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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kDoo의 소름돋기] 여성만 살아남는다?
호러 슬래셔 무비, 남성의 시각과 기제로 여성을 묘사해
 
김정곤   기사입력  2004/01/07 [10:44]

1.왜 항상 여성이어야 하는가

수많은 호러물들 중에서도 양적으로 그 우위를 차지하는 영화들은 슬래셔입니다. 항상 의문의 살인마가 존재하고 마지막 한 여성이 살아남을 때까지 그의 살인은 멈추질 않지요. 아니 마지막 한 여성이 살아 남더라도 그의 살육은 대부분 그 후일을 기약하기 마련입니다. 그럼 왜 여성이어야 할까요.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스트의 한결 같은 주장은 호러 영화에서의 '여성 피해자'론입니다. 물론 옳은 말입니다. 여성을 폭력의 피해자 또는 성적 억압자로 그리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성적 폭력적 우위를 차지한 악을 물리치고 홀로 살아 남는 여성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는 것일까요. 억압적인 남성(괴물) 가해자를 퇴치 했으니까? 그리하여 여성의 지위를 격상시켰기 때문에? 아니 그러한 여성의 고군분투는 거의 다 남성의 시각에서 만들어 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남성, 즉 아군을 주인공 여성의 주변에 배치시켜 놓고 조기에 퇴장시키며 때로는 외로운 투쟁을 하는 여성의 주변에 마지막까지 배치시켜 놓지만 결국엔 죽임을 당하게 만듭니다. 이는 남성의 주체적인 역할을 제거해 버림으로서 단지 영화내의 주변인으로 남게 만들어 버리는 효과를 발휘하는데 여성 주인공의 생존과는 그다지 연관성이 없는 주변인으로, 그리하여 영화 내에서 남성의 가치를 소외시켜 버림으로 해서 관람자들의 시선을 주인공 여성에게 붙들어 놓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결국 피해자는 여성으로 한정되고 여성에 대한 살인마의 집착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영화 13일의 금요일 포스터    
이러한 경향은 10대 슬래셔 영화의 초기에 상당히 강조되어 나타났는데 이들 작품 중 대표격인 <13일의 금요일>의 경우 방만한 10대들의 일탈 행위에 철퇴를 가할 뿐더러 남성의 능동적인 역할을 축소함으로 인해서 대부분의 시선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여성에게 주목하도록 만들며 영화가 끝난 이후에 관객의 뇌리 속에 남아있는 건 끔찍한 살육과 방종 맞은 여성의 이미지 밖에 없도록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경향은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도 계속되며 대부분의 10대 슬래셔물들 역시 이러한 공식을 답습하며 방종 맞은 여성에 대한 응징을 확대 재생한 해 나갑니다.

이러한 성적 방종에 대한 응징은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류의 영화에서 비틀기를 시도하기는 하지만 여성의 주체적인 사건 해결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는 어설픈 경찰관의 도움으로 사건이 마무리 되는 걸 보여주는 시각에서 드러나며, 종국에는 여성의 육체적 한계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집니다.

이와 같은 일그러진 여성에 대한 관념들은 결국 우리가 가끔 TV와 같은 매체들에서 보이는 강간범과 과다 노출(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의 상관 관계 등으로 등장 하는데 모든 것을 여성이 유발한 것처럼 유도해 버리는 기가 막힌 주장들이 제기되는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노출이 심하다고 해서 강간해 버린다는 건 대다수 남성들의 일그러진 여성관 때문이며 하나의 정신병적 강박관념에 다름 아니지요.

또한 이러한 장치들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교묘히 비틀어 버리는 역할마저 수행하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기 서사 형식의 영화가 등장하면서부터 이루어졌던 여성의 천대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이었던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억압자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외부 또는 외계로부터 어느 순간 나타난 괴인(괴 생명체)의 학살에 의해 그저 수동적인 죽임을 당하거나 또는 강한 남성에 의해 구출되어 남성의 품속에서 행복한 결말을 맞는 영화내의 소품이자 강한 남성의 남성성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도구로써 활용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부터 페미니스트들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힌 나머지 여성을 영화의 중심으로 끌어들이지만 결국은 그것 또한(위에서 지적한데로) 그들 남성 억압자들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점점 더 교묘한 수법으로 논쟁의 범위를 피해가거나 아니면 페미니스트 내의 논쟁을 유발시키는 좀더 자극적인 영화들을 제작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90년대 이후의 호러들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의 시각차를 이용한 논쟁을 유발함으로 인해서 현재의 호러들을 대하는 여성의 태도를 다분히 전투적이라고 간단히 폄하해 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하고 있습니다.  죠지 A. 로메로의 '좀비' 삼부작 중 마지막 편인 <시체들의 날>에서 보여주는 군인들과 여성의 관계는 이러한 가부장 중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 다름 아니지요.

