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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필 일기장에 드러난 DJ의 '자기 확신'
[정문순 칼럼] '정치인' 김대중의 글쓰기 스타일, 정치적 업적과 한계남겨
 
정문순   기사입력  2009/08/23 [21:52]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 몇 개월 전에 기록한 일기 중 일부가 공개됐다. 고인이 이승에 마지막 남긴 글이라는 점에서 유언에 진배 없는 비장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올해 5월초만 해도 자신이 건강하다고 했으니 사신의 발자취가 머리맡에 이르렀음을 예감한 것 같지는 않지만, 고인은 85년의 생애를 정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 많은 할애를 하고 있다. 

고인은 목숨을 몇 번이고 잃을 뻔한 남다른 고초를 겪은 것 못지않게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세속적 영예 역시 누릴 만큼 누린 것은 사실이다. 그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기에서 ‘행복’하다는 낱말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되었다. 고인은 “청장년 때의 빈궁한 시대”를 떠올리며 현재의 처지가 더없이 행복하다고 절감한다. 장수한 것, 몸이 건강한 편인 것, 아내와 해로하는 것 등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요인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끝낸 전직 대통령의 ‘비정치적인’ 평온한 삶에만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니다. 고인의 일기는 말년의 일상에 행복을 느끼는 은퇴 정치인의 평온한 기록이라고만 평가할 수 없게 한다. 일기에는 고인이 인간 김대중의 삶과, 당신 스스로 집권 기간 동안 이룩해 놓은 필생의 업적으로 자부하는 국가 정책에 대한 확신이나 정당성을 되새기고 거듭 다지는 흔적이 오롯하다. 이런 글은 일반인으로 돌아간 퇴역 정치인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노정객인 고인을 떠올리게 한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올 초 부터 6월4일 까지 기록한 일기 중 1월6일과 14일 자 내용.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장의위원회

가령 고인의 일기에서 어떤 내용을 기술할 때 1, 2, 3 차례로 번호를 달아 마치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듯 일목요원하게 요점을 나열한 것이 눈에 띈다. 낙서를 한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의 일기에 번호를 달아 기술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누군가가 보게 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일기에서 저자가 말을 건네고 교감할 대상은 바로 그 자신이다. 고인은 일기 쓰기에서 당신 스스로를 대화하고 설득할 상대로 삼고 있는 것이다.

번호가 매겨진 두 가지 글은 정치적 현안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는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의 통화 내용을 자신의 햇볕정책과 연관 지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의 직접적인 국정 참여의 예로 지난해 촛불시위를 평가한 것이다. 특히 안부 인사에 가까운 클린턴 장관의 통화 발언을 4가지로 번호를 매겨 정리한 부분에서는 가벼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고인은 바로 다음 단락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 보이는 통화 내용을 햇볕정책에 대한 현직 미 국무장관의 지지로 풀이해낸다. 민주주의가 거꾸로 줄달음치는 시대에 자신이 일궈놓은 필생의 정치적 가치와 업적이 퇴색하는 위기를 보며 당신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할 필요를 느꼈는지 모른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 자기 확신적인 태도는 그의 글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다. 
 
6월 2일치 일기를 보라. “71년 국회의원 선거 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한 문장 안에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 어디를 왜 다쳤는지 설명하는 세세한 정보의 기술은 일기가 아니라 마치 다른 사람을 독자로 상정한 글을 보는 듯하다.
 
자신의 특정한 신체 부위가 불편한 이유는 당신 스스로 너무도 잘 알 것이다. 당신이 일기의 유일한 독자인 당신 자신에게 몸을 다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 당신의 몸이 어떤 정치적 박해를 받았고, 그 피해가 한 인간의 몸에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진술함으로써 고인은 정치인 김대중의 부분적인 정체성을 스스로 그려내고 있고, 이를 통해 독재 정권에 가장 가혹하게 시달린 피해자요 그것에 저항한 정치인으로서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확신하고자 하는 태도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많지 않은 이번 기록에서 고인의 확고한 자의식은 갈피갈피에서 찾을 수 있다. 비슷한 진술의 반복을 통해서도 그것은 드러난다. 고인의 글쓰기는 여러 방향으로 확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향해 계속 파고들고 있으며, 새로운 관점을 향해 퍼져나가기보다 한 주제로 응집되고 있다. 이 역시 자기 확신을 깊게 다지기 위해서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글쓰기.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기록에서 글쓰는 자신을 독자로 상정하고 자신에게 확고한 동의를 구하는 글쓰기. 이는 천성적인 것인지, 아니면 험난한 정치 역정을 거치며 몸에 배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고인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이요 개성이 되었다. 자기 확신을 향한 끝없는 갈구는 빛과 어둠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고인이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 남긴 불멸의 업적과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에 동반하는 그림자도 일정 부분 이런 태도에서 연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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