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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는 중상층의 낙원, 철거민은 그냥 떠나라?
[현장2] 개발양극화 전시장으로 변한 판교, 거주권 보장없이 정의는 없다
 
김기대   기사입력  2006/04/11 [15:45]
판교 택지개발에 사회정의는 없었다

판교 개발 관련 1차 기사가 나간 후 6일 오전 철거민들중 일부가 머무르고 있는 분당 아름마을 뒤편의 노천극장을 찾아가 도행기 위원장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 판교주민생존권대책위원회 도행기 위원장. 그는 판교주민 총연대 의장이 되었다고 했다.     © 김기대

그동안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판교주민생존권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맞고 있던 도 위원장이 남아 있던 8개 단체의 인정을 받으며  총연대 의장이 되었다고 했다. 2월 중순부터 22일간 성남 시청 앞에서 단식투쟁을 한 전임 최봉기 의장의 뒤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 동판교 지역에 있는 노천극장 전경. 옆으로 존치허가가 난 교회건물이 있고 건물 뒤로 보이는 비닐하우스 처럼 생긴 곳은 문화재 발굴현장이다.     © 김기대

또 하나의 변화는 노천극장의 주 진입로라 할 수 있는 아름마을에서 들어오는 도로가 차단된 것이었다. 이 길은 수서-분당 간 도시고속도로에서 판교 IC로 빠지는 지름길로 이 길을 아는 사람들은 많이 애용하는 교통량이 제법 많은 도로였는데, 약 두 달 전쯤부터 폐쇄되었다고 한다.
존치허가를 받은 인근의 교회에 출입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름마을 편에서 래왕하는 사람들에게는 출입에 다소간 어려움을 주고 있는 셈이었다.

노천극장 바로 곁의 진입 도로의 폐쇄는 마치 철거민들에 대한 우리사회의 소통과 정의가 저기에 멈추어선 것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 노천극장의 한쪽 진입로가 우리사회의 막힌 소통채널처럼 봉쇄되어 있다.     © 김기대

'판교 로또'라 불리는 우리사회의 신흥 돈잔치, 투기잔치 속에는 한국사회의 모순구조가 복합적으로 잘 노출되고 있었다. 수도권 노른자위 땅에서의 대규모 개발이기에 우선 투기라는 말이 빠질 수가 없었다.

돈 냄새를 맡은 우리사회의 지도층, 여유있는 사람들이 한껏 개발이익을 챙기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자리에서 애꿋은 철거민들이 생존권을 강탈당한 것만 해도 억울한데 마치 투기꾼이나 과도한 보상을 원하는 한탕주의자들처럼 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 구판교 지역에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 김기대

판교 로또의 일차 행운자는 남들보다 앞선 정보력으로 일찍이 돈냄새를 맡고 이 땅에 투기한 외지인들이라 할 수 있었다. 토지보상시 약 70%, 건물주의 약 2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외지인들은 론스타처럼 큰 수익을 챙긴 채 먹튀처럼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것이다.

2차 행운자는 거대한 땅장사에 성공한 사업 시행자들이었다. 땅을 매입하는 것은 공영개발이라는 미명으로 강탈하다시피 헐값 매입을 하여 오를 대로 오른 주변 지역의 시세에 맞춰 팔아 최고의 시세차익을 남긴 개발시행자들이었다. 지난 해 발표한 경실련의 16조 3천억원이란 판교개발이익이 최근의 분양과정에서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경실련 분석에 의하면 정부나 공기업도 10조의 차익을 남기고 있었다.

3차 행운자들이 바로 언론사에서 많이 떠드는 새로운 주거민들이 될 분양담첨자들인 것이다.

개인별 수 억대에서 시행사 측은 수 천억을 거쳐 10조의 시세차익을 올리는 돈놓고 돈먹은 거대한 돈잔치판을 벌리기 위해 어렵게 살던 이곳의 영세 주민들은 생계대책도 없이 그냥 내쫓겨나야 했던 것이다. 판교개발 양극화의 한 단면인 것이다.

