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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용 홍보수석, 왜 아니된다고 진언 못합니까?"
한 언론사 중견 기자가 청와대 홍보수석에 보내는 글
 
김진오   기사입력  2007/05/23 [18:54]

윤승용 청와대 홍보수석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공개적인 글로 만남을 시작하게 돼 저 역시 유감입니다.

윤 수석과는 회사(한국일보)는 달랐지만 지난 1989년에 남대문경찰서 출입기자 시절 만나면서부터 언론계 호칭인 선배, 후배가 아닌 형, 동생으로서 맺었던 인간관계이기에 아래 글부터는 형으로 호칭하겠습니다.

"승용이 형, 경찰서 출입할 때 우리가 언제 작당해서 기사 쓴 적 있었나요?"

남대문경찰서 출입시절, 그 숱한 시위 현장에서 당시 남대문 경찰서가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대학생들을 곤봉으로 과잉 진압한다며 경찰서장의 옷을 찢어버리고 당시 서울시경(지금 서울경찰청) 고위 간부 등을 감히(?) 밀치며 시위 학생들의 부상을 걱정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당시에 형은 경찰이 독재 권력의 주구라며 열변을 토했으며 후배들에게 바른 기자가 되라고 가르쳤지요. 그러면서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지 않으면 권력은 썩게 마련이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치안본부(지금 경찰청)와 서울경찰청 출입기자(이른바 시경캡) 시절 매일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부인보다도 더 얼굴을 자주 본다며 "우리 이러다가 情드는 것 아니야?"라고 말했지요.
 
저의 기자생활 만 19년 동안 형과 같은 출입처에서 일요일만 제외하고 얼굴을 대면했던 시절이 무려 6년 가량이나 됩니다.
 
그리고 형은 미국 연수를 다녀온 뒤 워싱턴 특파원을 했습니다.
 
제가 지난 2004년 10월 워싱턴 특파원으로 발령나자 형이 직접 한국일보의 송현클럽으로 불러 점심을 사주며 워싱턴 특파원의 할 일에 대해 대략적인 정리를 해주며 어렵더라도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라고 용기를 북돋우어줬습니다.
 
"항상 기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지요.
 
형은 한국일보 정치부장 시절 국방부 공무원으로 옮기더니 지난해부터 청와대 홍보수석이 됐습니다. 저는 기대를 했습니다. 다름 아닌 윤승용 형이 청와대 홍보수석을 하게 됐으니 참여정부 내내 이어져온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가 해소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노무현 대통령께서 지난 2월인가요? "일부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기사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라고 말했지요. 이 말은 '기자들이 기사를 작당해 쓰고 있다'는 뜻으로 많은 기자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어떻게 한국의 대통령, 그것도 평생을 민주화 투쟁에 바쳐온 노무현 대통령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승용 형, 형은 20여 년간 현직 기자생활을 하면서 작당해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까? 제가 형과 함께 출입했던 치안본부와 서울경찰청 출입기자 시절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출입처에서도 기사를 동료 기자들과 작당해 쓴 적이 없습니다. 형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형이 모시는 대통령께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더 나아가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라는 것은 도대체 뭡니까? 세계의 그 어떤 나라의 청와대에 해당하는 곳이 주도해 이같은 취재지침을 만들어 기자실을 폐쇄하고 전자 브리핑제를 도입하라고 합니까?
 
"기자들은 국민을 대신해 정부 청사에 가 있는 것임을 왜 대통령에게 진언하지 않습니까?"
 