‘우리 여성들은 지금 것 역사 속에서 소외되어 왔다. 과거사에서 우리 여성들의 언급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는 마개리 피네다의 언급은 이들 영화 속에서도 유효합니다. 수많은 영화들과 수많은 ‘은막의 여왕’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존재는 그저 남성의 욕망을 대변할 뿐입니다. 저 유명한 마릴린 몬로 역시 그런 남성들의 판타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푼수와 같은 스크린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고 고백했었으니까요. 게다가 ‘호러 퀸’이라는 명성까지 얻었던 제이미 리 커티스 역시 영화 내내 비명을 질러대는 게 대부분 이었을 뿐이었거든요.

▲영화 할로윈포스터    
물론 단지 비명을 좀더 잘 지르고, 좀더 잘 뛰어다닌다는 것 만으로 그녀가 호러 영화의 아이콘이 되었던 것은 분명 아닙니다. 존 카펜터의 최초 걸작이자 슬래셔 영화의 선구자인 ‘할로윈’이란 영화가 아니었다면 그녀를 주목할 이유는 분명 다른 부분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호러퀸으로서의 그녀 였으며, 이후에도 똑 같은 형식으로 다른 몇몇 호러물들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호러 영화들에서의 여성의 이미지를 고정화 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는 또 다른 호러 아이콘들인 브루스 캠벨과 제프리 콤즈와는 전혀 틀린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데, 존 카펜터의 또 다른 영화 <LA 탈출>의 한 시퀀스에서 미치광이 의사로 분한 브루스 캠벨이 등장하는 장면은 명백히 B급 호러 영화들에 바치는 오마쥬이며, ‘리 에니메이터’의 ‘웨스트 허버트’라는 인물로 광기어린 의사의 한 전형을 창조한 제프리 콤즈는 여성 호러 스타들과는 분명히 차별되는 위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수많은 영화들에서 광기에 찬 인물들을(리 에니메이터, 지옥인간, 프라이트너, 헌티드 힐 등등) 연기했던 제프리 콤즈의 경우에는 단연 이 분야의 스타임에 분명하며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캐릭터로써 기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분명히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극을 이끌어가기 위해 여성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 극의 전개를 위해 여성을 이끌어 오는, 영화 내에 속박 당하는 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브라이언 유즈'나 감독의 예외적인 영화인 <리빙데드> 3편에 이르러서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로 여성 좀비가 등장하게 되지만, 이 여성 좀비인 ‘줄리아’마저도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학대하는 자학적 모습 이외에도 각종 전위적 피어싱으로 상징되는 자학은 결국 영화 내에서 여성의 위치가 관음적인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신(神)의 성은 그 사회의 권력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 이디오피아, 리비아,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문명시대는 여성이 국가를 상징하고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그 ‘신’이란 무엇일까요.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신이란 권력(Power)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 신의 이름으로 학살된 수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신의 이름을 빙자한 수많은 살육과 학대가 이루어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등’함이란 오히려 종교를 위배하는 건 아닐까요? 때문에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오히려 너무도 정직한 제도라고 한다면 너무 멀리 나간 것일까요?

한가지 분명한 건 현대가 힘이 중심인 사회라는 것입니다. 브레히트는 그의 시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이란 시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에 관해서 예기합니다. 테베와 만리장성과 로마의 개선문들을 건설한 이름 없는 사람들, 알랙산더와 카이사르와 프리드리히 2세가 사용하던 이름 없는 사람들...

이들은 단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주류 역사에서 소외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갑니다. 또한 지금도 수많은 사회의 약자들은 사회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하루 하루를 힘겹게 이 힘이 중심인 사회와 싸워나가고 있습니다.

초기문명의 중심이 여성이었다는 건 그 사회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회였는가를 보여줍니다.

롤랑 조페의 영화 <미션>에서 그들 원주민들이 인간인가 아닌가를 두고 벌이는 그 지독히도 이기적인 시선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는 모두가 ‘사람’이었던 사회였을 겁니다.

초기문명 이후 남성은 그 힘(육체)으로 권력을 잡았으며, 지난 수천년간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우위는 결코 정신의 우위가 아닐 뿐더러 생산과는 거리가 먼 소비중심의 권력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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