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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가야금 산조와 민요가락의 영롱한 조화
무형문화재 임경주,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로 가야금 연주 음반 내놓아
 
김영조   기사입력  2006/06/24 [22:34]
▲ 임경주의 "가야금 산조와 민요가락" 음반 표지
ⓒ 신나라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위는 시조시인 정완영의 시조 <조국>의 일부이다. 이 시조는 한국적 정서를 전통 악기인 가얏고의 가락에 비긴 것이며, 조국에 대한 애끓는 사랑과 조국의 슬픈 역사적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조국의 앞날을 위한 염원을 절절이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가얏고라고 일컬은 가야금은 사부(絲部:울림통에다 명주실로 꼰 줄을 얹어 만든 악기)에 속하는 우리의 전통 현악기이다. 오동나무 공명반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12줄을 세로로 매어 줄마다 안족(雁足:기러기발)을 받쳐놓고 손가락으로 뜯어서 소리를 낸다. 가곡반주, 가야금산조, 가야금병창 등 한국음악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가야금산조는 북의 장단에 맞춰 홀로 연주하는 민속 음악 양식으로, 즉흥연주라고도 하지만 실제는 "흩어지는 가락"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 가락은 시나위에서 발전한 것으로 전라도의 남서부지역에서 무속 의식을 치를 때 연주되는 즉흥곡의 한 형태이다. 특별한 규칙이 없이 작은 음악을 연이은 것으로 왼손 농현의 기교로써 희로애락을 적절히 표현한다.

산조는 전남 영암출신인 김창조(1865∼1919)에 의해서 연주된 가야금산조가 산조 형태를 갖춘 최초의 것이라고 알려졌다. 가야금의 명인들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가락을 토대로 자신의 독특한 가락을 첨가하여 자신의 고유한 가락을 남기는데, 이를 ‘류(流)’또는 ‘바디’라 한다.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유파로는 김죽파류, 최옥삼류, 성금련류, 김종기류, 신관용류, 강태홍류, 김병호류, 박상근류, 서공철류가 알려졌다.

▲ 산조가야금
ⓒ 김영조
이중 강태홍류를 전수받은 연주자 임경주의 음반이 (주)신붕민속예술의 기획으로 신나라(회장 김기순)에서 출시되었다. 이번 음반은 두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첫 장은 임경주 본인의 주 종목이고 가장 어렵다는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 전 바탕 독주를 허봉수의 장고 반주로 담았다.

강태홍류의 가야금산조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깊고, 줄(絃)속에 알이 가득 찰 정도로 농현기법은 어느 유파의 산조보다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태홍류의 우조는 숙달된 깊은 농현으로 자연스럽게, 계면은 부드러운 음색의 애조띤 소리로 바뀌고, 계면의 흐름인가 싶어질 때 어느 순간 우조의 깊고 장엄한 음색이 변화무쌍하게 전개된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장은 임경주가 음악생활에서 터득한 민요의 세계를 독창적인 가야금 연주로 표현한 민요가락이다. 또 이에는 주로 이생강의 대금, 피리, 소금의 전주가 있고, 목탁 이호용, 장고 허봉수와 함께 했다. 민요가락 은 아리랑, 도라지, 진도 아리랑, 청춘가, 뱃노래, 양산도, 밀양아리랑, 태평가 등을 들려준다.

▲ 가야금을 타는 임경주
ⓒ 임경주
가야금은 이제 누구나 친숙하게 생각하며, 아름다운 음색과 명주실 음향의 질감이 우리에게 편하면서도 정감을 주는 악기이다. 이런 악기를 가지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민요를 연주하면 민요, 또 국악의 맛에 익숙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으로 연주를 한 것이라고 한다.

연주자 임경주씨는 전북 고창 출신인데 이미 세상을 뜬 그녀의 아버지 임동선씨는 유명한 풍류객이었으며, 가야금으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유대봉, 김윤덕, 성금련, 구연우와 아버지로부터 가야금을. 박종선, 한일섭, 김일구, 윤윤석으로부터 아쟁을, 김영철, 천대룡에게 철현금을 배웠다.

특히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를 옛날식으로 배운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사람이고 1965년 호남 예술제 장원, 1972년 전국기악경연대회 최우수상, 1992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기악부 장원으로 뽑혀 정상급 연주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경주가 연주한 강태홍류는 부산에서 구연우의 부인이자 강태홍의 제자인 신명숙에 의해서 계승되었지만, 서울은 구연우에게서 1973년부터 10여 년 동안 옛방식으로 배운 임경주가 유일하게 그 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강태홍류는 원래 서울에서 전승된 산조이기에 임경주가 서울에 터를 잡고 강태홍류를 보급한 것은 의미가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음반 녹음을 같이한 이생강 선생은 임경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임경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생강 선생
ⓒ 김영조
“임경주는 어릴 적부터 예술 쪽으로 뛰어난 기질을 보여줬다. 임경주는 국악을 공부하러 우리집에 드나들었는데 밥도 안 먹고 새벽부터 올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고, 임경주는 여러 훌륭한 선생님들에게서 각 유파를 골고루 섭렵했다. 따라서 임경주는 예술을 하기 위한 3박자인 재질, 스승, 노력이 모두 갖춰졌으며,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연주자이다.