판교가 다른 개발지역과 달리 문제가 심각한 것은 이 지역 고유의 독특한 점이 있어 한국사회 택지개발 문제의 모순을 잘 노출시켜주기 때문이다. 양극화의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도덕적, 사회적 모순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이 지역은 박정희 시대인 1976년도부터 수도권 남단녹지지역으로 지정되어 어떠한 개발도 사실상 용인되지 않아 수도권에서는 잘 보기 힘든 낙후지역이 되었다. 비새는 천장이나 재래식 화장실도 수리 못 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도권에서 노른자위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여건은 70년대 초의 읍면 지역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 판교 삼평동 마을 사진. 판교지역은 이렇게 70년대 식의 낙후된 생활환경 속에 있었다.     © 김기대

이런 상황이기에 수도권의 비싼 땅값을 견디지 못한 영세 농민들이나 직장인 및 공장주들이 이곳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게 된 것이다. 보증금 300~500만원에 월세 10~20만원으로 방 2개 정도를 세얻어 살던 주민들이 바로 이들 대다수의 철거민들이라 한다. 수도권 지역에서 이 정도의 돈으로는 거주지를 꾸리기는 힘든 것이다. 농막을 치고 살던 농민과 공장주 등의 사정도 비슷한 맥락이라 한다.

이들이 판교개발계획의 희생자들인 셈이다. 판교지역이 70년대부터 개발제한 지역으로 묶이고 1997년에는 토지형질변경제한에 따른 건출물 신축금지 등이 이어지면서 지역주민들은 근 30년 가까이 자유재산권을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집수리도 못하는 상황에서 행복한 주거권 등은 사치에 불과했다.
 
▲ 삼평동 지역 현장 사진. 70년대부터 개발억제된 판교주민들의 삶은 이렇게 열악했다.     © 김기대

이런 이들이 늑장을 부리다가 강행된 개발계획의 희생자가 된 것은 지체되던 개발에 지친 땅주인과 건물주들이 관계 당국에 조속한 개발요청을 하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땅보상으로 큰 개발이익을 챙기게 된 지주들과 건물주들은 개발에 따른 세입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며 함께 하지 않았다. 그들은 먹튀처럼 개발보상금을 챙기고 사라져간 것이다. 세입자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다.

우리사회의 공동체 의식이 여기까지 였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민간 단절의 문제의 상당부분은 지주와 건물주들 다수가 외지인들이었던 것도 한 몫을 한 셈이었다. 또 일부 건물들은 낙후된 지역에서 흔히 그러하듯 무허가 건물이나 무허가 농막인데 노태우정권 당시의 규정과 양성화 시점의 규정에 묶여 가장 피해가 큰 무허가 건물주와 세입자들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건설교통부(아래 건교부), 주택공사, 토지공사, 성남시, 경기도 등 시행사 역시 공영 개발과정에서의 문제를 조정하여 조화롭게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정신에 투철한 자신들 기관의 이익 극대화와 타지역 보상과 연관된 도미노 효과를 우려하는 관료주의 등도 판교사태의 복잡성을 더하게 했다. 일제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강탈적 수용 방법과 현실성 없는 열악한 보상을 하며 강압 및 회유를 병용하는 시행사측의 철거민 문제 해법은 비단 판교지역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지만 문제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건교부를 포함한 시행사측은 개발을 하며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거주대책을 체계적으로 세워주기는커녕 난립하는 무허가 세입자와 건물주 및 공장주 단체 등 판교 주민 단체를 분할통치 식으로 은근히 몰며 각개격파를 시도하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개발과정에서 우후죽순 식으로 난립한 판교주민 위원회 역시 개발시행 주체들과 대표성 있는 책임있는 대화를 하기 어렵게 했다. 공영개발 주체들이 주민통합을 유도하여 대표성 있는 사람들과 책임있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면 보다 순조롭고 조화로운 축복받는 공영개발이 될 수 있었지만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아 있는 철거민들 문제의 핵심은 두어 가지로 압축되어 있었다. 도 의장을 중심으로 한 판교주민생존권대책위원회는 구성원들이 대부분 무허가 건물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로 시행사로부터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삼평동 쪽에 있던 '판교세입자 참모임' 경우는 소위 '딱지'라는 아파트 입주권이란 보상을 받았지만 보증금이 1억 5천 만원을 넘어가고 월세가 관리비를 포함하여 60만원 ~1백만원에 육박하는 입주는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보증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주공의 입주권(임대 보증금이 5,664만원)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보증금을 낮추어줄 것을 건교부 측에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입자 자격문제로 부딪치고 있었는데, 시공사 측은 공람공고일(2001년 10월 17일) 이전 3개월 전부터 거주하던 주민만을 자격자로 보는 반면에, 주민들은 시행사측이 현장 실사를 할 당시(2002년 초 실시) 거주민으로 확인된 사람들 모두에게 자격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모두가 나름대로는 일리가 있기도 했으며 동시에 재산권과 관련되어 다소간 무리한 요구로 해석될 부분도 있었다.
 
