 위기의식을 줄 것이다.
속물이기 바라는 심리 투영 그런 면에서 ‘된장녀’는 여성이 남자의 비난을 언제든 감당할 수 있는 허영적인 속물이기를 바라는 남자 자신의 심리가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남자들이 아무리 여자들을 허영 덩어리로 폄하해봐야 자신의 우월감만 드높아질 뿐 손해 볼 일이 없다. ‘된장녀’를 통해 가장 이득을 보는 자, 곧 창조자는 오로지 남자들이다. ‘된장녀’란 생산품은 여성에 대한 지배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남자들의 한풀이와 소망, 불만 등 서로 모순된 것들이 착종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여성이 소비에 미친 동물로 매도되는 동안 정작 남성 자신들은 여성을 독립적인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성매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상품이나 도구인 양 소비적인 태도로 대한다는 사실은 은폐되고 있다.
‘된장녀’ 담론은 비어 있는 머리를 소비욕으로 채우는 하등한 존재로 여자들을 형편없이 뭉개놓고 그 허상을 즐기며 우월감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남자들의 위기의식과 불안이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위기를 해소하려면 여성에게 어떤 환상이나 허상도 덧칠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된장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들만 모르고 있다.
* 본문은 '언론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 <경남도민일보> (
http://www.dominilbo.co.kr) 9월 11일자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