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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사유가 빈곤한 나라
[정문순 칼럼] 가난이 곧 위험인 세상, 아이들을 저개발국에 보내지 말라
 
정문순   기사입력  2015/05/26 [18:08]

빈곤은 고달프다. 없이 산다는 것은 희망도 내려놓아야 하고 무기력과 절망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가난은 ‘한낱’이나 ‘단지’ 따위 꾸밈말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누가 가난을 단지 불편하고 조금 부족할 뿐이라고 했나.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노인 빈곤에다 조금 불편하다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사회는 빈곤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 인상 문제도 노후의 빈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일진대 연금료 인상을 반대하는 대통령과 청와대는 노인빈곤율 50%의 현실을 바꿀 생각은 있는 걸까.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시가 아직까지 한국 시사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음도 가난에 대한 사유가 참으로 빈곤하고 가난한 우리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작 시의 작자 서정주는 가난을 모르는 삶을 살았다.
 
인간의 체면, 자존심, 존엄은 가난 앞에만큼은 체통을 지키지 못한다. 심지어 가난은 사람의 생존과 수명까지 좌지우지한다. 이는 통계로도 간단히 입증된다. 예전에는 가난한 이들이 전염병과 영양 결핍 질환을 달고 살았지만 요즘은 현대병이라는 비만이나 암에 부자들보다 더 많이 노출된다. 또 가난할수록 부자들보다 사고나 재해를 당할 위험도 더 높다. 빈곤이 야기한 재난, 위험, 질병은 한 나라 또는 지구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 아니며, 부자와 저소득층, 선진국과 저개발국의 운명을 갈라놓는다는 점에서 서글프다.
 
세계여행의 빗장이 풀린 지 25년이 지나면서 뭍에서 제주도 가듯 외국을 다녀오는 한국인들도 크게 늘었다. 처음에는 에펠탑이나 자유의 여신상 있는 나라에 안다녀오면 안될 것처럼 하더니 여기저기 둘러보고 여유가 생겼는지 이제는 저개발국가의 관광명소로도 퍼지고 있다. 그러나 빈곤이 위험과 동일한 낱말인 이상 저개발국가를 방문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에 관한 위험 지수를 스스로 한껏 끌어올림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사지에 학생들을 단체로 보냈던 경남의 한 고등학교의 처사는 심히 유감스럽다.
 
사람들은 저개발국가에 사는 것은 꺼려도 잠깐 다녀오는 것은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업무상 거주하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단기체류는 가능한 한 피하는 게 맞다. 타지마할, 히말라야, 발리, 사이판, 보르카이, 만다나오를 굳이 일없이 갈 필요가 있을까. 네팔,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필리핀, 스리랑카 등은 2000년대 이후만 쳐도 자연재해가 단골로 일어난 나라들이다. 지진이나 해일, 큰비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를 가리지 않지만 가난한 나라들은 재해 앞에 속수무책일 정도로 무능한지라 재난을 눈덩이처럼 키울 능력은 있어도 줄일 능력은 없다. 이런 점에서 자연재해는 하늘이 준 것이라고 해도 분명 인재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재해가 한 번 일어나면 수천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오는 것이 다반사다. 네팔 같은 나라는 엄청난 재난이 툭하면 일어나니 웬만해서는 별 충격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수만 명이 희생됐다는 이번 지진 참사의 경우에도 별다른 느낌이 오지 않은 나는 참으로 감정이 무딘 사람일까. 그만큼 아시아 최빈국은 위험을 달고 사는 나라다.
 
이동학습 명목으로 네팔에 학생 등 48명을 보냈던 창원의 태봉고는 아마 내년에는 네팔에 학생들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학생들을 죽음의 땅에 보낸 무책임은 누군가가 책임져야 하고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은 것은 천운일 따름이었다. 경남도교육청도 사고가 일어난 후 외교 당국에 학생들의 안전 귀환을 마련하라고 뒷북을 칠 게 아니라 처음부터 가지 말라고 뜯어말렸어야 했다. 가난한 나라 학생들과의 교류가 기름기 흐르는 나라 학생들과의 만남보다 더 값지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 가난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이다. 가난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안전조차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학교에서 가난한 나라에 굳이 학생들을 보내야 한다면 수도권을 떠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낫다. 저개발국일수록 교통, 통신 등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고 수도에는 각국 공관이 몰려있어 재난 대응이 다른 지역보다는 나을 수 있다. 태봉고의 경우 카트만두를 포함하여 자매학교가 있는 여러 지역이 방문계획에 포함돼 있었다. 그래도 수도만 고집할 수 없다면 한 곳에 아이들을 몽땅 보낼 것이 아니라 인원을 분산시켜서라도 위험을 낮추려는 대책이 있어야 한다. 태봉고 당국이 학생들을 네팔로 보내면서 안전을 조금이라도 염려했는지 묻고 싶다. 아이들을 한꺼번에 배에 태워서는 안된다는 것이 세월호의 교훈 중 하나였는데 태봉고는 그것을 망각했다.
 
1억 원 정도 들이면 아무런 등반 기술이 없어도 히말라야를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정상까지 등반 코스가 잘 닦여 있고 가이드나 짐을 들어줄 사람도 있다. 히말라야 관광등반의 주요 고객이 한국인이라고 했던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네팔로 돌아간 사람들이 현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사업에 뛰어든다고 들었다. 히말라야에 트레킹을 가든, 세르파에게 허리를 휘게 하는 짐을 지우고 안나푸르나를 관광등반하든, 어른들이야 무얼 하더라도 신경쓰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한테만큼은 가난한 나라에 발을 들이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지 체험이나 아시아 이웃들과의 교류가 아무리 가치 있다고 한들 제 목숨을 지키는 것과 겨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월호를 보면서 아이들의 목숨조차 지켜주지 못한 우리들은 미친 듯이 통탄하지 않았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안전임을 대참사를 통해 배워야 하는 현실은 슬프다. 학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교육도 안전이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을 소홀히 하는 일이 자꾸 일어나서는 안된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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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5/26 [18:0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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