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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과 소통, 민중없는 시대의 소수정치
『들뢰즈 맑스주의』, 니콜레스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5
 
벼리   기사입력  2006/02/07 [22:00]
<민중이 없다>(Deleuze, Cinema 2: The Time-Image, 216). 그와 더불어 위대한 세계사적 가능성 하나가 몰락한다. 민중을 중심으로 엮어진 모든 담론들과 문건들이 휴지조각이 된다. 베를린 장벽과 소비에트 붕괴 이후 동일한 악몽이 밤마다 출현한다. 깨진 거울 속의 균열. 동일성의 사지가 찢겨 나간다.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지옥편. 거대한 대열을 형성했던 민중의 기념물들이 목이 잘리고 거리에 나뒹군다.
 
니콜레스 쏘번은 이 모든 끔찍한 전사(前史)들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논법에는 어떤 회고나 섣부른 희망이 없다. 끝장난 역사에 대한 연민을 흘리지도 않는다. 차라리 민중이라는 재현적 형상을 애초부터 떠받치고 있던 하나의 주제 즉 ‘삶’과 ‘소수자’ 그리고 ‘코뮤니즘’으로 복귀한다.
 
<민중이 없다는 것은, 그러므로 푸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민중이라는 사회-정치적 형상이 최상의 경우에는 흘러넘치고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 정치를 종말에 이르게 한다는 주장이다. … 그래서 정치는 민중을 재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 도래할 민중’을 창조하는 과정으로 된다>(80).
 
여기서 ‘도래할 민중’은 몰락한 옛 민중이 아니다. 이것은 소수정치의 주체며 그것은 몰적 재현의 운동을 거부한다. 매 순간 구체화되는 자본의 포획망을 횡단하는 소수적 주체는 그러므로 항상 배회하는 빈자리와 같다. 도래할 민중은 자본으로 둘러싸인 이 갇힌 빈 공간에서 교전(engagement)하며 매번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고 자신을 갱신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어떤 소통이나 표현의 문제는 아니다. 갇힌 공간 안에서 정치는 필연적으로 소통과 표현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삶과 노동이 자본에 의해 포위된 맥락에서 언어와 소통에 어떤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기만인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자본주의에 의해 생산의 단순한 도구로 환원되며 그리하여 이해가능성이라는 기준들 내부에 코드화되고 감금된다>(Collectif A/traverso 1977: 109~10, 358). 따라서, <소수정치의 문제는 ‘우리가 충분히 소통하고 있는가?’ 혹은 ‘우리 모두가 듣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상이한 질서의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리고 지배적 형식들이나 주요한 형식들을 탈영토화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창조하는가?에 관심을 갖는 문제이다>(87).
 
이러한 소수적 구성과 창조는 물적 방식이 아니라 분자적 방식으로 팽창하며 산개한다. 작은 변칙들과 계략들이 유용해진다. 구체적 맥락에서 소수 정치는 하나의 술어화된 몸체로 정지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임(is)’의 운동이 아니라, 항상 재개되는 다양체 즉 ‘~ 그리고(and) ~’의 방식으로 운동한다. 반목적론적이며 사이존재적인 주체로서의 소수자들은 그러므로 <혼성적이고 언제나 다른 이접들과의 순열조합 관계에 개방되어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소수정치의 특징적인 면모는 어디에서 있는가? 
 
▲『들뢰즈 맑스주의』, 니콜레스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 갈무리, 2005
쏘번은 들뢰즈를 참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정치적 과정을 시작하는 것은 동시대적 문제들이며 더욱 분명한 문제들이다>(105). 다시 말해 정치적 개입의 지점은 어떤 거대담론에의 참여나 역사적 논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수정치는 줄곧 교조에 빠져 굴락과 수용소로 근근이 버틸 수밖에 없던 상황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하나의 맥락, 현실적 개입이 중요하다. 그것이 동성애 문제이건, 이주 노동의 문제이건 자본이 포획하려 하지만 좀체 걸려들지 않는 취약한 지점이 먼저다. 따라서 소수정치는 상당할 정도로 <실리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실리적인 과정은 그러나 손익계산식의 고립된 단순작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포획망을 성공적으로 탈주한 소수정치의 선은 교전의 책략들을 발휘하면서 다른 탈주선들과 조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쏘번이 말하는 소수정치의 두 번째 면모다. 이때 맑스의 ‘모순’ 개념은 전진적으로 대체된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종종 ‘모순’의 우선성에 대한 맑스주의의 긍정과는 달리 탈주선의 우선성을 제시한다>(106).
 
