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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kDoo의 소름돋기] 올드보이
15년 복수극에 관한 보고서, '금기와 악몽'은 계속된다
 
김정곤   기사입력  2003/11/26 [14:13]

* 주의 :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들은 가급적 이 글을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글은 영화의 주요내용들을 모두 드러내고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5번째 영화 '올드보이'는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복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현대 부조리 극이었던 ‘복수는 나의 것’이 진절머리 나는 복수(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올드보이’는 이 지긋지긋한 복수라는 테마로부터 도피하는 이야기로 보여집니다.

▲올드보이 중 한장면     ©쇼이스트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시피 동명의 일본 만화 ‘올드보이’를 원작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10년과 15년 이라는 시간적 차이, 일본과 한국이라는 공간적/역사적 차이, 그리고 원작에서는 단돈 1만엔(圓)을 뻑치기 일당으로부터 강탈하는 데 반해 박찬욱의 영화에서는 이우진으로부터 건네지는 수표다발로 상징되는 자본의 차이로 원작과는 전혀 다른 형질의 영화를 구축해 갑니다.

“모래알이든 바위덩이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

영화상에서 오대수는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단지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가장 끔찍할 수 있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무심코 연못에 던진 돌이 개구리들에게는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속담처럼 말이죠. 그래서 오대수는 자신의 세치 혀로 인해 파생된 비극으로 말미암아 이우진으로부터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되고 자신 또한 그 복수극의 한 가운데로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오대수는 자신이 밝힌 것처럼 오늘도 대충 수습하며 살아왔던 80년대의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가 별 생각 없이 놀렸던 세치 혀로부터 파생된 비극에서부터 시간은 시작되고 1988년 7월 5일 그의 시간은 멈춰버리지요. 이에 반해 이우진은 그 비극적인 79년의 7월에 멈춰선 인간입니다 비극적인 누나의 자살로부터 멈춰진 시간은 그를 언제까지 70년대에 머물게 하며 그래서 그는 거의 나이를 먹지 않은 젊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대수와는 불과 3살의 차이밖에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올드보이 중 한장면     ©쇼이스트

이우진은 오대수를 사설 감옥에 가둔 이유로 “말이 너무 많아서”라는 이유를 듭니다. 또한 관객 역시 그의 첫 등장인 파출소 장면과 고교 시절의 장면에서 그가 말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요.

“너 그렇게 말을 재미있게 한다며...”

하지만 오대수가 사설 감옥에 갇힌 이유는 그의 수다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의 수다스러움이 상대방을 즐겁게 해주는 수다였다면 그가 비밀이라며 친구에게 건넨 이야기는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될 이야기였던 것이지요.

그럼 처음에 얘기했던 원작과의 차이점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988년은 박정희의 뒤를 이어 유혈 입성한 군사정권이 비록 또 다른 군인출신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해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오대수의 감금은 시작되고 15년이 지난 2003년 7월까지 이어집니다. 이로 인해 원작의 10년은 한국의 현대사에 맞춰 그 시기를 달리하며 15년이란 세월로 늘어나게 됩니다.

70년대를 살아가는 이우진에게 자신이 사는 동질의 시대인 80년대를 넘어서는 오대수를 묵과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말이’ 많았던 오대수가 80년대를 넘긴다는 것 또한 용납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한번 파출소 장면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바로 10년 전만 해도 그러한 행위가 용납될 수 있었을까요, 그 지독한 군사정권 아래에서?

87년 이후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 한국 사회에 오대수와 같은 인간이 그대로 살아간다는 건 70년대의 인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바뀌는 지점, 새로움을 막 맞이하기 시작한 시점에 오대수는 감금됩니다.

하지만 70년대의 인간이 시대를 거쳐 새로운 세기를 넘어서는 건 한국사회에서 아주 간단한 일임에 틀림없지요. 원작에서 강탈할 수 밖에 없었던 1만엔이 게임을 풀기 위한 수표 다발로 바뀌는 건 한국이라는 자본사회의 논리임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박정희식 경제로부터 시작된 한국이 현실자본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으며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지요. 때문에 1만엔은 수표다발로, 고독한 추적자였던 원작의 인물은 복수가 성격이 될 수 밖에 없는 지독한 오대수로 바뀔 수 밖에 없었지요.

