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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종교 학습에 대한 고민'을 행동으로 옮긴 강의석
[이계덕의 청소년세상읽기] 강의석과 종교자유 사건을 정리해본다.
 
이계덕   기사입력  2006/06/10 [23:15]
2004년 세상을 놀라게 했던 한 고교생의 46일간의 단식투쟁은 청소년들에게 종교인권은 물론이거니와 청소년 두발 문제, 체벌 문제등 청소년 전반에 대한 인권문제에 영향을 주었고 고교생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광화문에서는 두발자유화를 요구하는 중고생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고 말입닏. 이제 이계덕이 보았던 강의석과 종교자유 사건을 이렇게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고지식한 청소년 강의석. 101일간의 사투, 46일간의 단식과정을 당시 함께했던 동료이자 친구로써 정리해보았습니다.
 
2004년 6월 20일 한겨레신문에는 미션스쿨(종교학교)의 강제적인 예배참가를 금지시키고 종교의 선택권을 달라며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벌인 한 고등학생의 1인시위 기사가 실렸다.이 고등학생이 당시 기독교 미션스쿨인 서울대광고등학교의 학생회장 강의석이었다.
 
다음 날인 6월 21일 서울특별시 교육청 앞에서 만난 강의석은 굵직한 목소리로 기자들에게 강제적인 종교학습 사례를 설명했으며 강의석의 피켓에는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종교자유, 고등학생에겐 예외?'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류상태 목사와 강의석 "의석아, 네 말이 옳다" 
 
강의석을 비롯한 미션스쿨 재학생들은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소위 뺑뺑이'로 미션스쿨에 배정되었다.중학교 시절 가고 싶은 학교에 대해 조사를 할 때, 종교를 묻는 내용도 분명 포함되어 있지만 종교가 학교배정에 크게 반영되지는 않았다.그렇게 미션스쿨에 온 학생들은 학교의 설립이념에 따라 예배에 무조건으로 참여해야 했고 참여하지 않으면 큰 불이익이 있었다.
 
대광고등학교에서는 매주 수요일 1시간씩 학생들에게 예배참여를 강요했다. 처음 강의석은 이 예배에 빠지지 않았고, 다니지 않던 교회에도 다니기 시작했다.그러나 강의석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기독교 신자가 아닌 그가 교회에 다닌 이유는 학생회장이 되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학생회장이 되기 위해 교회를 다니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강의석이 다니던 대광고등학교의 사정을 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광고등학학생회장의 출마의 자격을 제한하고 있었다. 학생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불교 신자, 천주교 신자 등 타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종교를 가지지 않은 무교의 학생들은 학생회에 참여할 수 없었고 학생회 임원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을 전제로 했다. 학생회장이 되고 싶었던 강의석은 기독교신자가 아니었음에도 학생회장 출마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예배에 참여해야 했고 매주 교회도 나가야 했다고 한다. 강의석은 교회에 다니면서 대광고등학교 학생회장에 출마했고 당선되었다.
 
학생회장이 되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의석은 자신의 삶의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기독교를 믿지 않고, 예배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학생회장이 되기 위해 자신을 기독교 신자라고 속여야만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당시 2학년이던 강의석에게 1학년 후배들이 억지로 참여해야 하는 예배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을 때 강의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종교를 강요 받아야 하는 자신이 옳은 것일까? 학교의 학생회장에 출마하기 위해 거짓으로 기독교 신자인 척 한 자신이 과연 잘한 짓일까? 이런 고민을 가지게 된 강의석은 홀로 생각하지 않았다.대광고등학교 교목실을 찾아갔다.교목실장이었던 류상태 목사에게 강의석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다.
 
강의석이 털어 놓는 고민은 대광고등학교 교목실장 류상태 목사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학교에 예배에 적극 적으로 참여 했고, 학교에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모범생 강의석이 학교의 설립이념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첫번째 충격이었고,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며 기독교 학교의 모순을 지적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제자라는 것이 류 목사에게는 두번째 충격이었다.그리고 류상태 목사는 제자인 강의석에게 한마디 밖에 하지 못했다.
"의석아, 네 말이 옳다."
 