▲ 철거된 판교지역 주민들의 삶의 흔적은 이렇게 한줌의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 김기대

딱지라는 분양입주권를 받은 판교세입자참모임 회원들의 경우 영세하게 낙후된 지역에서 세들어 살던 사람들 입장에서 판교의 아파트 입주권을 받았다고 해도 갑자기 이들의 소득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파트입주는 사실상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현실성 있게 아파트입주 보증금을 낮추어달라는 요구는 분명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건교부는 그러한 요구를 재산권 증식을 위한 과도한 요구로 보며 충돌하고 있었다.

딱지를 받지 못한 무허가 건물에서 살던 세입자들은 처지가 더 딱한 경우였다. 가난했기에  싼 집에 살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 주거지가 무허가일 수 밖에 없었는데, 단지 무허가 건물에 세들어 살았다는 이유로 다른 세입자들이 받는 보상을 받지 못하니 당사자들은 나름대로 억울해 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에는 소년소녀 가장들도 있어서 더욱 딱하게 느껴졌다.

이들 무허가 건물 세입자들의 경우는 억울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과거에는 무허가 건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양성화하여 건물허가를 받을 수 있었는데, 1989년 조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양성화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무허가 건물 세입자들은 법규정상으로는 보상받기가 어렵게 되어 버린 것이다. 산천이 두 번 바뀐다는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무허가 건물에 대한 양성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 지역 세입자들은 그대로 불법 무단 거주자로 되어 장기간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건교부는 노태우 정권 당시인 1989년 시행된 토지보상법(정식명칭은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시행령 부칙 제 5조 (무허가 건축물 등에 관한 경과조치)을 이유로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외면하고 있다고 철거민들은 주장했다.

이 조치에 의하면 '1989년 1월 24일 당시의 무허가 건축물 등에 대해서는 ... 보상을 함에 있어 이를 적법한 건축물로 본다'는 규정이 있는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다수의 영세민들이 땅값과 주거비용이 싼 이곳 판교지역으로 흘러들어와 무허가 건축물을 지어 살며 그 속에서 생계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과거 노태우 정권 당시의 규정과 시점을 고수하면 대부분의 철거민들에 대한 대책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내용이 철거민들을 붙잡고 있었다. 도 의장은 크게 보아 노태우 정권 당시에 제정된 이 시행령만 정부에서 고쳐주어도 철거민들의 문제는 크게 개선된다고 했다. 하지만 건교부 관계자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하고 개선의 조치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판교철거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소급적용이 어렵기 때문이다.
 
▲ 수십 조 원이란 개발이익금을 주민에게 환원할 것을 요구하는 철거민들의 현수막. 노천극장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 김기대

문제는 이렇게 얽혀 있는 것이다. 이들 철거민들은 거의 20년 가까이 손보지 않은 낙후된 관계규정에 의해 불법건축물에 거주하던 주민이지만 분명하게 대한민국 국민이고 납세자였다. 납세와 국방 등 국민적 의무를 다 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단지 양성화되지 않은 무허가 건물에 살고 있었다는 죄 아닌 죄로 정부로부터 불법이민자처럼 대우받으며 쫓겨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14조에는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또 헌법 제 23조 ③항에는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 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관계 법령에도 분명하게 보상 규정이 명문화되어 있었다.

이들의 재산과 거주권은 분명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지만 판교 주민은 분명한 것이다. 단순히 거주하던 가옥이나 농막 등이 정부허가를 얻지 못했다고 주민이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하기에 시행사측도 이들에 대한 보상을 전혀 외면하는 것은 아니며 어느 정도 보상의지를 갖고 있었다.
 
▲ 동판교 지역의 노천극장 바로 뒤켠의 야산에는 문화재 발굴현장이 있었다. 비닐 천막 안에서 문화재 발굴작업을 하고 있었고 판교주민 일부가 이 사업에 부업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 김기대