또한 원작에서 TV를 통해 사회를 역추적한다는 설정이 TV밖에 보지 못하다 결국에는 개미에게 자신의 몸이 뜯어 먹히는 환상을 보는 오대수라는 설정으로 바뀌기도 하는데 80년대의 인물인 그가 TV를 통해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역동적인 한국사회의 모습은 감당하기 힘들었을 뿐더러 점점 세상에서 도태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은 개미(사회)에게 먹혀버리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며, 이렇게 불안정한 오대수의 모습은 이미지 과잉의 화면과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럼 오대수가 얘기한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될 얘기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70년대의 공인된 비밀. 하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얘기였을 겁니다. 영화에서 근친상간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로 드러나는 이 비밀은 권력과 자본의 더러운 유착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배신하는 지독한 인권유린에 관한 비밀이 아닐까요.

▲올드보이 중 한장면     ©쇼이스트

그래서 70년대의 인간인 이우진은 미도라는 숨겨놓은 오대수의 딸을 통해 ‘그것 봐라 너희도 똑같지 않은가’ 라며 조소를 날리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해 나가지요.

이렇게 70년대와 80년대는 그들의 끈적거리는 유대와 공감대를 가지며 서로를 멸시하며 자위하지만 미도라는 90년대의 인간은 전혀 다른 지점으로 표시됩니다.

영화 내에서 수많은 의심과 학대를 당하기도 하는 그녀는 비록 같은 지점(80년대)에서 시작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요. 80년대의 규격화된 방송에서 탈피해 새로운 세기에 시작되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고, 어린 나이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경제적 주체로써 활동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녀가 보는 개미에 관한 우화는 현대인의 고독이 지난 시절의 억압적이고 집단적인 행위를 벗어나 얼마나 개인적인지를 보여주지요 .

하지만 이곳에는 한가지의 의문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영화의 말미 이우진의 말을 통해 오대수와 미도의 만남이 사실은 이우진에 의해 계획되어진 것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사실은 지금의 사람들 역시 70년대의 망령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사실은 그럴 거라고 믿는 최면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심어 놓습니다. 비록 이우진의 말을 통해 ‘그렇게 빨리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70년대 역시 의문을 품기는 하지만 말이죠.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오대수의 악몽 같은 기억을 또 다시 최면을 통해 분리하려고 할 때 최면술사는 한가지의 경고를 남겨놓습니다. 최면이 실패할 경우 모든 기억들이 뒤엉킬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게 어떤 상태인지는 말하지 않지요.

최면이 시작되고 오대수는 자신이 가진 역사 속의 기억들을 분리해냅니다

하지만 뉴질랜드의 광활한 자연풍광을 배경으로 서있는 그(들)은 영화 ‘브라질’에서의 마지막 장면과도 같이 주인공이 희망하는 환상 속의 세계가 아닐까요. 마지막 오대수의 미소는 결국 모든 악몽만을 지운 채 그 자신의 꿈속으로 도피한 것은 아닐까 합니다. 때문에 ‘아무리 짐승 같은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니냐고’ 울부짖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짐승 같은 살 권리 때문에 자신 속으로 도피해 버리고 맙니다. 다시는 그 짐승 같던 80년대의 망령을 이 시대에 불러들이긴 싫으니까 말이죠.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서 울 것이다”

한국사회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나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결국은 환상일지도 모르며 또 다른 자기최면일지도 모릅니다. 영화에서 오대수는 이우진이 남긴 박스를 열어보고 악몽과 같은 결과에 절망하지만 미도는 결국 상자를 열어보지 않게 됩니다. 이후 이우진으로 상징되는 70년대는 자살하며 오대수로 상징되는 80년대는 자신 속으로 도피하고 말지요 그럼 미도는?

▲올드보이 중 한장면     ©쇼이스트

미도는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 다름 아닙니다. 비록 70년대의 상징이었던 이우진은 자살로써 끝을 맺지만 그가 80,90년대를 지나 현재에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검은 뿌리는 아직까지도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영화 올드보이는 절망에 빠져 환상으로 도피하는 자들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지요. 80년대(만)을 살았던 오대수처럼 절망한 채 자기 속으로 도피하든가 아니면 맞서 싸우던가 (웃을 것인지 아니면 홀로 울 것인지) 그건 남아있는 우리들의 몫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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