류상태 목사의 이 말은 강의석에게도 뜻밖이었다. 학교에 교목실장이니 강의석이 잘못을 지적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류상태 목사는 "의석아, 네 말이 옳다"며 강의석 자신의 말이 옳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강의석은 자신을 누르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학생회장에 출마하기 위해 자신의 종교를 속이면서까지 자격을 갖추려고 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2004년 6월 16일 오전 8시 30분 대광고등학교는 전교생을 상대로 방송이 흘러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학생회장 강의석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학생회장 강의석이었다.
 
교내 방송은 계속 이어졌다.
"조직 속에 속하게 되면 두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조직의 문화 속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에 있습니다. 학교에는 교육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 안에서 그것은 선택권으로 주어집니다. 선택권이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요? 두발상태를 규제받고, 그냥 하루하루의 문화에 대해 인정해버리고, 교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적으로 저는 매주 수요일마다 한 시간씩 예배를 강요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간엔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잘못된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 조차 포용하지 못하는데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저는 수요 예배를 거부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통해 제가 떠나거나, 떠나게 되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때까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그로부터 1시간 뒤, 다시 방송이 흘러 나왔다.
“1시간 전에 했던 방송에 대해 오해의 소지가 많아 이렇게 다시 방송을 합니다. 이 의견은 학생회 전체의 의견이 아닌 제 개인의 의견임을 말씀드립니다. 개인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이런 말씀을 공적인 방송에서 하는 것은 제가 떠나면 자동으로 학생회장직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퇴임사를 대신합니다. 저를 믿고 사랑하며 뽑아주신 여러분께 죄송함을 전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강의석은 교내 방송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고 동시에 학생회장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자유를 향한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학교의 징계 그리고 1인 시위
 
2004년 6월 18일, 강의석군의 징계 위원회가 열렸다. 교목실장 류상태 목사는 "의석아, 네가 옳다"라고 말했으나 대광고등학교의 다른 교사들은 아니었다. 학교의 선택은  '종교상의 이유로 강의석 학생을 전학시킴' 이라는 것이 었다. 강의석의 담임교사는 다음주 금요일까지 전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자동 제적 처리 된다고 강의석에게 전학을 권유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소위 '이전 퇴학' 이라고도 불리우는 조치였다. 강의석은 처음에 전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비기독교인에 대한 기독교라는 종교의 강요는 미션스쿨 학교의 학생으로써 전학가면 해결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비기독교 학생들은 계속해서 종교를 강요 당해야 한다. 더구나 2년 반에 걸쳐 강의석과 함께 해온 친구들과의 우정을 버리고 다른 학교로 가란 말인가? 강의석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퇴학을 당할지언정 전학은 가지 않겠다." 강의석은 서울시 교육청으로 달려갔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자유, 그러나 학교는 예외?' 라는 내용의 문구가 담긴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벌였다. 기자들이 강의석을 취재했다. 신문을 통해 의석이에 소식이 알려졌다.
 
2004년 6월 21일, 이계덕(필자)은 18세선거연령낮추기공동연대의 회의를 마치고 서울시 교육청으로 향하는 택시를 탔다. 어제 한겨레신문에서 보도한 강의석군의 1인시위를 보고 호기심을 느꼈고 그와 대화를 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5000여원의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리자 YTN, KBS 등 방송국 카메라들이 강의석의 일인시위 현장을 촬영하고 있었다. 방송 기자와 신문 기자들의 취재가 진행되는 동안 강의석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이때 현장에 나와있던 종로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어이 계덕이, 쟤랑 아는 사이냐?" 라며 아는 체를 했다.  이계덕은 "저도 신문보고 어떤 내용인지 알아 보려고 온거예요." 라고 답했다. 종로 경찰서 정보과가 이계덕(필자)를 알고 있는 것은 미군장갑차여중생압사사건의 광화문촛불지킴이로 활동하면서 1년여간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강의석에 대한 취재가 이어지는 동안 잠시 안면이 있는 종로 경찰서 형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사와 대화 도중 서울특별시 교육청 관계자가 끼어들었다.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도 학교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교육청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기자들의 취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강의석에게 이계덕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강의석씨 맞죠?
"네. 맞습니다. 누구시죠?"
"저는 이계덕이라고 해요. 소식 듣고 힘 내시라고 격려 드리러 왔어요."
"아, 감사합니다. 혹시 미션스쿨 다니세요?"
 
