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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kDoo의 소름돋기] 장화,홍련
한국현대사의 질곡, 가부장제의 악령과 유령에 관한 걸작
 
김정곤   기사입력  2003/12/10 [11:06]

지난 1998년 <여고괴담>의 흥행으로 등장했던 2000년의 공포영화들(<하피> <가위> <해변으로 가다> <찍히면 죽는다>)이 장르(슬래셔)의 환상에 기대어 만들어진 영화인 반면에, 이후에 등장한 <소름>은 일정한 장르적 규칙이라는 환상과는 전혀 상관없이 등장한 제목 그대로 소름 끼치는 최초의 걸작 이었으며, 현대사를 지배하고 있는 끈질긴 유령들에 관한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영화 <소름> 이후에 등장한 한국공포영화들의 경우 <소름>이 끌어냈던 엄혹한 현대사의 어둡고 끈질긴 그림자를 끌어들이며, 이 질긴 근현대의 그림자들을 밝혀내고 또 끊어버리려 하는 듯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2003년에 등장한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특징들이기도 하며, 단지 공포영화만이 아니라 진지한 감독들에 의해서도 계속적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름>이 역사적 근친상간에 관해서 얘기했다면 <4인용 식탁>은 중산층이라는 이름의 유령 홀린 사람들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였고 <올드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복수와 사실, 이 모든 게 환상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하고 있습니다.  영화 <장화,홍련> 역시 이러한 역사적 기억이나 죄의식을 은연중에 들어내고 있기도 합니다.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영화 장화홍련 중 한장면     ©씨네서울
<장화,홍련>은 억압된 기억이 현실과 충돌하면서 들어 나는 공포에 관한 영화이며 저개발 되고 억압된 기억에 관한 무시무시한(또한 슬픈) 우화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며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수미(임수정)와 은수(염정아)의 대립이지만 그 중심에는 이 분열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 무현(김갑수)이 있으며, 모든 공포의 뿌리는 이 무기력한 가장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어머니의 죽음과 새엄마의 등장, 그리고 수연의 인식하지 못하는 죽음은 모두가 이 우유부단해 보이고 무기력해 보이는 가장으로부터 시작되며 때문에 애증과 증오가 공존하는 수연은 자신의 인격을 분리시켜 가상의 은수라는 인물을 창조해내고, 이 증오와 죄의식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에게 모든 책임을 지움으로써 수미는 또 다른 공포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실재하는 유령인 수연의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서 또 다른 인격을 창조하며 자신의 죄의식을 떠 넘기고 증오의 대상을 만들지만 그로 인해 억눌러왔던 원죄의 기억인 수연의 죽음이 표면으로 들어 나게 됩니다.

영화의 주요 무대인 일본식 가옥구조를 채택한 집은 감독의 말을 빌자면 “무엇인가 깨끗이 청산되지 않은 잔재감을 이야기 하고 싶었고, 일본식 목조건물 내부를 서양식 가구로 채웠는데 이것은 일본의 잔재와 미군정에서 이식된 문화가 어지럽게 섞인 우리 근현대사의 정신상태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근현대사의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들 역시 한 시대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장면은 수미가 보는 가족사진 장면에서 드러나는 흑백과 칼라의 가족 사진, 수미(만) 등장하는 흑백의 가족사진과 수연(까지) 등장하는, 그리고 은수라는 인물로 도달하는 가족사진은 그대로 끈임없이 이어지는 역사의 연결성과 병든 아내를 핑계로 새로운 여성을 탐닉하는, 그래서 아내를 결국 죽음으로 내몰고 그로 인해 수연까지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또는 해방 이전의 악행(일)이 해방 이후(미)의 악행으로 넘어서서 이제는 칼라로 표현되는 수연(현재)을 간접적으로 살해하는 그 끈질긴 악행의 고리가 이 불균질적이며, 이질적인 집으로 표현된 게 아닌가 합니다.

▲영화 장화홍련중 한장면     ©씨네서울

이렇게 적당한 공간과 적절한 인물들을 배치한 영화는 서서히 그 공포의 근원을 탐구해 나갑니다.

“뭔가 잊고 싶고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은데 도저히 잊지도 못하고 지워지지도 않아 그게 평생을 붙어 다녀 유령처럼”

은수라는 제3의 인격을 빌려 말하는 이 대사는 영화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한데, 죄의식으로 충만한 이 영화는 최초의 악행을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모든 등장 인물들에게 원죄의 굴레를 씌우고자 하고 있습니다. 비록 가정의 붕괴를 초래하는 주체는 아버지로 등장하는 무현으로부터 시작되고는 있지만 수연의 꿈 장면과 연계해서 드러나는 세 명의 동시 생리는 그들 3인이 동일 인물일거라는 직접적인 상징이라기보다는 원죄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듯이 보입니다.