그러나 이것이 맑스의 개념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다. ‘탈주’는 ‘모순’ 개념 이전에 규정력을 가지는 개념으로 제시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란 <탈주선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매우 변형적인 사회체제>이며, 그것의 본질은 <착취의 새로운 영토를 열어젖히기 위해서, 그것이 지속적으로 그것의 탈주선들…을 해방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107). 그러므로 소수정치는 ‘해방의 기획’이라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탈영토화와 탈주들에 <달라붙어>, 그것을 더 멀리까지 가져가는 것이며, 이때 코뮤니즘은 ‘획득’의 관점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공명’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소수적 형상으로서 자본주의적 탈주선, 그리고 자신과 조우하는 삶의 탈주선과 교전하는 하나의 계급구성양식이며 코뮤니즘은 이러한 <교전의 양식과 스타일의 수준에서 작동>하게 된다(109).
 
여기서 고전적인 문제 하나가 등장한다. ‘당’의 문제가 그것이다. 쏘번에 의하면 맑스는 당을 <특수한 역사적 경험들과 운동들을 통해 발전하는 일단의 경험, 실천 그리고 지식이 발전해 나오며, 이와 동시에 특수한 경험을 초월하고 또 이 운동들의 여러 측면들에 비판적 태세를 유지할 수 있는 한편, 특정 순간들에는 투쟁의 촉진자로 작동하고 있는 그러한 평면>으로 이해했다(133).
 
여기서 쏘번이 방점을 두는 것은 ‘비판적 태세’라는 테제다. 당은 자본의 갇힌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계열들을 발산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당이 가지고 있는 레닌주의적 모델에 균열을 가져온다. 레닌주의 모델은 점차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활력을 흡수하면서 그 기관들을 잠식한다. 활력을 상실한 당은 암적이다. 그러나, 비판적 태세는 어떤 아나키적 심성을 유지하면서, 당을 장악하고 있는 ‘중앙위원회’의 분자화를 획책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당을 때 이른 죽음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투쟁주기 안에서 기능을 마친 당은 이러한 소수정치의 작은 계략들에 의해, 그렇지 않을 경우에 자본으로부터 면역력을 상실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타락하지 않고 다음 전략적 변모를 꾀할 수 있기조차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소수정치는 자기비판의 기능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실험’의 장이 될 수 있다. 논쟁과 책략은 이 실험을 하나의 목적으로 이끄는데 치중하기보다 들끊는 교전의 장으로 만든다. 여기서 주체는 ‘중앙’이라는 검은 구멍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면서 소멸된다. 주변을 떠도는 특이한 정동들과 탈주선들은 교전 속에서 고착되지 않고 갱신되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대지’의 호출 속에서 ‘누구나/모든-것 되기’로 바꾸려고 하>는 들뢰즈의 맑스주의라고 쏘번은 강조한다(143).
 
노동의 문제는 이 교전 상황에서 관건적이다. 이제 그 누구도 ‘노동’에 의해 스스로를 결정화하지 않는다. 노동은 인간주체의 자본주의적 본성이기를 그친다. 노동은 처음부터 이중적이다. <노동이, 확장적이고 변이하는 사회적 유기체 속에 병합됨에 따라, 인간이 탈영토화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동시에 자본의 재영토화하고 재코드화하는 메커니즘이다. 즉 그것은, 다양한 관계들이 … ‘노동자’라는 몰적 형태로 변환되어 잉여가치의 추출을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이다>(167).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은 자본주의 공간의 산물일 뿐 <미리 주어진 동일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와 동일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소수정치가 자본의 기능적 착취 메커니즘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이라는 인위적인 규정성을 벗어버려야 한다. 노동거부. 쏘번은 이 주제를  룸펜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그 특유의 분석을 거쳐 이탈리아 오뻬라이스모 그룹의 이론으로부터 가져온다.
 