간단한 소개를 끝나자 강의석은 이계덕(필자)에게 미션스쿨 재학 여부를 물어왔다.강의석을 격려하러 온 학생들은 이계덕 혼자가 아니었다. 이화여고를 다니는 학생들 4여명을 비롯해, 학부모 단체 관계자도 나와서 강의석을 격려하러 와 있었다. 이계덕은 강의석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요.제가 다니는 학교는 미션스쿨이 아니예요."
 
이계덕(필자)과 강의석의 대화는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강의석은 이계덕에게 친구를 제의했다. 나이도 같았기에 둘은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고 강의석의 일인 시위가 끝난 후 식사도 함께 가졌다.이날 식사에 함께 동참한 친구들 둘이 더 있었다. 강의석의 대광고등학교 후배 조성민과 또 다른 후배였다. 조성민은 강의석에게 찾아와 학교의 종교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후배들 중 한명이었고, 학교의 종교 문제나 여러가지 문제를 참지 못해 자퇴서를 제출했던 학생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하면서 강의석에겐 이계덕(필자)라는 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종교자유인권단체 로이'의 출범계획을 공유했고, 미션스쿨종교자유라는 다음까페에 가입을 제의받았다. 그날 이계덕(필자)가 카페에 가입했다.
 
2004년 6월 26일, 강의석은 결국 전학을 가지 않았고, 학교는 제적처리를 하겠다며 강의석의 부모님에게 통보해왔다. 강의석의 어머니는 아들을 학교에서 제적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어머니는 바로 강의석의 학교로 찾아가 학교장 전학 추천서를 받았고, 서울시 교육청에 아들인 강의석의 전학서류를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강의석 학생의 동의절차가 필요했지만, 없었다. 결국 서울시 교육청은 강군의 전학관련 서류가 미비해 보완이 필요하다며 문서를 다시 강군의 부모님에게로 돌려보냈다. 강의석의 부모님은 아들인 강의석이 제적당하지 않으려면, 전학을 가야한다며 설득을 했지만 강의석은 막무가내로 전학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부모님은 발만 동동 구르며 다시 학교를 찾아갔다. 그러나 학교는 강의석이 전학을 가지 않는다면 제적하겠다는 입장만 번복했다.
 
사단법인 21세기청소년공동체희망(위원장 : 이수호), 발전하는학생회가자(대표: 전누리)등은 전학을 가지 않으면 제적을 당한다는 강의석의 소식을 전해 듣고 대책을 논의했다
. 그리고 이들 단체는 2004년 7월 1일 서울 대광고등학교 앞에서 강의석에 대한 징계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리고 7월 8일, 강의석은 2학기 중간고사 시험을 치루고 있었다. 시험을 치루는 도중 강의석의 담임 교사가 강의석을 교실 밖으로 불러냈다. 전학을 가지 않고 학교에 남겠다고 다짐했던 강의석은 결국 시험도 치루지 못한 채 학교에서 제적처리 되었고 퇴학 당했다.
 
담임 교사의 말이 이어졌다.
"너는 오늘부로 제적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우편으로 발송될 거다"
 
빗속에 열린 청소년 인권축제 <로이 데이>
 


2004년 7월 17일 오전 7시 지하철 1호선 시청역 5번 출구에는 포스터를 손에 든 학생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미션스쿨인 노원고등학교를 다니는 성동찬과 박영준 학생을 비롯해 강의석의 후배인 조성민도 보였다. 여학생도 있었는데 역시 미션스쿨인 염광고등학교의 다니는 천민정이라는 여학생이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포스터와 스티커에는 로이(Right Of Youth)라는 문구와 함께 청소년 인권의 날 문화 축제가 열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1인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제적 당한 대광고 전 총학생회장 강의석과 함께 학내 종교 자유를 위한 청소년 인권 모임인 로이(Right Of Youth)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날 오전 11시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로이(Rights Of Youth) 데이' 청소년 인권의 날 문화행사를 개최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위해 모인 것이다. 이계덕(필자)도 로이데이에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어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폭우로 인해 앞을 분간하기도 힘들었다.일기예보에서는 서울과 수도권 일대의 호우주의보가 발령되었다고 소개했다. 행사가 불가능해 보였다. 오전 10시  행사의 음향을 지원하기로 했던 회사의 직원들이 도착했다. 음향회사측도 행사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았는지 '로이 멤버' 들에게 행사를 중단할 것을 권유했다. 로이에 다른 멤버들도 행사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는지 다른 날로 다시 행사를 잡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30여분간 행사의 진행 여부로 회의가 계속되었다. 이들은 행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이 행사를 위해 준비된 시간과 열정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행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하자 곧 음향회사 직원들이 시청앞 광장에 무대에 음향장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또 십 여명의 고교생들은 자신들은 비를 맞아가면서 음향장비가 비에 젖지 않도록  이리 저기로 뛰어다니며 천막을 빌려 설치하기도 했다.
 