문제는 건교부와 시행사측의 인식인 것 같았다. 토지수용 방식은 일제의 강제 수탈 방식을 이어받은 변형된 공공방식인 반면에 아파트 분양 등 판매방식은 신자유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시장논리에 따르는 이중성이었다. 경실련 자료에 의하면 토지 강제 수용 당시의 매입은 평당 88만원으로 시장논리를 외면한 반면에, 분양 시의 평당 가격은 1100만원~1500만원으로 엄청난 땅장사를 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시행사측이 철거민들을 보는 눈은 가난하게 산 사람들은 계속 가난하게 사는 것이 맞다는 것이며 그것이 정의라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거주민들의 거주 이전의 자유는 무시되었고, 개발된 판교는 중산층의 낙원이기에 철거민들이 살 곳이 아니기 때문에 철거민들은 개발이전의 경제적 수준에 맞는 곳으로 수평이동하여 다른 지역에서 동일하게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헌법적 권리와 법적인 권리 부분이 찝찝하게 와닿고 또 엄청난 땅장사 의혹 부분이 있기 때문에 기존의 몇 십만원의 이사비에 몇 백만원 정도의 대출금 지원 등을 넘어서는 제안을 철거민들에게 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행사 측의 문제는 판교지역에서 살던 철거민들이 자신들이 살아왔던 지역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거민들은 더 이상 노른자위 땅이 되어 시장가격이 폭등된 판교지역에서 살 수 없다는 대원칙을 시행사측은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상과정에서 철거민들의 생계대책에 대해서도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이런 문제점을 뒤늦었지만 인정하며 건교부에서도 토지수용 때 시가보상 검토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보상 때 생계대책 등도 다양하게 보장되는 이른바 ‘맞춤형보상제’가 제시되며 연기공주 지구의 행정도시에 시범적용할 예정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판교의 철거민들은 주거와 생계에 대한 대책이 필요한 것이다. 비록 무허가건물에서 살았지만 이웃의 도움으로 살아온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월세 200만원 지원으로 성남 구시가지에서 방을 얻어살아라는 대책은 전혀 인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 판교 구시가지 지역의 최근 사진. 노란색의 투쟁 현수막이 곳곳에 보인다.     © 김기대

경실련 발표에 의하면 판교 공영개발에 의해 시행사들은 16조원이 넘는 엄청난 수익을 남겼다. 이 수익금의 일부라도 이들 철거민들에게 쓸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건교위 관계자들은 판교에서 철거민들에게 특별 우대하면 다른 개발지역에서도 동일한 요구를 받게 될까봐 크게 우려하며 철거민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다. 과거의 개발관행과 미래의 원할한 사업수행을 위해 특정 지역만 배려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동일한 회사나 수도사업 등에서도 독립채산제라 하여 지역이나 프로젝트별로 독립된 회계를 하기도 하는데, 개발지역이 달라 상황이 다른데 동일한 잣대로 시행하면 일부에서는 분명 비현실적인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판교가 그 좋은 예가 되는 것이다. 엄청난 수익이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지의 댐수몰 지역의 보상과 동일한 열악한 보상을 하며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내쫓고 있는 것은 분명 부당한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의 정의를 말하며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수혜를 하며 정의를 인정받는다는 존 롤스(John Rawls)의 최소한의 정의도 여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은커녕 가장 많은 불이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판교에서 정의는 철거민들의 파괴된 가옥처럼 파괴된 셈이다.

투쟁을 하는 철거민들중에도 분명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고 도 위원장도 인정하고 있다. 엄정하게 선별과정을 거친 청와대 관료도 살인자가 있는 시대인데 자연적으로 모인 주민집단에 어찌 이상한 사람이 없겠는가? 하지만 판교지역의 경우는 다른 개발지역과 같은 그런 과도한 경우는 없다고 했다. 그런 과도한 경우는 행정 운영의 묘를 통해 걸러내야 할 일이지 철거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투기꾼처럼 매도하며 내몰 일은 아닌 것이다.   

시공사가 판교개발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세입자 등 철거민들에게 제공되는 보상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믿기에 철거민들은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정의없이 평화없다(No Justice, No Peace)란 말은 구미사회의 투쟁현장에서도 흔히 보는 일이다.
 
▲ 삼평동 지역에 있는 세입자 임시 사무소. 8일 오후 인근의 사송동 입구 쪽으로 컨테이너를 옮겼다.     © 김기대

판교세입자 참모임은 4월 11일 건교부 앞에서 시위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날 시위에는 판교주민생존권대책위원회는 참여하지 않는 것 같다. 주민간에도 서로간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 반목하는 면도 있는 것이다.

시행사 따로, 주민 따로, 또 주민간 따로 각자의 팔 자유로 흔들 듯이 하며 철거민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혼미를 거듭하고 있고 이 와중에서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선의의 피해자가 생겨 고통을 받는 것이다. 이 모든 혼란은 제도의 불비로 인한 일이다.

시행사를 관리감독하는 건교부는 형식적인 제도개선이 아닌 현실적인 제도화를 강구해야 한다. 제도화가 뒤늦은 것은 근본적으로는 일제시대의 약탈적 철거방식을 약간 개선시켜 해왔다는 점이다. 과거보다는 많이 개선되었다지만 택지개발사업은 근본적인 제도개선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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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4/11 [15:4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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