특히 임경주는 내게도 악기로 덤빌 수 있을 만한 정도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정통성을 벗어나지 않고 제 음을 정확히 내는 뛰어난 연주자이다.“

또 동국대 최종민 교수도 “임경주는 철저히 전통적인 방법으로 음악을 배웠고, 또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가야금산조 같은 독주 음악뿐만 아니라 무용 반주나 시나위합주 같은 앙상블에도 대단한 기량을 가지고 있는 음악가이다. 게다가 합주를 할 때 보면 가야금으로 어울리기도 하지만 아쟁으로도 어울릴 수 있으니까 얼마나 대단한가?”라고 평한다.

판소리의 유파 중에서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설을 명쾌하게 하려는 동초제가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처럼 가야금 유파에서 맥을 잇는 사람이 많지 않은 강태홍류도 독특한 농현기법으로 어느 유파에 비해서도 가치가 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 강태홍류를 서울에서 유일하게 맥을 잇는 임경주는 칭찬받아 마땅하고, 그의 음악을 듣는 것 또한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이제 꿉꿉하고 우울한 장마철이 시작된다. 이 장마철에 임경주의 가얏고 소리를 들으며 환한 마음을 붙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녀의 섬세한 농현에 푹 빠져 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삶을 마칠 때까지 가야금을 사랑할 터
[대담] 가야금 음반을 낸 임경주

▲ 대담하는 임경주
- 어떻게 가야금에 삶을 바치게 되었나?
"아버지는 남도 3현6각의 지방문화재 보유자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늘 가야금 소리에 익숙해 있었는데 그게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시 여성이 국악을 하는 것에 부정적이던 세상 때문에 내가 가야금을 가깝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나는 몰래 가야금 연습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 간다며 가야금을 들고 산에 가서 연습하곤 했다. 그러다 무단결근을 확인하기 위해 집을 방문한 선생님 때문에 들켜 혼난 적도 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나들이를 하신 틈을 타 마루에서 가야금을 타고 있었는데 귀가하시던 아버지가 이 소리를 듣고 감탄하여 가야금 공부를 허락해주었다. 이후 방학 때마다 서울에 올라가 공부하기 시작했다."

- 연주한 강태홍류의 특징은 무엇인가?
" 강태홍류는 연주가 까다롭고 어려워 공부하려는 사람이 적은 편이다. 농현기법이 독특한데 한 줄에서 두 가지 음이 나올 수 있으며,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 두 번째 장은 이생강 선생이 전주를 해준 민요 연주인데 어떻게 그런 녹음할 생각을 했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던 중 산조만으로는 좀 딱딱할 수도 있으니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민요도 녹음하자는 이생강 선생님의 즉석 제안이 있었다. 물론 선생님이 전주를 해주신다는 제안과 함께였다. 최고의 명인이신 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데 싫다고 할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연습도 없이 녹음하게 되었는데 잘 이끌어 주셔서 쉽게 녹음했다."

- 산조와 민요연주를 함께 음반으로 내놓은 것이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산조는 깊이가 있는 음악인데 좀 경쾌하고 가벼운듯한 경기민요를 같이 녹음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일반 대중을 위한 배려에서 녹음했음을 이해해 달라. 다음엔 남도민요도 녹음할 계획이다."

- 요즘 봇물 쏟아지듯 나오는 창작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창작음악도 국악의 발전을 위해서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가 전통음악에 대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접하기 쉽고, 배우기 쉬운 창작음악에만 매달린 듯하여 안타깝다. 전통음악의 원형을 망각하는 것은 생명력이 없다. 창작음악을 하더라도 전통음악의 바탕을 다진 다음에 해야 할 일이다."

- 50여 년 가야금과 함께한 것에 대한 감회를 말해달라.
"나는 가야금과 일생을 함께했다. 하지만, 이에만 매달리다 보니 지금은 손가락 관절에 조금 무리가 와 걱정이다. 삶을 마칠 때까지 가야금을 사랑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가야금 속에서 헤매다가 나이를 먹었지만 내게서 배운 후배와 제자들이 나를 뛰어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한가지 소원은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산타할머니가 되는 일이다."

임경주는 천상 가야금에 빠져 사는 소박하고 따뜻한 여인이었다. 연주 외에는 그 무엇도 알려고도 하지 안았으며, 그저 온통 가야금 생각밖에는 아무 욕심도 없는듯했다. 순수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녀에게 나는 조용히 마음을 다해 손뼉을 쳐주고 싶었다.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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