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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가장 큰 죄는 한글 파괴 앞장선 것
[이대로의 우리말글 사랑]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는 사고 감추려는 정책
 
이대로   기사입력  2010/05/07 [17:50]
1994~1995년 정책과 세상 돌아가는 꼴 살피기

나는 2010년 4월 20일 대전시 유성구청(구청장 진동규)이 새로 생기는 마을의 행정 명칭을 외국어로 짓겠다고 해서 그 잘못을 일깨워주려고 대전시 유성구청에 간 일이 있다. 그 때 유성구청장이나 구의원, 유성구민이 모두 제 나라말을 버리고 영어로 마을의 이름을 짓는 게 세계화로서 잘하는 거로 생각하는 걸 보고 놀랐다. 그런데 내가 사는 서울의 구청장도 한글과 우리말 지키기 운동이 세계화 시대에 거스르는 거로 말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마치 토종 한국인으로 살려는 내가 한국에서 바보가 된 기분이다. 도대체 한국 사람이 한국 정부에 한국말과 글을 쓰자고 할 수 밖에 없는 꼴도 부끄러운 일인데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이 바보 멍청이가 되니 이 나라가 언제 제 정신이 들지 한숨이 나온다.

그래서 김영삼의 국제화, 세계화가 15년 만에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된 것을 확인하고 그 정책 결정과 시행초기 모습을 많은 분들과 함께 살펴보려고 15년 전 내가 모아 논 신문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그 때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15년 전 철저한 준비와 대비책이 없이 조급하게 밀고 나가는 국제화 세계화는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발 벗고 반대하고 막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진짜 점쟁이처럼 그 3년 뒤에 기업은 외국 투기자본의 밥이 되고 나라살림이 망가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그 세계화가 계속 우리 발목을 잡고 있기에 그 문제점을 짚어보련다.

▲ 1994년 일간지 보도 자료, 사고 대책은 뒷전이고 세계화와 영어조기만 외치고 있다.     © 당시 신문자료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1993년 11월 21일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대통령의 국제화”라는 제목으로 “국제화에서 영어와 한자를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게 하는 게 매우 중요하고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김영삼은 1994년 초에 ‘국제화 원년’이라면서 국제화추진위원회, 교육개혁위원회를 만들고 영어조기교육과 한자조기교육을 하겠다면서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날마다 떠들어 댔다. 그래서 국민은 혼이 빠지고 얼떨떨해 하면서 불안해했다. 공무원들도 들떠있었고 무엇이 자기가 할 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3월 25일 신문에 한 대학생은 “공무원도 일반인도 이제 영어 하나만큼은 해야 살 수 있다고 영어공부 걱정만 한다. 나도 10년을 영어 공부했는데 한마디 말을 못한다. 영어 공부나 하자.” 외치고 있다.

온 국민이 국제화와 영어에 정신이 빠져있다. 제 자리에서 착실하게 일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그 해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땅 속에서까지 큰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고 죄 없는 국민이 떼죽음을 당했다. 3월에 종로구 통신공동구에 불이 나고, 4월에 과천선 개통 후 8일 동안 21번이나 갑자기 서고, 8월에 삼량진 열차 충돌사고가 나고, 10월에 성수대교가 무너지더니 3일 뒤에 충주호 유람선이 불타고, 12월에 아현동 가스가 폭발해서 수 많은 목숨을 빼앗는 큰 사고가 일어났다.