"당신들 거기서 뭐하는 거야?"
갑자기 들려온 고함 소리, 시청의 경비 직원이었다. 서울시청 총무과로부터 무대 사용을 승인받고 오늘의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었는데 시청의 경비 직원은 상부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했다면서 행사를 제지하려 했다. 행사를 승인했던 시청의 총무과 직원과는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7월 17일은 헌법이 제정된 제헌절, 국경일이었고 당연히 공무원인 시청의 총무과 직원은 출근하지 않았다. 폭우속에서 강행하기로 결정한 행사의 또 다른 위기였다. 강의석을 비롯해 '로이'의 멤버들이 행사를 승인한 서울 시청 직원과 통화를 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시청 직원과 겨우 연락이 닿았고, 경비 직원과 통화를 시켜주었다. 서울시청 경비직원은 통화가 되었다며 음향설치를 허가했다. 다시 행사 준비 작업이 계속 되었다.
 
앞을 분간하기조차 힘든 폭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지만 많은 수가 온 것은 아니었다. 로이데이 행사가 시작하기 2분전, 무대로 한 국회의원이 찾아왔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었다. 강의석과 청소년들이 '로이' 행사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폭우가 내려 행사가 취소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격려하기 위해서 나왔다고 한다. 노회찬 의원은 "56년전에 만들어진 헌법 그대로만 지켰다면 대한민국은 훨씬 살기 좋았을 것" 이라며 한탄했다. 학생들이 즉석에서 행사의 축사를 부탁했고 노회찬 의워은 흔쾌히 수락했다.다음은 노회찬 의원의 축사의 내용이다.
 
"56년 전에 지키지도 못할 법이 만들어진 날이 오늘입니다. 56년 전 만들어진 헌법에는 우리 국민의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만 현재 국민들 인권은 철저히 무시 당하고, 유린 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농민, 서민, 청소년들의 인권을 위해서 로이데이가 앞으로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계속 청소년들의 국민들의 인권 축제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폭우 속에서도 행사의 인원은 어느새 오십여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미션스쿨에 다니는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자유발언을 하기도 했다. 강의석이 무대에 올라섰다. "로이는 특정 종교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모임이 아닙니다."라며 발언을 시작했다. 앞서 자유발언을 한 참가자들 중에 특정 종교를 비난하는 내용을 의식해서 였는지 로이라는 모임이 특정 종교의 안티 모임이 아니라고 못을 밖았다. 그리고 발언을 계속했다. "로이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 어떤 종교와도 상관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한가지 종교를 강요하고, 선택권을 주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서 이곳에 모였고, 학생들의 종교 인권을 위해서 행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로이는 종교의 자유와 청소년 인권을 위해 매년 앞장서겠습니다." 


비오는 폭우 속, 고교생들이 준비한 청소년 인권의 날 <로이 데이> 문화 축제는 2시간여 가량 진행되었고 참석한 학생들은 서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행사를 마쳤다.
 
 
단식 37일째 강의석 행방묘연..부모님 조차도 바꿔
 
대광고등학교에서 제적되었던 강의석은 서울북부지방법원의 퇴학무효신청과 가처분신청을 냈고 1일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져 임시학생신분으로 등교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미 강의석은 23일째 단식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먹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물과 소금 뿐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단식이 계속되자 강의석은 혈압이 급격히 낮아지는 등 건강이 악화되어 갔다. 이에 강의석의 주변에서는 '강제로라도 병원에 입원시켜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강의석이 단식이 37일째 되던 날인 9월 16일 새벽 강의석의 부모님은 아들인 강의석을 강제로라도 병원에 원시켜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어 '119'를 눌렀다. 119 구급대가 강의석의 집에 도착했고 강의석을 병원에 호송하려고 했지만 강의석은 병원에 가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강의석은 단식 중이기 때문에 주사조차 맞을수 없다고 말하며 병원을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환자가 병원에 가기를 완강히 거부하자 119 구급대로써도 어쩔 수 없었다.119 구급대는 환자 강의석에 완강한 거부로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강의석이 사라졌다.
 
