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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전력자 감싸는 작가 김수현의 독특한 감수성
[정문순 칼럼]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지가 성폭력 둔감증 부른다
 
정문순   기사입력  2008/10/30 [01:10]
여성 문제를 논할 때 가장 답답한 것은 남자들의 몰이해나 편견과 만날 때가 아니다. 어차피 남자가 여자의 처지가 돼보지 않는 한 성폭력 같은 문제를 절실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범죄를 여성만이 당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는 남성의 경우 성폭력은 사회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성만 짊어진 문제일 뿐이다. 많은 경우 자신과 같은 성이 가해자이기에 남자들은 더욱 이 문제를 외면하고 싶어한다. 

같은 논리대로라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누구든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범죄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단호하게 반응해야 정상일 것이다. 성폭력을 특정 개인만을 향한 범죄가 아니라 여성 전체에 대한 범죄나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피해 여성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파하고……. 그러나 이런 반응과 전혀 동떨어진 여성을 만나거나 ‘동족’으로 알았던 여성에게서 ‘배신’을 당하는 기분이 들 때, 그것만큼 서운하고 속상한 건 없다. 

여성이 같은 여성의 처지를 환영하지 못할 때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쉽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틀리진 않을 것이다. 흑인의 적은 흑인이고, 노예의 적은 노예이고, 비정규직의 농성장을 때려 부수는 자들은 그 자신들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인 경비 용역들이다. 강자에게 빌붙어 같은 처지의 약자를 억누르는 약자의 존재는 꼭 여자한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약자에겐 자신에게 힘을 보태어줄 이웃도 친구도 없다. 죽으라고 노력해도 약자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절망을 느끼는 사람은 차라리 강자의 논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자신을 약자와 다른 위상에 두려고 하는 것도 약자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싸워야 할 적은, 여성의 단결을 바라지도 여성을 환영하지도 않으면서 고양이 쥐 생각해주듯 여성의 분열을 걱정해주는 척하며 쾌재를 부르는 남자들의 입버릇대로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까지 포함한 세상 전부다. 

▲ 지난 2001년 청소년 성매매 사건으로 한동안 브라운관을 떠났던 배우 이경영. 최근 김수현 작가는 이 씨에 대한 '용서'를 호소하며 연예계 복귀를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나는 약자가 약자 편에 서지 않음을 머릿속 관념으로만 당연하게 받아들일 뿐 아직 몸으로까지 납득할 수는 없다. 방송작가 김수현이 몇 년 전 영화 출연을 미끼로 미성년자 원조교제를 한 사실이 발각돼 연예계를 떠나 있던 배우 이모 씨를 그만 용서해주자라고 말했을 때, 그 사건 이후로 한 사람이 영영 대중문화판에서 퇴출 당한 줄 알고 있었던 내가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당하는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마비된 김수현의 감수성은 엉뚱한 쪽으로만 작동한다. 이 씨와 가까운 사이로 보이는 김수현은 한 사람의 연기 솜씨가 썩히는 건만 아까워했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가야 하는 한 여성의 처지에는 일부러 눈을 감았다. 이런 경우 내 입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말을 참을 수 없다. 김수현 당신은 여자가 아니란 말인가? 

다행히 시청자들은 뿔이 났다. 수 천 건의 항의글이 인터넷 게시판을 뒤덮었다.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 그만 봐주자 따위 말은 나오지 않았다. 김수현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이 그래도 드물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우리 사회의 양식이 아직은 건강하다고 믿어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수현을 욕하는 이들도 피해자의 처지를 제대로 배려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성폭력 전력자와 그를 옹호하는 사람에 대한 정당한 분노에서마저 피해자는 소외되어 있음을 느낀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우선, 이 씨를 용서해주자는 김수현의 말에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답변한 시청자들은 용서라는 것이 자신들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대학원 재학 중 지도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한 어떤 여성은 그 작자가 텔레비전에 천연덕스럽게 나오는 모습을 보자 하혈을 했다.(교수성폭력대책위) 

시청자들은 성폭력 전력자를 ‘마음’으로 거부할 뿐이지만, 피해 당사자는 ‘몸’이 먼저 받아들일 수 없다. 시청자들은 보기 싫은 자에게 돌만 던지면 그만이지만, 피해자에게 그 돌은 거꾸로 자신을 향한다. 몸의 거부 반응은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내 몸에는 십 수 년이 지난 뒤에도 피부 두드러기와 발진이 찾아왔다. 의사는 혀를 차며 흉터가 영원히 남을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 씨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 화면을 누비는 것을 보살행의 마음으로 용인할 수 있는지는 그 피해자에게 물어봐야 한다.

성범죄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이 흔히 받는 비난은 “당신 가족이 당했다면”이란 말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가해자를 제 가족처럼 챙기는 김수현에게 자신의 딸이 피해자라고 생각해볼 것을 주문했다. 피해자를 가족으로 가정해보는 일은 아무리 큰 아픔을 입은 사람이라도 그가 내 피붙이일 때만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가족 관계로 설정해보지 않으면 피해자의 상처에 제대로 감응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감수성이 무디고 척박한 것일까. 나와 가까운 사이인 경우에만 당사자의 아픔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그건 이 씨와의 친분을 이유로 그를 싸고도는 김수현의 고통 나눔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 김수현이 가해자를 옹호하는 방식을 빌려 그녀를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미성년자 성폭행 전력자를 편드는 사람에게 해줄 말은 “피해자가 당신의 가족이라면”이 아니다. 남의 고통에 눈꼽 만큼도 연대할 줄 모르는 사람은 몸의 감각과 감수성의 지수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지부터 의심해보아야 한다. “당신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인가?”   “당신은 친한 사람의 아픔에만 반응하는 인간인가?” 
 
피해자의 상처와 연대할 수 있는 길은 피해자와 같은 성별인 것도, 가족 관계로 설정하는 것도 아닌, 그의 눈물을 기꺼이 함께 흘릴 수 있는 마음이다. 남의 눈물에 마음을 적실 줄 모르는 사람은 피해자가 아무리 큰 고통에 처할지라도 자신과 무관한 사이일 경우 마음이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오직 김 아무개 작가처럼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대수롭지 않은 일에나 움직일 뿐이다. 

물론 이 씨와 김수현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모든 성범죄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피해자가 ‘뭘 모르는’ 미성년자가 아니라 성인 여성이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성인 여성이 성폭력 피해자일 경우라면 사람들이 과연 그의 고통에 얼마만큼 마음을 열었을지는 의문이다. 피해자의 아픔에 그대로 공감하는 건 고사하고 피해자를 자신의 가족으로 바꿔놓고 생각할 수나 있었을까.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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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0/30 [01: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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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완 2010/03/05 [08:42] 수정 | 삭제
  • 그렇죠. 그 수많은 폭력들중에 저 분은 지금 성폭력을 말씀하고 계신거구요;;
  • 과객 2008/10/31 [14:34] 수정 | 삭제
  • 총, 칼, 몽둥이로 자행되는 폭력이나
    언어나 무형의 것들로 공갈협박하는 것이나
    성 폭력이나 모두 같은 폭력들입니다.

    육체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폭력이나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폭력이나
    모두 약자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폭력은 사라져야 합니다.
    약자도 강자도 절제를 할 줄 아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성 폭력에 대하여 분노할 것이 아니고
    님이 말씀하시는 넓은 의미의 폭력에 대하여, 비양심에 대하여 분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