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낙태는 여성 몸의 권리이자 낡은 제도와의 싸움
[정문순 칼럼] 페일린 모녀, 돌팔매질하지 말아야 할 제도권 밖의 성
 
정문순   기사입력  2008/09/09 [16:13]
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 세라 페일린이 임신한 십대의 딸과,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딸의 남자 친구와 함께 대중 앞에 선 모습을 보니 부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국 같으면 부통령 당선을 바라는 건 고사하고 모녀가 한 묶음으로 패가망신당하고도 남는 집안 풍경이었을 것이다. 당당하고 해맑은 얼굴을 한 10대의 미혼 임산부는 한국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페일린은 극단적인 보수주의를 표방한 목소리로 부통령 후보에 낙점된 인물이며, 보수주의자들은 혼전 임신도, 피임도, 낙태도 몽땅 반대한다. 혼전 임신을 반대하면 피임과 낙태는 싫어하지 말아야 논리적인 아귀가 맞을 것이다. 페일린만 하더라도 알래스카 주지사로 있으면서 미혼모 지원금을 삭감했다고 한다. 미혼모를 용납하기 힘들다면 그것이 생기지 않게 하는 피임과 낙태에는 관대해야 하는데 보수주의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톨릭 교황이 방문하는 곳의 사람들은 거리에 콘돔 모형을 세워 놓고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낙태에 대해 사람으로서 감히 못할 짓이라고 흥분하는 로마 교황청은 사람이 못할 짓이 일어나지 않도록 피임을 좋아해야 옳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피임과 낙태, 비혼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납득하지 못하는 건 제도권 밖의 성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기성의 권위와 기득권을 옹호하는 종교 집단이나 보수주의자들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본인의 판단에 따라 관리하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다. 보스니아 내전 때 어느 수녀는 적군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했음에도 낙태를 결행하지 않았다. 수직적 교회 체제의 말단에 놓인 그녀의 몸은 원치 않는 생명을 배제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미국의 보수 기독교가 생명 존중을 외치며 낙태를 반대하면서도 정작 사형제를 옹호하는 모순은, 이들이 여성과 사형수라는 약자가 누려야 할 몸과 생명의 천부적 권리를 외면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여느 보수적인 사회처럼 혼전성교를 금기시하는 한국은 낙태에 관해서만큼은 자가당착적인 성적 보수주의자들처럼 강력하게 제동을 걸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낙태는 공공연한 불법이  된 지 오래다. 해마다 태어나는 신생아만큼의 생명이 빛을 보지 못한다는 보고가 있고, 선진국 수준의 나라들 중 한국의 낙태율이 가장 높을 것이라고도 한다. 낙태 수술한 산부인과 의사가 처벌을 받는 경우는 신문에나 나오는 일처럼 희귀하다. 외국에서는 해외 입양, 개고기 식용과 더불어 한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로 다뤄지기도 한다. 

낙태가 불법 아닌 불법이 된 건 1970년대 경제 개발기의 산아제한 정책과 무관할 수 없다. 당시 경제 사정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늘어난 인구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려고 부심하는 나라에서 낙태는 정부 정책과 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국민을 들볶은 정부로서는 낙태를 조장할지언정 제동을 걸 리 없었다. 군사정권이 총칼로 통치하는 시대답게 여성의 출산권에도 권력이 개입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사회적 약자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한국 특유의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대통령 후보 시절, 낙태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만 장애인만큼은 예외라고 한 지금 청와대 주인의 발언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가 유독 낙태에 강경하지 않은 이유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약자가 세상과 호흡하기 전부터 솎아내려는 사회가 낙태에 관대한 태도를 낳는다면, 다른 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이 낙태를 반대하는 건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한 대우를 하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낙태가 약자를 발본색원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나라에서 낙태를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접목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성의 처지에서 볼 때 태아는 독립된 생명이기 이전에 전적으로 여성 몸에 속한 것이다. 여성 권리의 역사는 낙태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고, 낙태는 여성이 사회가 금기시하는 비혼 임신과 출산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몸에 대한 권리의 행사이다.

여학교에서 성교육이랍시고 낙태 장면을 비디오로 보여주면서 어린 여학생들에게 충격과 죄의식을 주입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미성년이나 미혼의 성을 무작정 백안시하는 것은 오히려 성에 관해 여성을 수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다. 외면이나 회피는 사람을 각성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로 이끈다. 교회에서 가르치듯 몸의 욕망을 죄악시하는 것은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차단하도록 이끌 뿐이다.

남성 중심의 사고가 지배하는 성에서 여성의 수동적인 태도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예기치 않은 임신은 성을 즐겨서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을 주체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환경이 낳은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여성의 몸에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기 이전에 여성의 몸을 여성 자신의 관리 아래 두도록 피임법을 확실히 가르쳐줄 일이다.

페일린은 딸의 남자친구를 만인에게 선보이고 그를 미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딸의 ‘불장난’을 무마시켰다. 돌팔매질을 받을 뻔했던 미혼의 성은 가족 제도에 편입됨으로써 되레 보수주의자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혼전 임신, 낙태, 피임, 미혼모의 존재는 자기 몸에 대한 여성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태도와 결부될 뿐 아니라, 기존의 가족 제도에서 이탈하는 비혼 가족이나 독신 가구 등 새로운 가족 제도와 맞물릴 수 있지만, 페일린의 딸에게서 보듯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죽을 때까지 한 아이의 생부라는 사실을 감출 수 없는 페일린 딸의 남자 친구가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도 자신이나 여자 친구의 임신 사실이 확인되면 비혼 상태보다 결혼을 선택함으로써 알 수 없는 자신의 미래를 기성 제도가 보장하는 당장의 안전함에 내맡기는 젊은이들이 많다. 

보수주의자들이 두려워하는 건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움직임이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 아래 두는 것이야말로 낡은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공포로 작용한다. 몸의 권리 확보와, 낡은 제도를 넘어서는 혁명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때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09/09 [16:13]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이왕철 2008/09/10 [10:08] 수정 | 삭제
  • 아무이유 없이 낙태 당하는 생명은 어쩌시렵니까? 단지 여성의 권리 또는 자신의 행복을 이유로 생명을 죽이는게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종교,권리 또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존중의 문제이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