17일 오전 11시경, 이계덕(필자)의 휴대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민주노동당 청소년 위원회 구정인 위원장의 전화였다. 전화의 내용은 강의석이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혹시 학교에 간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민주노동당으로 전화가 온 것이 학교의 교목실장인 류상태 목사의 전화였으니 학교는 아니었다. 37일째 단식, 목숨이 위험할 지 모르는데 어딜 간 것일까? 학교를 가던 도중 길거리에서 쓰러진 것은 아닐까?혹시 광적인 종교단체에 의해 납치된 것은 아닐까? 확인되지 않은 추측은 계속 되었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강의석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불통이었다.친구와 같이 있겠. 아마 친구와 같이 있을거야.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강의석의 행방묘연 사건은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충격이었고 강의석의 건강을 걱정하는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강의석의 사진을 퍼나르고 인터넷게시판에 댓글을 남기며 행방을 찾는데 함께 했다. 강의석이 만든 '로이' 모임 멤버 전재량, 성동찬 등과 이계덕(필자)이 강의석에게 참가하기를 권유해 12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오던 대통령 청소년 특별회의 추진단 김원, 김갈뫼, 박은영 등도 강의석의 행방에 대해 연락을 취하며 행방의 수소문을 함께 했다.
 
강의석의 단식은 40일이 넘어가고 있었고, 서울 청량리 경찰서는 3개팀 18명의 형사가 강의석의 행방을 수소문 했지만 벌서 5일째 강의석의 행방은 묘연했다.2004년 9월 19일 경찰과 강의석의 아버지가 이계덕(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의석은 휴대폰도 집에다 두고 갔고, 거기에 수신된 번호를 추적해서 연락을 해왔다고 했다. 집에다 휴대폰을 두고 갔다면 강의석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걱정은 증폭되었다. 이계덕은 강의석에 아버님에게 "너무 걱정마세요. 아마 친구들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강의석이 고지식해도 부모님에 대한 효를 아는데 곧 연락 올거예요." 라며 강의석에 부모님을 애써 위로하려 했다. 강의석의 아버지는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라며 한숨을 쉴 뿐이었다. 부디 아무일 없어야 할텐데...그 날도 강의석과의 연락은 되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 6시 15분경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이계덕에 휴대폰에 찍혔다. 강의석의 행방을 찾았다는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강의석에 아버님께 연락을 드렸다. 강의석에 아버님도 이미 소식을 알고 있었고, 강의석이 발견된 경남 고성으로 경찰과 동행하여 이미 내려가는 길이라고 전했다. 강의석이 경남 고성에서 통영인가, 합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매표소 직원이 강의석에 얼굴을 확인하고 경찰에 연락했다고 한다. 어머니를 만난 강의석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강의석에 손에는 도토리 한개가 쥐어져 있었다, 강의석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선물.."
 
5일간의 행방묘연 끝에 서울에 도착한 강의석은 몸을 씻는 과정에서 현기증을 일으켜 머리를 부딪히는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강군은 인근 고대 안암병원에서 상처 치료를 받았으나 영양제는 물론 링겔 주사조차도 맞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강의석의 부모님은 강의석이 제적을 당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고, 학교에 잘못했다고 빌라고도 했었다. 그리고 강의석이 단식을 해 건강이 악화되자 강제로 병원치료를 시키려고도 했었다. 그렇게 하면 강의석이 의지를 걷을 줄로 알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들인 강의석이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5일간 부모님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사라졌다. 강의석의 부모님도 아들의 의지가 이 정도인지 몰랐다.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아들에 의지를 꺾으려 하는 것을 아들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부모로써 아들의 의지를 후원해지는 못하고 꺾으려고 한 것에 대한 후회가 갑자기 들었다.
 