그밖에 많은 사고가 일어나는 데 김영삼 정권은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처럼 여긴다. 그리고 연말에 아시아태평양 회의에 다녀오더니 세계화 구호를 요란하게 외치며 국민들 정신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 그 큰 사고 원인이 전부터 생긴 거라고 해도 그때 공직자나 기업과 국민이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면 얼마든지 예방하고 막을 수 있었다. 나는 그 그때 성남시 분당아파트에서 살고 일터가 서울이어서 날마다 성수대교를 건너서 출퇴근을 했다. 다리가 내려앉기 1년 전부터 다리에 구멍이 나서 철판을 깔아놓기도 했고 큰 차가 옆에 지나가면 다리가 흔들려서 날마다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그 몇 달 뒤에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 1994년 무너진 성수대교     © 행정안전부 재난안전실 자료 사진
그때 다리에 구멍이 나서 철판까지 깐 서울시 공무원들이 그 다리가 위험하다는 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 정신이 다른 데로 빠져서 그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나는 요즘 박사 학위까지 있다는 구청장들과 또 다른 공무원들이 세계화를 지껄이며 제 겨레말을 헌신짝 보듯 하는 것을 보면서 그 때 불안했던 일이 떠올라 이 글을 쓰고 있다. 두 번 다시 그런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때 신문에 보인 세상 모습을 소개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국제화 원년이라는 1994년 2월 22일 김경순 세계은행자문관은 한 신문에 쓴 시론에서 “정부는 국제화를 주도하기보다 건전한 방향제시나 민간분야의 자생력을 회복하는 데 보조역할을 하는 정도로 그쳐주었으면 좋겠다.”고 쓴다. 그러나 정부는 설익은 정책을 마구 쏟아낸다. 1994년 3월 26일 서울시 교육청은 96년부터 영어를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친다고 발표한다. 3월 10일 한겨레신문은 ‘지구촌 풍경’에서 “미 사립학교 살리는 한국 유학생”이라며 영어 조기유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린다. 1994년 10월 4일 한겨레신문은 “무역수지 적자행진 교속, 9월에도 5억 달러 적자”라고 쓰면서 나라를 걱정한다. 

그리고 1994년 5월 19일 중앙일보는 “허울뿐인 국제화위원회니 뭐니 위원회만 요란하고 각종 생색용 과제와 교육으로 진짜 일은 할 수가 없어 공무원 생활에 흥미를 일었다. 상공부 모 과장은 사표를 내고 공인회계사 사무실 냈다.”고 쓰고 있다. 9월 15일 한겨레는 “개혁 실종이 공직부패 키운다. 경악스런 공직 부패지수, 느낌 쫓는 즉흥정책 혼선 초래”라는 기사로 김영삼 정부를 타이른다. 그런데 그 때 모신문사의 이종구 국제부장은 ‘국제화와 배타주의’라는 제목으로 외제를 무조건 배격하고 국제화 열기가 식은 것을 탓한다. 그러나 서울신문 최택만 논설위원은 9월 8일치에 “고소득층 과소비 자제해야 한다. 해외여행비가 늘고, 외제차 판매가 급증한다. 2세들에게 절약과 근검정신을 심어야 한다.”라고 걱정했다. 

그런데 11월 18일 한국일보는 김영삼 대통령은 그런 걱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호주에서 “개혁에서 변화로 국정목표 전환, 차세대 위한 세계화 구상 ”을 선언했다. 11월 20일 귀국해서 “세계로 미래로 뛰자”면서 “세계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라고 큰소리로 떠든다. 그러나 경제부처 장관도 집권당 당직자도 그 세계화가 무언지 몰라 헤맨다. 한 신문 기사에서 기획원 장관 주재로 4시간이나 토론을 하고 나온 한 참석자는 “지금까지 올해를 국제화 원년으로 정하고 각종 작업을 추진해왔는데 갑자기 세계화로 바꾸라니,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혼란스럽다.”고 쓰고 있다. 집권당 김종필 대표와 당직자들도 세계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장님들 코끼리 만지듯 저마다 딴 소리를 하고 있었다.

