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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kdoo의 소름돋기]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백인중심 집단광기와 기계복제 시대 묵시록적 예언 그린 뉴웨이브의 걸작
 
김정곤   기사입력  2004/10/19 [21:13]

1960년대 중반은 정통적인 할리우드영화의 몰락과 함께 기존 가치들의 붕괴, 그리고 자유주의적, 반문화적 분위기의 히피문화의 광범위한 확장에 따라 새로운 를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되고 이로 인하여 최초의 아메리칸 뉴웨이브 영화인 아서 펜워런 비티의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67>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권위적인 기성세대의 반발로서의 성격과 베트남戰을 피해 당시로서는 누구나 입학이 가능하던 UCLA영화학과로 피신했던 젊은 층들에 유행하던 어설픈 마르크시즘과 마오이즘을 통해 표출되던 기성체제에 대한 반발(
기성체제는 제 몸무게 때문에 무너질 것이다. 그건 확실하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에 따른 것들과 스튜디오 시스템간의 충돌을 통해 만들어지던 시기였기에 극단적 반체제 영화였던 데니스 호퍼의 <마지막 영화Last Movie>와 같은 영화들은 모든 이들의 외면을 당해버립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광범위한 물결은 수정주의 장르를 통해서 새로운 할리우드의 영화를 창조하는 동시에 타협(대부Godfather)해 나갑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수정주의의 경향을 완전히 탈피한 영화들은 그 변방에서 자라나게 되며, 60년대 말의 가장 극단적인 영화는 바로 호러Horror 장르를 완전히 환골탈태 시킨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68>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살아있는 시체들     © 죠지 A 로메로
60년대의 말, 전세계적 에너지가 혁명의 기운으로까지 끓어오르던 이 시기에 난데없이 등장한 이 영화는 7만 불의 저예산을 가지고 펜실베이니아의 어느 농장에서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과 침묵하는 다수의 광기, 그리고 중산층 가부장제의 붕괴 등을, 반전(反戰)의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담아냄으로써 미국의 중심에 대한 격렬한 공격을 감행합니다.

또한 당시까지만 해도 주술적 성격, 그리고
프랑켄쉬타인 식의 피조물적인 성격이 강했던 좀비Zombie죠지 A 로메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와서 현대적 의미의 좀비(Living Dead)를 창조해 냅니다. 물론 이는 로메로만의 공이 아니라 공동 창작자인 A 루소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건 사실이겠지만 루소가 재편집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30주년 특별판>과 <바탈리언Return of the Living Dead, 85>에서 보여지듯이 루소는 이 영화를 그렇게 진지하며 잔혹한 영화를 만들기는 바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에 이 영화의 대부분의 영향력은 로메로에게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아직까지 고전의 위치에 남아 수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대는 이 영화에 무수히 심어져 있는 다중적인 텍스트가 지금에조차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인데 특히나 WASP에 대한 공격과 함께 베트남전과 인종차별에 침묵하던 다수를 수동적 동조자인 살아있는 시체Living Dead로 규정하며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을 제외한 모든 살아있는 시체민병대를 백인으로 위치지음으로서 능동적 공격자와 수동적 동조자를 한 묶음으로, 그리고 바바라를 소수자이며 피억압자로 그림으로서 백인중심의 집단광기의 문화를 완성해내게 됩니다.

 

▲남부백인에 학살당한 흑인들     © 죠지 A 로메로
이러한 보는 사람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텍스트의 독해가 가능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그 중심에는 인종차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심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최초
바바라의 입을 통한 썸머타임에 관한 언급은 짧은 밤(투쟁의 시간)에 대한 언급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마지막에 스냅사진으로 등장하는 도축용 갈고리를 통해서 들어납니다. 이 장치는 가수 빌리 홀리데이에 관한 하위 텍스트이며 이후 톰 사비니의 리메이크 버전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로 표현되는 미국사회의 흑인학살의 역사에 다름 아닙니다(썸머타임이라는 생산성향상의 자본주의적 결과물에 관한 언급은 여기서 생략 하겠습니다.). 때문에 이 영화의 가장 긍정적인 인물은 흑인인 한 명뿐이고 바바라는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순간 오빠(가부장제의 대리물)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역시 백인으로 구성된 민병대의 일격에 죽임을 당해 버리고 맙니다.

 

이 영화에서의 살아있는 시체들은 이러한 학살자들의 암묵적인 동조자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단지 죽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멍한 표정과 술 취한 듯 휘적거리며 걷는 모습과 게걸스럽게 인육을 탐하는 모습을 통해서 외부로 드러난 억압자의 힘에 짓눌려있긴 하지만 언제라도 자신의 머리를 비우고 이들 억압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대중Mass이라는 이름의 괴물로 그려집니다. 그러니까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몰려드는 이들은 단 하나의 욕망에 매몰되어 집착하며, 의 일당은 TV를 통해 그들의 발생 원인과 해결책을 추적함으로써 멕루한의 명제를 실천할뿐더러 영화는 이들을 미디어로 연결시킴으로써 대중매체Mass Media에 길들여진 공허하고 수동적인 인간군상으로 그려냅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결말을 창조해낸 이 영화의 살아있는 시체들은 TV를 통해 위성의 추락과 이로 인한 방사능의 유출에 의한 것으로 잠정 결정하는데, 이는 핵 경쟁에 돌입해 있던 미,소에 관한 조롱일뿐더러 앞으로 다가올 군비확산을 통한 기계복제 시대의 묵시록적 예언으로도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부모를 공격하는 소녀와 불에 타 죽어 살아있는 시체들에게 먹히는 연인들을 통해 중심으로부터 붕괴해가는 미국에 대한 절망 등 수많은 하위텍스트를 현재에도, 이후에도 발견할 수 있는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비록 할리우드 밖에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을 아우르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절의 가장 뛰어나며 소름 끼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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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0/19 [21:1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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