강의석의 부모님은 21일 오후 6시 자택에서 처음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강의석의 부모는 의석이가 요구하는 '예배선택권'은 헌법에도 보장된 당연한 기본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강의석의 아버지는 "그 권리가 보장받아 마땅한 권리라는 것을 가르친 것이 바로 학교"라며 "강군은 자신이 배운 그대로 실천하고 있을 뿐"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기자회견 내내 강의석의 부모님들은 "의석이는 대광고에서 예배를 없애라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강군 아버지는 "지금까지 의석이가 제기했던 주장을 곡해 없이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며 "의석이는 지금 예배를 원치 않는 학생에게 예배 참석을 강제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 하나만을 힘겹게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들의 의지를 꺾는게 아닌, 아들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강의석의 부모님은 어느새 강의석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있었다.
 
강의석의 친구들 "우리가 있잖아...혼자 모든걸 짊어지려고 하지마"
 
강의석이 단식을 한 상태로 가출한 사건은 강의석과 함께 활동하던 '로이'의 친구들에게도 큰 걱정이었다.강의석 혼자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준 것 같아 모두가 안타까워 했다. 강의석이 경남 고성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2004년 9월 20일 '로이' 회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9월 22일 오후 7시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는 20여명의 청소년들이 모였다.
 
'로이'의 활동가들, 대통령 청소년 특별회의 추진단, 18세 선거권 낮추기 공동연대, 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등의 단체 회원들과 강의석의 단식문제에 해결책을 구성해보자는 청소년활동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 있던 청소년들은 강의석을 한 번이상 봤거나, 함께 해온 동료들이었다.로이의 회원 전재량은 강의석을 보면 패죽여버리겠다며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조성민도 강의석을 보면 선배고 나발이고 한대 맞고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들은 후회하고 있었다.강의석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 무거운 짐을 강의석 혼자만 지게 했던 것. 그것이 강의석의 단식 과정으로 이어지게 만들었고 강의석이 가출하게 만든 것도 자신들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당일 '학내 종교자유를 위한 청소년 대책위'를 발족하기로 했다. 이제 더 이상 강의석 혼자 무거운 짐을 지게 만들지 않으리라..우리들이 있다는 것을 강의석에게 알려주리라.
 
강의석의 '후배' 조성민, 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의 연미림, 발전하는 학생회 가자의 전누리 그리고 필자 이계덕은 그날 저녁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위치한 강의석에 집으로 향했다. 조성민은 차에서 울면서 "때려줄거야..때려줄거야..우리를 이렇게 걱정 시킨 거 때려줄꺼야" 라는 말을 번복했다. 22일 저녁 강의석의 집에 도착한 일행들, 강의석은 처음과 다르게 해골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앙상한 몰골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강의석의 후배인 조성민은 강의석에게 달려가 강의석의 손을 잡았다. 조성민은 그렇게 강의석에 손을 잡으며 말없이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강의석군의 아버지와 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의 연미림 간사의 대화가 있었다. 강의석군 아버지는 아들인 강의석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고 말하며, 강의석이 단식을 풀 수 있게 되는 것은 대광고등학교에서 예배 선택권을 허용하는 길 뿐이라고 못 밖았다. 연미림 간사는 "강의석이 마른 모습을 보니 매우 슬프다. 우리가 그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놓은 것 같다" 면서 안타까워했다. 발전하는 학생회 가자의 대표이며 구로고등학교의학생부회장인 전누리는 "얼마전에 넘어져서 다쳤다고 하던데 다친 곳은 괜찮은가?" 라며 강의석에게 대화를 걸었다.강의석은 말은 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괜찮다고 대답만을 했을 뿐이다.전누리 학생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이제 우리들이 도울테니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지 말라"고 말했다.
 
