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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kDoo의 소름돋기] 여고괴담-여우계단
여우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전혀 무섭지 않은 '괴담'
 
김정곤   기사입력  2003/09/23 [10:41]

여우계단은 감독의 무절제한 과잉이 실패의 원인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진단해 봅니다. 우선 기본적 틀을 '여고괴담' 내에서 이끌고 가려는 강박증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은데, 여고 특유의 억압적인 분위기 내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이 자아내는 공포적 요소들에 관한 강박증 말입니다.

▲여우야, 여우야 내소원을 들어줘! / 영화 여우계단 중 한장면     ©씨네2000
이전 여고괴담의 경우 이 촌스러운 제목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이슈들을 생산해 냄으로 인해서 국내 호러 영화의 새로운 계보를 형성한 영화로 손꼽을 수 있지요. 하지만 이번 여우계단의 경우 그런 문제들은 단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필요할 수도 있는 문제로 취급됩니다. 오와 열을 맞춰 행군하듯이 뛰는 아이들과 그들을 지도하는 담당 선생들의 형태를 군대의 교관과 비슷한 수준으로 취급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군대 문화의 사회침투에 관해서는 어떠한 논의나 논평조차도 없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일까요? 감독이 단지 자신이 생활해 왔던 예술고의 분위기를 현실성 있게 만든다 해도 그런 군대문화의 사회 침투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없었음에 일단 서글픔을 느낄 수 밖에 없네요.

여고괴담 때에도 사회적 논의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서 현실 교육의 대안들이 어느 정도는 논의되고는 했었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들의 하나인 군대문화로부터 파생된 상명하복식의 일방적 명령체계에 의한 인간의 사회 부품화와 그릇된 사회 체제들을 단지 견딜 수 있다는 (아니면 견디면 안되게 끔) 패배주의적 인식을 성공적으로 심어놓은 데는 군대식의 '하면 된다'와 '까라면 까라' 같은 일반적이고 폭력적인 지시문화가 근본적인 이유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여우괴담은 전형적인 어반 레젼드에 관한 얘기입니다.

어린시절 들었던 유관순 누나의 고문에 관한 열 두 가지 비밀이라든지, 이순신 동상에 관련된 이야기처럼 말이죠. 이런 것들을 여성적인 틀로 가져온 게 여우계단입니다. 많은 곳에 전해 내려오는 백팔 계단에 얽힌 전설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어머니 세대의 백팔 계단을 현대의 여고에 맞춘 게 여우계단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남성적 시각으로 표현된 신데렐라 이야기가 이루는 허무적인 욕망의 실현을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계단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간절히 원하면 실현된다'

▲영화 여우계단 중 한장면     ©씨네2000
사실 이러한 컨셉은 상당한 공포를 자아내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우괴담에서는 이러한 영화적 소재를 극적으로 살리는데 상당부분 실패한 듯이 보입니다. 그건 그러한 원초적 욕구를 '박한별'과 '송지호' 그리고 '조안'이라는 자폐적 인물로 구현화 한데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모두가 어떠한 부분에 너무나도 집착하는 자폐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요 박한별은 지호에게, 지호는 자신의 일차적 욕망에, 그리고 조안은 박한별에게...

이러한 부분들은 일단 관객에게(일반적인) 어필하기 힘든 요소임에는 분명합니다. 특수목적고등학교, 그 중에서도 좀 더 특별해 보이는 사람들의 집단인 예술고등학교에서도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박한별과 지호에게 일반인들이 감정적으로 동조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뿐더러 자폐아의 전형처럼 보여지는 조안 역시 일반인들이 다가가기에는 아주 힘들지요. 이런 일반적 상황들에 관해서는 논외로 하고 이 영화가 지향하는 호러적 감수성에 대해서 한번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떠한 자폐증적 욕망은 보통 스릴러 영화에서 자주 드러나는 관습입니다. 하지만 여우계단에서는 이를 일상적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송지호에게 들어내는 집단적 거부가 그러한 의식의 산물일 뿐더러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실재하는 여고생(못났건 잘났건)의 투영인 못난이 두엣에게 집중되던 카메라의 시선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타자의 그것에 다름 아닙니다. 때문에 여고의 병폐는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고 외부의 억압적인 요인은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흘려버리게 합니다. 또한 이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잘못된 계단의 헤아림은 이들의 일그러진 욕망이 이 여우계단이라는 초현실적 주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폐적인 여고생들의 강박관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게 아닐까라는 뉘앙스마저 던지고 있습니다. 결국에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잘못된 가치들에 있을 수 있다는 체제순응적인 가치적 문제마저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박한별이 원귀가 되는 뚜렸한 욕망의 징후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쓸데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빌었던 소원처럼 단지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 정도의 것이었는지는 일반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뿐더러 박한별을 능가하는 조안의 집착은 안쓰러울 정도이지요 (물론 조안의 경우에는 그나마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차라리 문득 보여줬던 송지호의 '씨바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라는 듯한 모습이 차라리 긍정적이었지요. 영화의 후반 조안이 보여줬던 귀신들린 연기에 비하면 관객으로썬 훨씬 수긍이 가는 부분이지요.

감독은 이 영화를 정말 무서운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최초의 이 영화가 가졌던 약간의 사회적 문제 제기마저 포기할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그건 감독의 과욕이지 않을까 합니다. 단지 몇 마디로 말하자면 '너무 많이 봤던, 하지만 너무 몰랐던 감독'이라고 얘기하고 싶군요.

▲영화 여우계단 중 한장면     ©씨네2000
오프닝 이후 첫번째로 보여지는 죽음은 나카다 히데오의 '여우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드러나는 다른 영화와의 연관성을 제외하고도 이 영화의 감독에게 가장 큰 문제는 공포영화 장르의 호흡에 관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링'의 한 장면을 벤치마킹 하면서도 전혀 공포를 주지 못했다는 건 감독이 관객이 원하는 바를 전혀 이해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링이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며 공포의 지수를 점차적으로 올려 갔던 것에 비해 여우계단은 단지 일회성의 공포를 그것도 식상하게 보여줌으로써 많은 부분을 스스로 버려 버렸다고 보여집니다.

영화의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 중 하나인 조안의 빨간 우산과 그녀의 뒤를 터닝해 가는 박한별의 모습을 담은 장면은 일상성적인 공포를 꽤 그럴 듯 하게 담은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뒤에 몇 장면을 더 삽입함으로 인해서 첫 장면의 공포감을 반감시키고 있지요. 이런 장면들은 뒤에도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링', '여우령', '주온',  '회로' 등의 장면에서 인용한 듯한 장면들이 일방적 쇼크 효과에 만족했다는 건 상당한 마이너스적 요인임에 분명합니다.

이 영화는 호러 영화의 일반적 관습을 그대로 답습해 나가면서 그것들을 좀더 길게 늘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건 기존의 공포영화가 가지던 관습을 엿 먹이는 행위일 뿐이지요. 관객이 느끼는 공포는 단지 잔혹한 이미지와 기괴한 모습이 장시간 보여지는 게 아닙니다.

여우계단은 몇몇 소름끼칠 만한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오히려 희석 시켜 버렸던 아쉬운 영화입니다. 더불어 사회적 이슈를 생산해 낼만한 충분한 토대가 마련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회피한 채 단지 무서운 영화로 남고자 했다는 데는 좀더 많은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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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9/23 [10:4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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