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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대주의, ‘글로벌 스탠다드’
[홍기빈 칼럼] 새로운 점령군 신자유주의, 사회적 의제로 쟁점화 시급
 
홍기빈   기사입력  2005/10/28 [11:53]
'글로벌 스탠다드'와 '사대자소(事大字小)'

김영삼 정권 이후 오늘까지 10년 넘게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 구조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적 의제들을 현실화해 왔다. 그리고 노동시장 유연화, 법인세 인하, ‘주주 자본주의’ 지향의 금융 개방 등의 예에서 보듯, 그러한 의제들은 늘 사회적 부의 분배 구조를 크게 바꾸고 서민들의 생존, 나아가 나라 경제 전체의 건강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이렇게 예민하고 중요한 의제들이 그와 관련한 여러 사회집단들 간의 본격적인 정치적 논쟁거리로 등장한 적이 있었던가. 우선 이러한 의제들이 각급 선거의 중심적인 쟁점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그리고 막상 자기 의사를 표명해야 할 사회집단들의 목소리는 그에 마땅한 사회적 관심을 얻지 못했다.

올해 벌어졌던 비정규직 노동법안 소동을 기억해 보라. 그 법안을 통하여 '보호'받기로 되어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예 자신의 조직조차 갖추지 못한 실정인데, 노동부 장관과 여당의 일부 국회의원들은 그들의 열화와 같은 반대를 모르쇠하고서 자신들의 법안이야말로 그들에게 최선이라고 강변하는 진풍경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최근의 법인세 인하 논란은 어떠한가. 그런 정책이 세수의 감소를 대가로 극소수 대기업의 이익을 옹호할 뿐이라는 비판에 어느 한나라당 관계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누구에게 감세의 혜택이 돌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큰 시장-작은 정부'라는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말이 실로 의미심장하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과연 자신을 솔직하게 ‘이념’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반대 목소리와 논쟁을 벌여 사회 성원 전체에 걸친 폭넓은 '동의'를 얻어낸 적이 있었던가. 혹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스탠다드'(국제 표준화)라는 전혀 다른 존재방식으로 우리 사회를 점령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이 개명한 21세기의 교양있는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따라야 하며, 아예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적인 지상명령이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 해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우리 사회와 성원들의 물질적·정신적 안녕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만한 의제들마저도 민주적인 토론 한번 거치지 않고 일사천리로 현실에 관철시켜온 것이 지난 10여년 간의 사태가 아니었던가.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은 중국의 왕이야말로 태산에서 봉선제를 지내는 '하늘의 아들(天子)'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를 정점으로 구성되는 성리학적 세계질서는 천하에 유일한 절대적 가치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르지 않는 족속들은 모조리 '금수와 같은 상종 못할 오랑캐'이므로, '작은 중화'인 조선의 민중들은 몇천 년 이어온 생활방식을 방방곡곡 구석구석 그에 맞추어 바꾸어야 한다고 강요하였다. 그에 대한 의문이 나올 경우엔 '작은 것은 큰 것을 섬기는 것이 도리이다(事大字小)'라는 한마디로 민중들의 입을 막아버리곤 했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10년을 넘기고 있는 대한민국의 서민들에게 어째서 그들의 하루하루가 점점 더 가파르게 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다. 또 그 '글로벌 스탠다드'를 믿고 따르면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경제적 번영이 오는지 딱 부러지게 말해주는 이도 없다. 되려 이런 질문을 꺼내는 이들에게는 도리를 깨치지 못한 ‘21세기의 오랑캐 무지렁이’라는 경멸이 돌아올 뿐이다.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새끼 중국인' 행세를 하며 참을 것인가를 곰곰이 따져보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날 듯하다.
 
* 필자는 현재 토론토 요크대학 정치학과에서 일본의 지배블록, 소유구조, 금융체제의 변화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으며, 최근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개마고원 2004)'라는 번역서를 출간했다. <대자보>, <프레시안> 등의 온라인 매체와 <한겨레>와 [월간 말]지 등에 기고하고 있다.
*홍기빈은 진보적 소장학자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며 캐나다 요크대에서 지구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와 <칼 폴라니의 정치경제학-19세기 금본위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개마고원 2004),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녹색평론, 2006) 등 경제연구와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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