조성민은 말이 없었다. 모두가 한마디씩 하는 동안 강의석에 손을 잡고 울고만 있을 뿐이었다.수분이 지나고 조성이 드디어 말을 꺼냈다. "형, 형이 단식 왜 하는 지 알겠는데요…. 다 알겠는데요… 정말 알겠는데요… 알겠는데… (잠시 말없이 울고만 있다가) 사람들이 걱정 많이 하잖아요. 쓰러져 가지고 밖에서 누워있지 말고… 이젠 밥 먹고요… 우리 믿어주세요"라며 하고 싶은 말을 토해냈다. 강의석은 말이 없었다. 갑자기 종이에다가 펜으로 글을 작성했다. '믿을게요' 라는 네 글자였다. 그날 강의석의 집을 방문했던 청소년들 중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누가 그를 이렇게까지 내몰았는가? 대광고등학교에서 강의석을 죽음으로 몬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였다. 우리 모두가 그를 이렇게까지 몰았고, 우리 모두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도움을 주겠다고 했음에도 그가 혼자 싸우다가 이렇게 될때까지 내버려 뒀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단식 43일째, 교육인적자원부 앞에 '학내 종교자유를 위한 청소년 대책위'의 구성원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기자회견을 하면서 선언문을 낭독했다. 전국 교직원 노동 조합과 인권운동사랑방등 시민사회단체도 함께했다.
종교학교 전체에 대해 종교의식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고, 교육인적자원부를 대상으로 학내 종교활동의 예배 선택권 보장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의석이에게 말했다.
"의석아, 혼자 모든걸 짊어지려고 하지마, 우리가 있잖아"
 
단식을 풀다. 세상을 변화시킨 고교생
 
시작은 6월 16일이었다. 대광고 강의석은 교내 방송을 통해 '학내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며 '예배불참'을 선언한다. 당연히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그로부터 100일이 9월 24일 강의석은 '임시학생'이라는 애매한 지위에서 단식 45일째를 맞고 있다.
 
교내 방송을 통해 '종교 자유'를 요구하기 3일 전 강군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종교에 관한 수필을 남겼다. 이 글에서 강군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지니는가?"라고 자문한 뒤, "대한민국 헌법은 '예'라고 답하고 있다"고 자답한다.

강군은 "의무적인 종교교육 이수 제도는 없어지고 원하는 학생들이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교과과정으로 변화돼야 한다"는 결론으로 수필을 맺는다. 강군은 "이런 작은 결론이라도 깊은 갈등을 품고 있는 세상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강군의 '100일간 투쟁'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개신교 학교의 선교 자유 역시 중요하다'며 여전히 강군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가 '학내 종교의 자유' 문제를 공론화 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저녁 7시 시작된 대광고 관계자와 강군 측과의 논의는 3시간째 진행되고 있다. 과연 강군의 외로운 투쟁이 우리 사회에 자리잡고 있던 또 하나의 '성역'과 '금기'를 깰 수 있을지, 힘겨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강의석이 단식을 풀었다. 간절히 원하던 '예배선택권'도 보장받았다. 교내방송을 통해 '학내 종교의 자유' 문제를 제기한지 101일, 단식을 시작한지 46일 만의 일이엇다.

"예배 거부 학생에 대한 대체활동계획을 강구하여 재단, 교단과 기독교 학교 연합회와 협의를 거쳐 빠른 시일 안에 실시하기로 한다."

"대체활동계획이 수립되어 유관 기관과 협의 결정하기 전까지는 담임교사와 교목실의 상담을 거쳐 학부모의 동의를 얻어 개별적으로 지도한다."


강군과 대광고 기독교 교육문제 대책협의회(이하 대책위) 합의 결과다. 재단과 교단, 기독교 학교 연합회의 협의라는 단서 조항이 남았지만, 강군과 대책위 교사들은 문제 해결을 낙관하고 있다.

23일 저녁 7시부터 시작된 최종 협의는 자정을 훌쩍 넘겨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진행됐다. 협의가 진행됐던 강군 자택에서는 "의석아 너도 살고, 학교도 살자"는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호소가 이어졌다.

묵묵히 필답으로 답하던 강군은 "예배를 거부하고 대체활동을 하는 학생이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누차 강조하고 단식 중단을 결정했다. 오랜 단식으로 기력이 쇠해진 강군은 곧바로 쓰러져 잠들었다. 강군 부모는 날이 밝는 대로 강군을 인근 병원에 입원시킬 예정이다.

"치킨이라도 시켜 선생님들하고 먹어야겠습니다."

강군 아버지 강재정씨는 그간 겪었던 심적 고통을 쉽게 털어놓지 못했다. 가출한 강군을 데려오던 길에서도 "의석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는다", "훌쩍 어른이 돼버린 의석이가 대견하다"고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던 강씨는 막상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는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보인다.

'나는 바보야'라는 말을 읊조리곤 했던 '바보 강의석'. 그 '바보'가 결국 우리 사회에 지극한 상식 하나를 온 몸으로 일깨워줬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항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그것은 종교학교라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강군은 헌법상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찾기 위한 싸움에 나서면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지켜주지 않는다는 법치국가 대한민국. 우리의 노력은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한 하루입니다."