1994년 12월 6일 치 한겨레신문은 “개인 외화보유 자유화, 해외예금 3만 달러까지, 여행경비도 2배로 늘려”라고 쓴다며 경제를 걱정한다. 2월 23일치 서울신문은 “외제 선호 병 다시 기승, 거의 사치품 과소비 풍조 심각”이라는 제목으로 “물가안정을 위해서 밀과 옥수수 등 어쩔 수 없이 들어오는 수입액은 20%이고 거의 사치품이다. 국제화의 영향이었다.”고 보도했다. 해외 조기 유학과 여행으로 달러가 물밀듯 빠져나간다. 1995년 1월 3일 세계화 한다고 금성사는 회사 이름을 LG로 바꾸고, 이어서 선경이 SK로 바꾼다. 1995년 1월 22일 서울신문은 “세계화 교육개혁 최우선 추진, 영어조기교육 강화한다.”고 쓴다. 1995년 5월 2일치 한겨레신문에 김태동 교수도 정부가 잘못한 것 열 가지를 알려주면서 “이렇게 잘못한 게 많은 데도 정부는 자화자찬이 심하고 국제화 추진 일 년도 안 돼 세계화를 추진하는 등 구호정치로 문제를 호도하고 있다.” 타일렀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끄덕도 하지 않고 “세계화는 선진국이 되는 길, 세계 1등만이 산다.”면서 영어 조기교육을 강화하는 등 세계화를 외친다. 1996년 7월 29일 중앙일보는 “경제관료, 일도 익히기 전에 툭하면 이동. 정책 전문성 설 틈이 없다. 재경원과 건교부 국장 2년 새 4명 교체”라고 말한다. 경제는 엉망인데 경제정책 전문가도 없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때 하이텔통신에 김영삼이 외국에 한번 갔다 오면서 ‘국제화’한다더니 두 번째 다녀오더니 ‘세계화’를 한다고 하는 걸 보면서 다시 외국에 갔다 오면 ‘우주화’를 한다고 하다가 망국화로 갈 거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세계화는 1997년 1월 한 신문에 “되살아나는 외채 망국론, 94년 이후 증가율 년 30% 넘어, 작년 말 1100억불 세계 3위, 단기외채 60%로 심각”이라고 나타난다. 1월 14일 경향신문도 “국제수지 위험수위, 무역적자 200억불 첫 돌파”라며 걱정했다. 1997년 1월 5일 경향신문은 “ 어른 사치병, 동심은 허영병, 고가수입 어린이용품 선풍, 외제 없으면 못 어울려, 초등생이 수표 써”라고 보도한다. 이제 갈 때가지 간 것이다. 그때라도 심각함을 알아야 하는데 김영삼은 솔직하게 국민과 기업에 호소하고 대비책을 세우지 않고 계속 흥청망청한다. 결국 그해 년 말에 국제통화기금의 경제 식민지가 된다. 그리고 회사는 외국인 손에 넘어가고 일터를 잃은 노숙자가 서울역 지하도를 메운다. 국민은 금모으기를 한다.

1996년 : (주)건영(현 LIG건영), 우성건설 부도
1997년 1월 23일 : 한보철강 (현 현대제철) 부도
1997년 1월 30일 : 한보건설한보그룹 최종 부도 처리
1997년 4월 7일 : 한보 청문회(4/7~4/25)
1997년 3 ~ 6월 : 삼미, 진로그룹, 대농, 한신공영그룹 등 대기업 연쇄 부도
1997년 5월 2일 :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20->23%)
1997년 7월 15일 : 기아그룹 협조융자 신청, 사실상 부도, 청와대 확대경제장관 회의.
1997년 8월 15일 : 재경원 종금사에 외화자금 긴급지원 검토, (3억$이상)
1997년 8월 25일 : 금융시장 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 대책
1997년 8월 27일 : 무역관련 자본자유화 폭 확대조치 시행
1997년 8월 30일 : 재경원 증시 안정대책 발표
1997년 9월 1일 : 무디스 방한 협의(9.1~5),주식매매수수료 자율화 시행
1997년 9월 10일 : 산업은행 외환채권 발행(15억불)
1997년 9월 19일 : ASEM 재무장관 회의 및 IMF/세계은행 총회 부총리 참석
1997년 9월 22일 : 진로그룹에 대한 6개사 법정관리를 신청
1997년 9월 29일 :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인 964원까지 상승, 사실상 거래 중단
1997년 10월 15일 : 쌍방울그룹 부도
1997년 10월 16일 : 태일정밀 부도, IMF 조사단 한국방문 

• [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 경제 일지- 위키백과사전 자료]