때문에 영화의 초반까지 제3의 인격이었던 수연은 정지된 공간이었던 집안의 시계가 다시 작동됨에 따라 부활하게 되는데, 이는 제2의 인격이었던 은수가 화장을 지우는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실제 인물과 거울에 비친 두개의 상(狀)을 포함한 세계의 인격 중 하나는 이제 실재하기 시작한 공간으로 들어온 아버지로 대체되고, 제3의 인격이었던 수연은 수미의 죄의식에 의한 현실도피를 일깨우기 위한 장치로서 탄생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수미와 (가공의)은수의 시선으로 처리되던 카메라의 시선은 잠들었던 수미가 눈을 뜨는 순간 생명을 얻으며 또 하나의 시선! 으로 태어나게 되고, 이는 수미가 하나의 악몽 다음에 보는 또 다른 악몽인 (실재하는)유령의 출현과 유령의 다리사이로 흐르는 피와 함께 내려오는 손을 통해서 그것을 가시화 시키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단지 하나의 집이었던 공간은 이렇듯 새로운 수혈을 받으며 깨어나게 되고, 사람과 유령이 공존하는 이 공간은 그대로 하나의 비극적 세계를 구축해갑니다.

과거와 현재를 대표하는 죽은 엄마와 은수는 '집'이라는 공간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이 공간의 불협화음은 실재하는 공포로서 드러나는데 실재하는 이 공간에서의 싸움은 사실은 허구이며 수연에 대한 애정조차 사실은 공존이 불가능한 유령에 다름 아닙니다. 그럼 이처럼 죄의식이 동반한 공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영화 장화홍련중 한장면     ©씨네서울
수연의 죽음을 인식하기 직전 잠들어 있던 수미의 손에 들려있던 건 하나의 흑백 가족사진인데 이는 이전에 보여지던 흑백(수미)과 칼라(수연)의 가족사진이 아니라 수연마저 과거로 불러들여 찍힌 과거의 가족사진이지요. 수연의 죽음을 상징하던 화사한 칼라사진의 균열은 수미에게로 건너가 과거의 추억으로 부활하는데 이는 수미가 현재보다는 과거에 기대어 있는 인물이라는 걸 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분노 때문에 간접적으로 외면받았던 수연의 죽음이라는 죄의식을 과거로 불러들여 위로받고, 또한 은수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서 수연의 죽음을 수연 자신에게 전가하기 위한 행위로서 장롱이라는 닫힌 공간에 수연을 가두어 버립니다.

이처럼 두개의 이중적인 인격 분열은 결국 수연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붕괴하고 말지만 은수의 입을 빌어 말한 것처럼 도저히 잊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상처로 각인 될 것임을 영화의 말미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저히 치유 받지 못할 수미의 상처는 이렇듯 또 다른 공간에 방치되어 버리지만 남은 실질적 살인자인 은수는 과거의 유령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집이라는 상징화된 공간의 실질적인 주인인 이 유령은 외부에서 침입한채 내부를 갉아먹어 들어가는 은수라는 인물로 체화 된 또 다른 괴물에 대한 응징으로 보이며, 소외 받은 자들을 대표하는 이 유령의 복수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됩니다. 그리고 은수에 대한 일말의 동점심도 남기지 않고있습니다.

사회 깊숙이 파고든 괴물에 대한 복수는 가능할까?

한국의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집과 함께 무현이라는 존재는 정체된 역사적 상징으로서의 인간군상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억눌린 역사에서 별 발언도 없이 타협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왔던 인간들, 그래서 현재에 와서도 아무런 영향력도 없이 미쳐버린 딸의 투정을 받아줄 수 밖에 없고 결국에는 사라져 버리는 인물. 이렇게 무기력하게 표현되는 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의사라는 직업이 나타내듯 일반대중에 대한 상징이 아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긴 했지만, 그저 시대에 붙어 무기력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것이며, 악의적 괴물에 대항하는 것은 결국 유령이라는 이름의 드러나지 않는 일반대중에 의해서 실행됩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이 영화에서 근대와 현대는 모두 죽거나 미쳐버립니다. 하지만 외부에서 침입해 내부를 갉아먹고 병들어 가게 하는 괴물에 대한 복수는 확실하게 드러나며, 죄의식의 근원을 잘라내는 동시에 그 죄의식의 원인을 알아내서 낡은 집을 버리고 새로운 집으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수연의 마지막 눈물은 자신의 죄의식에 대한 인식의 눈물이며, 새로운 가능성의 눈물에 다름 아니지요. 이는 반성의 가능성이며, 악의적 괴물에 대항 가능한 새로운 인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장화,홍련>은 비록 젊은 사람들에 의해 연기된 영화이지만 결국 이들이 대표하는 건 과거와 현재의 대화와 투쟁이며, 새로운 세대들의 가능성에 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물론 괴물에 대한 응징은 한참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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