 
교육인적자원부도 강의석의 손을 들어주었다. 다음해부터 종교학교에서 학생들을 강제로 종교집회에 참석시키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지침을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단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101일간의 사투, 46일간의 단식...한명의 고교생의 목숨을 건 투쟁은 결국 세상을 변화시켰다.
 
강의석 사건의 의미 그리고 그후의 이야기
 
2006년 5월 24일 서울시 교육청은 사립 중고등학교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지침을 전달했다.
 
가. 종교 과목 개설시 종교 이외의 과목을 포함해 복수로 편성
나. 학교나 학년 단위로 한 곳에 모여 특정 종교의식 실시 금지
다. 특정 종교의 의식 활동을 교과 내용에 포함한 지도 금지
라. 정규 교과 시간 외 종교 활동 실시 시 학생의 자율적 참여하에 실시
마. 창의적 재량활동 시간에 특정 종교 교육 금지
바. 특별활동 시 특정 종교 활동 제시 금지
사. 수행평가 과제로 특정 종교 활동 제시 금지
아. 학급 내 순번제로 돌아가며 종교 관련 의식 행사 금지
자. 종교로 인한 차별 금지 사항
- 학생회 임원 출마 자격 제한
- 의식 행사 불참자에 대한 개별 상담 지도 및 특별 면학 지도 등

 
이 지침에 따르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기독교사학에서 기독교 관련 과목을 개설하기 위해서는 불교나 이슬람 등 타 종교에 대한 과목도 함께 가르쳐야만 한다. 또 학내에서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도 제한된다. 기독교적 특별활동 시간도 금지되며 학내 예배에 학생이 불참하는 것도 허용된다. 이런 지침때문에 종교 사학들은 "학교의 설립이념은 어디간 것이냐" 라면서 반발하고 있다. 반대로 이런 종교재단들을 향해 "학생들을 전도하려면 학교를 세울 것이 아니라 교회나 절, 성당을 세워야 한다" 고 말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이 같은 결정이 나온 것도 2004년 강의석 사건의 결과다.
 
강의석이 벌인 '101일'간의 싸움 46일간의 단식투쟁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았다. 조금이나마 세상을 변화시킨 고교생 강의석군이 요구한 것은 특정 종교에 대한 비난도 아니었고, 학교에 종교수업을 완전히 금지시켜달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학생들이 예배를 선택할 수 있도록,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하는 최소한의 종교 자유를 강의석은 요구했다. 강의석의 싸움은 '기독교'를 향한 싸움이 아닌 종교를 초월한 기본적인 원칙. 헌법에 보장된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간직해야할 '종교에 대한 자유. 그  원칙을 이야기 한 것이다. 언론도, 정치인도, 사회도 고교생인 강의석에 의견에 처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오히려 강의석을 나무랐다. 강의석에 주장에 동조의견을 표했던 류상태 목사는 직위해제를 당했고, 교직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강의석은 부모님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사회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싸움에서 승리했다.
 
 2005년 1월 21일 강의석은 퇴학무효 소송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같은해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그러나 강의석의 종교자유를 위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예배선택권을 허용하기로 했던 서울 대광고등학교는 강의석이 졸업한 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학생들에게 특정종교를 강요하고 있다. 강의석은 아직도 종교재단 사립학교들과 '종교자유'를 위한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대학내 종교자유 문제도 함께 다루고 있다. 2006년 5월 20일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는 '학내 종교 자유를 위한 촛불 문화제'가 열렸다. 고교생들 뿐 아니라 대학생들도 다수 참여했다.
 
고등학교에서 시작한 종교자유 운동은 대학교로 번져나갔다. 대학측의 입장은 대학은 "학생들이 선택했기 때문에 채플 실행에 있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고 말하고 있다. 학생들이 대학을 선택한 것은 맞다. 그러나 대학의 종교를 함께 선택한 것은 아니다. 시험 성적과 원하는 학과를 선택한 것이지 학교의 종교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강의석의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중고등학교 뿐 아니라 대학의 종교자유 운동을 시작했다. '바보' 강의석, 나의 친구 강의석에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바보' 강의석의 용기는 누구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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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6/10 [23:1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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