내가 김영삼의 세계화 정책 흐름을 살펴본 것은 일반인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 망국의 길을 다시 가지말자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그때 세계화를 부채질하던 학자와 언론인과 경제 관료가 지금 국회의원도 하고, 그 때 공무원들이 정부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 그때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게 하고 나라 말과 경제를 망친 대기업들도 공적자금을 물 쓰듯 하며 그 뒤 더 잘살고 있다. 이들은 지금 내가 이렇게 설명해도 이해하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보고 헛소리한다고 할 것이다. 지금도 성수대교에 구멍이 난 거처럼 무너질 게 많은 데 정부와 공무원은 모르고 있다. 또 다시 착한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꼴을 보지 않기를 두 손을 모아 빈다.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한글이름짓기연구소 소장
세종대왕나신곳찾기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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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5/07 [17:5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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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대로 2022/07/27 [09:12] 수정 | 삭제
  • 요즘 영어가 마구 쓰이는 일이 김영삼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한 나라를 이끌고 나라 살림을 맞는 이는 수백 년은 몰라도 수십 년은 내다보고 정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 수준이 코 앞도 제대로 못보는 얼빠진 김영삼 정치 수준입니다. 그가 키운 정치인, 그를 따르는 정치인들이 아직 판치기 때문에 나라 일이 자꾸 꼬이고 국민이 힘이 듭니다. 김영삼이 저지를 죄는 매우 큽니다. 나라가 망한 고종 때 기와집으로 경복궁을 복원한다고 한 것도, 광화문 한글현판을 떼게 만든 것도 김영삼으로부터 비롯되어 이명박, 문재인을 거치면서 뿌리내렸습니다. 큰 문제입니다.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이렇게 영어가 마구 쓰일 것을 내다보고 초장에 막아보려고 조금 감정이 들어갔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본 것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파트 이름은 말할 것이 없고 회사이름, 상품이름이 영어로 바뀌더니 거리 간판에 한글은 사라지고 영어가 판을 칩니다. 그리고 영어를 상용화 하자는 자들까지 나왔습니다. 영어를 상용하자는 것은 일본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말을 못쓰게 하고 일본어를 상용하자는 정책을 펴는 것과 통합니다. 너무 잘난 사람들 때문에 우리말이 죽고 나라가 몹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영어 바람을 잠재울 길이 없을 정도입니다. 너무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답답합니다.
  • 11 2010/05/17 [23:22] 수정 | 삭제
  • 그렇습니다. 저는 한자어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대로 선생님의 한글과 우리말에 대한충정은 이해가 갑니다. 언어는 도구입니다. 도구는 편리성에 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우리들에게 훌륭한 도구를 선물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 질 수 가 있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표음문자인 한글로 우리말을 소리나는 대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우리말은 고유의 토속어와 중국어 인도어 러시아어 일본어 아랍어등 수많은 언어들이 모태가 되에 형성된 말입니다. 단지 한자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 뿐입니다.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 하지 않았을때 과연 전문적이고 고급의 언어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위에 댓글을 다신 분은 한글파이시겠군요. 존경합니다. 저 역시 한글을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여 제 2의 문맹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한자혼용이 시급한 것은 사실입니다.한재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교과서 내용에 나오는 단어들을 질문하면 사전적의미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각합니다.
  • 한글 2010/05/09 [12:03] 수정 | 삭제
  • 윗 댓글에 대한 의견입니다.

    1.위 글은 다른 곳에도 올렸는데 글쓴이의 원래 글 제목이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는 큰 사고 감추려는 정책.1994~1995년 정책과 세상 돌아가는 꼴 살피기"였습니다. 이 대자보는 글 제목을 글쓴이가 쓴 대로 올리지 않고 대자보 자체 기자들이 새 제목을 지어서 올리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글쓴이가 한글과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글을 쓴 거로 더 오해한 거 같습니다.

    2.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영어 숭배 정책을 펴서 우리말을 파괴한 것은 곧 한글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자보가 제목에서 김영삼 정권이 한글을 파괴했다고 쓴 것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3. 위 댓글을 쓴 이는 글쓴이를 잘 아는 사람인데 글쓴이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한자파이거나, 김영삼 추종자이거나, 함께 활동하지만 섭섭한 감정이 있는 사람길 거라는 거지요. 아니면 좀 생각이 짧거나 인격이 ...

    4. 한국인들이 전보다 똑똑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곳에서 그런 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좀 더 넓고 큰 가슴으로 서로 감싸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든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알면 바로 고쳐야 하고...
  • 11 2010/05/07 [20:51] 수정 | 삭제
  • 한글과 우리말도 이해하지 못하시면서 글을 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