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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그 거대한 뿌리를 자르자!
역사의 청산은 고통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이태경   기사입력  2004/03/06 [15:38]
친일반민족 행위자 청산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른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의 입법과정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과 감정은 비단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과거는 단지 지나간 시간 혹은 역사의 유물(遺物)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생물(生物)임을 그것도 아주 힘이 센 생물임을 아프게 확인하는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최근에 각종 매체에서 집중 조명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해방 이후 행적과 그들이 차지하게 되는 사회적 위치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사회 각 부면이 재조직되는 과정 등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일제하에서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한 반민족행위자들은 해방 이후 적어도 남한에서는 사회 각 부면의 주류(main current)로 신분상승을 한다. 이는 마치 지주가 그 자리에서 쫓겨나자 마름이 지주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것이다.

물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해방된 남한사회에서 지배블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남한을 대소(對蘇)전진기지로 인식하고 있던 미군정(美軍政)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자신의 집권기반으로 삼은 이승만 일파의 방조와 협력이 절대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구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게 운이 따랐던 것은 분단과 뒤이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친일과 항일이라는 대립항이 좌(左)와 우(右)라는 대립항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었다.

일거에 그들은 사회주의의 위협에 맞서서 대한민국을 보위하는 수호천사로 존재 이전을 감행하였고 그 기도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구축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지배 질서는 시간이 갈수록 공고해지기만 하고 어느덧 그들의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는 것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말이다.

과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청산- 예컨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친일행위를 규명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는 행위 등-하는 것이 윤리적 차원에서만 긴요한 문제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흔히 하는 말로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고 전도(顚倒)된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단죄(斷罪)가 요청되는 것일까? 물론 전도된 가치관과 더러워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친일행위는 단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친일행위를 청산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왜곡된 정치, 경제구조를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업이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한국사회의 각 부면-행정부, 국회, 군, 경찰, 법원, 재계, 문화, 언론, 교육, 학계 등-을 완전히 장악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자신들의 물적, 이데올로기적 지배구조를 계속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후손에게 이를 세습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지배구조는 여전히 온존한 상태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주변에서 힘깨나 쓴다는 소리를 듣는 가문의 가계를 추적해 보면 상당수가 친일경력이 있는 선조들을 모시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패거리를 형성하고 한국 사회의 각 부면을 자신들의 이해에 맞게 구성하고 조직하며 그 과실을 과점(寡占)하여 왔다. 따라서 지금 우리들의 삶에 질곡(桎梏)으로 작용하고 있는 정치, 경제구조의 정상화를 위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준엄한 단죄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철저한 역사적 청산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사회의 주류로서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이 타격을 입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다.

한나라당을 위시한 각종 보수언론들과 기득권 세력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극력 저지하려고 기도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이 일정 부분 훼손된다고 해서 이들의 지배구조가 뿌리 채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무릇 견고한 제방도 미세한 균열로 인해서 무너지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단죄는 그 사회적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고 할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한국 사회의 도착된 가치관과 왜곡된 정치, 경제구조의 정상화를 위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청산은 계속되어야 한다.

역사는 고통스러울 만큼 더디게 진군한다

말할 것도 없이 역사청산은 제때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사법적 심판에 실패하였고 그 폐해가 지금까지 사회 곳곳에 미치고 있다. 이제 역사적 청산마저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단죄는 단판 승부일 수 없다. 하물며 이벤트성 행사를 통해서 해결될 수는 더욱 없다. 그것은 치밀한 자료수집과 기록화를 통해 느리게 이루어 질 것이다. 바야흐로 지루한 산문(散文)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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