누구보다도 형이 미국의 실태를 잘 알지 않습니까? 지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워싱턴 특파원을 했으니까? 미국의 실태를 잘 알고 있으시겠죠. 미국의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농림부,재무부 등 모든 정부 부처에 기자실과 별도의 브리핑실이 있습니다. 미국의 출입기자들이 어떤 자격으로 취재를 하고 있는지 역시 잘 알 것 아닙니까? 백악관과 국무부 출입기자들은 그 철저한 검색 과정도 생략한 채 유유히 건물로 들어갑니다.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브리핑 때 질문을 어떻게 하는지 봤을 것 아닙니까?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 5공 정권의 '보도지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저 만의 느낌일까요?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보면 일견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각 부처 마다 기자실을 둘 필요가 있느냐'는 데는동의합니다. 통폐합할 부분이 있으면 하고 공간을 줄여 공무원들에게 돌려주는 것도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정부종합청사의 주인이 공무원입니까? 그 주인은 어디까지나 국민입니다. 기자들은 국민을 대신해 정부 청사에 가 있는 것이라고 왜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대통령께서 그런 판단을 하지 않으시면 홍보수석인 형이 진언을 해야지요. 기자와 언론은 직접 민주주의를 할 수 없으니 국민과 정부와 연결해주는 매개체, 즉 언론이 간접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왜 설득을 하지 않으십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승용 형만은 '아니되옵니다'라고 간청을 드렸어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언론사 기자들이 안된다고 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윤승용 형은 만약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대통령께 '아니되옵니다'라고 외치고 사표를 던졌을 것입니다. 학생운동을 하고 언론 민주화를 외치던 기백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아니면 현 정권과 코드를 맞추고자 변한 것입니까?
 
정말로 실망했습니다. 저도 기자실 운영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청와대가 주도하는 취재 선진화 방안은 분명 잘못됐습니다. 기자실의 순기능을 완전히 호도해버렸습니다.
 
국민이 왜 정부를 믿지 않는지 아십니까? 언론의 과도한 비판도 원인일 수 있겠지만 공직자들이 정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공직자들이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직한 정책을 내고 '국록'을 먹고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면 우리 공직자들이 더욱 정직할 수 있을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정부에 국민 불신이 심해지는 것입니다.


 
"개혁도 아닌 내용을 개혁처럼 호도하는 것은 또다른 권위주의적 발상"
 
괜한 것에 국가의 역량을 낭비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무리 좋은 개혁 방안도 국민이 거부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는데 무려 1백 년이 걸렸습니다.
 
과거 역사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난 2000년 총선 전에 당시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와 민주당이 의약분업을 밀어붙였습니다. 5백표 이내로 민주당 후보들이 낙선한 지역이 전국에서 13곳이나 됐습니다. 그 파장이 어떤 줄 아십니까? 많은 개혁법안들이 야당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해 좌초됐습니다.
 
그리고, 현 정부는 지금도 이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기자실을 없애는 '언론 선진화 방안'이라는 것에 대해 야당은 물론 여당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반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개혁도 아닌 내용을 마치 개혁처럼 호도하며 청와대의 권한으로 정부 부처를 눌러서 '취재지침 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통과시키려 한다면 그건 또 다른 권위주의적 발상에 불과합니다.
 
형, 진정으로 권유합니다. 저 후배 기자의 얘기에 동의하기 어렵다면 형의 절친한 동창들인 현재의 중견 언론사 편집국장들의 의견이라도 한번 들어보세요. 청와대가 지금 정도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지 않아야 할 길로 내달리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 한국의 젊은 기자들은 아직까지는 선배 기자들의 독립을 위한 우국지사와 민주화 투사들의 투쟁정신을 뇌리 한 구석에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다.
 
기자들을 적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모두는 아닐는지 몰라도 기자들 대부분은 이 사회의 '가지지 못한 자, 소외받는 자, 약자들 편에 서야 한다'는 나름의 '지침'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표에 개혁의 대상이라고 주홍글씨를 남기를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제발, 대통령님께 '이것 만은 아니되옵니다'라고 진언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조용히 물러나십시오. 길이 아닌 곳에 발을 잘못 들여 놨다 생각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즉시 선배의 정도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워싱턴=CBS 김진오 특파원 kimoh@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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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5/23 [18:5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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