노동거부를 통해 적극적으로 교전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이라는 규정으로부터 자유롭다. 다시 말해 그의 정동과 지성은 중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쏘번은 <이름 붙일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주체규정이 맑시즘의 먼 외곽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민중이 없는 ‘갇힌 상황’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삭제하길 바란다. 맑스가 예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자기폐지운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사실상 프롤레타리아트의 비밀은 이와 같다. 역사적 책무라는 소화불량에 걸린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멸을 꿈꾸기보다 자기유지에 더 많은 에너지를 낭비할 것이다.
 
그러나 실천이란 혁명적일수록 더 가벼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동일성의 유기체로 굳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실천이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 노동거부는 그러므로 단지 일단의 실천들로서만 이해되지 말아야 하며 노동 속의 어떤 충만함 또는 노동 속의 주체에 대한 거부의 메커니즘으로서, 노동과 그것의 동일성에 대항하는 지속적 교전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307). ‘지속적 교전’으로 구성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때 <추상적 강령>의 수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거부를 통한 <구성의 양식>을 자신의 책략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성의 양식’이라는 특유한 규정에 프롤레타리아 지식인 집단의 오래된 헤게모니가 파열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레닌주의 조직화 모델의 비판이기도 하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상화하고 일군의 전위집단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되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구성’이라는 관점에서는 폐기되어 마땅한 것이다. 계급은 이때 어떤 매개나 ‘교육’ 따위를 거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급구성은 결정적으로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고, … 하나의 구성 과정 혹은 구성 양식을 지시한다>(315).
 
대자 계급으로의 발전행정은 구성 과정 상 하나의 사소한 변화일 뿐이며 일률적으로 적용되지도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박제화된 자본주의적 주체임을 그침과 동시에 자기구성을 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한 전통적인 모델이 붕괴한다. 즉 자본형성을 중심으로 두고 투쟁과 역사를 바라보는 교조적 유물론의 관점이 그것이다. 이 모델이 붕괴하면 관점은 극적으로 역전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주기가 자본의 대응을 야기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쏘번은 이러한 관점의 역전과 계급구성론을 소수정치와 자율주의의 핵심적인 두 항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계급구성 모델과 관점의 역전의 모델은, 체제의 핵심에 불안정성을 놓음으로서, 그리고 정치적 발명, 연합, 그리고 저항의 메커니즘과 장소들을 지속적으로 발견할 필요를 강조함으로써, 이것들을 시간초월적인 프롤레타리아적 실천들로 제시함이 없이, 자본주의 동학과 정치(학)에 대한 어떠한 객관주의적 해석도 깨뜨리는 이점을 갖고 있다. 투쟁이 당대의 자본주의적 공리계와 동력학, 그리고 그것들의 탈영토화 과정과의 교전을 통해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그것은 구성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 생각이다>(317).
 
이와 같이 쏘번은 들뢰즈와 오뻬라이스모를 경유하여 소수정치의 가능성을 ‘교전’과 ‘갇힌 공간’이라는 테제 안에 압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에 있어서 이론이란 하나의 삶 속에 펼쳐지는 교전의 한 양상일 뿐 모든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한 색채를 띠면서 다가온다. 그것은 네그리와 하트도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 것이다. 기쁨의 정동. 정치(학)은 결론적으로 이 정동의 개발에 대한 스피노자적 관심과 실천을 필연적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쏘번은 네그리, 하트가 가지고 있는 충만한 낙관주의보다 P. 비르노가 가지는 조심스러운 전망에 더 가까워 보인다. <소수정치(학)은 갇힌 공간, 작은 계략, 그리고 내밀한 탈영토화의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대지’와 ‘도래할 민중’을 불러내는 일종의 ‘불가능한’ 기획이다. … 즉 정치를 ‘부재하는’ 민중의 극들과 ‘새로운 대지’ 사이에 위치시킴으로써, 소수정치(학)은 그것의 불완전성, 그것의 어려움들, 그리고 그것의 ‘불가능성들’과 더불어 살 수 있고 또 심지어 그것에 의해 키워질 수 있는 정서적 조건을 발전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하나의 환경으로, 즉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베케트의 명령이 삶의 긍정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환경으로 발전한다>(395).
 
한 가지 부언. 쏘번의 이 책에서 우리는 앞서 밝힌 그의 소수정치에 대한 활달한 이론뿐만 아니라 네그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도 주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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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2/07 [22:0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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