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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광적인 민족주의, 남 탓할 일 아니다
[정문순 칼럼] 스포츠 정치적 왜곡과 과격한 민족주의, 한국도 돌아봐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8/05/02 [17:24]
한국에 온 저개발국 출신의 이주민들에게 한국인들이 곧장 던지는 질문에는 이 땅을 밟기 위해 돈을 얼마나 들였는지, 출신국 사람들 중에 한국행을 꿈꾸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는 것들이 빠지지 않는다. 답을 뻔히 알고서 던지는 이런 질문들에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브로커를 끼고서라도 오고 싶어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한국인들의 우월감이 숨어 있다.
 
언젠가 취업을 위해 한국에 온 후 결혼으로 국적을 취득한 중국 출신 여성을 만나봤을 때도 내 주변에 있던 '토종' 한국인들은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대답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물론 중국에는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1980년대에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고 싶어 했던 것과 똑같아요"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지 못한 질문자들은 한 방 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 그랬는지 속으로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틀린 말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얕잡아 보는 듯한 태도에 이처럼 당당하게 받아치는 이주민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얼마나 궁핍하고 희망이 없는 나라에 살았으면 멀고 먼 이국에까지 왔겠는가 하는 한국인들의 반응 앞에 그들의 어깨는 움츠려들기 쉬울 것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대응하려다가는 되레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으니 참고 견디는 게 속 편할 수도 있다. 이건 약자가 살아남기 위한 생래적 반응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유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개인 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만큼 유학생은 공부한 나라에 친밀한 감정을 가지기 쉽다. 본국에 돌아가 한국 유학 경험을 장래의 밑천으로 삼으려는 대부분의 유학생들에게 한국 땅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거리낌없이 내기가 힘든 곳이다. 미국 유학 경험 있는 한국인들이 미국을 제2의 고향처럼 여기고 친미적인 의식을 왕왕 드러내는 것에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을 둘러싼 폭력 시위의 중심에 중국 유학생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 원인을 그동안 한국인들에게 무시당해왔던 중국인들이 불만을 터뜨린 것으로 보기에는 이들이 느끼는 올림픽의 정치적 의미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올림픽과 관련해서 만큼은 한국 땅의 중국인들은 약자의 본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무시당해도 숨을 죽이고 얌전히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 한국인들을 향해 폭력을 쓸 만큼 이들이 휩쓸리고 있는 애국주의 광풍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모래알 같은 개인이 받는 무시는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본국을 겨냥하는 태도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고급학문을 배우는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고작 국가라는 틀 속에 자기 존재를 구겨 넣는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딱하고 우려스럽다. 그러나 올림픽 성화 봉송을 저지하는 세계 곳곳의 움직임을 중국에 대한 도전으로 보거나, 올림픽 개최를 국가적 자존심과 일치시켜버리는 이들의 광기는 한국인들에게 별로 낯선 것이 아니다. 한국은 중국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스포츠와 정치 구호의 결합에 익숙한 역사적 전통이 있다. 국제적 체육행사를 국위 선양의 도구로 톡톡히 삼았던 시대가 과거에도 있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올림픽이나 월드컵 시기만 되면 고질병이 여전히 발동하는 한, 폭력 시위를 비난하는 한국인들에게 월드컵 때 한국인들은 국가적으로 흥분하지 않았느냐고 한 중국 유학생들의 항변에 할 말이 없어진다.
 
8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나에게 올림픽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지긋지긋한 이름이다. 군사정권의 무궁한 번영을 위해 올림픽은 마법 같은 주술을 발휘하던 시대였다. 그 이름만 갖다 붙이면 안 될 일도 되었고, 연관이 없어 보이면 될 일도 망가졌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구실로 시민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철저하게 재갈이 물려지는 동안 올림픽은 국민들의 순진한 애국심이 학살자의 면죄부 용도에 바쳐지도록 조화를 부렸다.
 
교육에 쓸 예산마저 올림픽 기간에 외국인이 들를지 모르는 화장실 짓는 데 빼내 썼던 국가적 광란을 잊어버린다면, 말썽을 일으킨 중국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적인 비난은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한다는 소리를 듣기에 족하다. 정당성 없는 군사정권이 한국인의 민족 감정을 부추겨 스포츠 행사를 광란의 국가주의 선전장으로 만들었던 역사가 있는 한국인들이 중화민족주의의 발호를 비웃고만 있을 수는 없다. 감히 중국인이 우리를 때렸다고 흥분하기 이전에 체육 행사에 국가적 자존심을 거는 유치한 버릇이 잔존하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낫다.
 
베이징을 방문한 세계 사람들이 중국이 올림픽을 치를 수 있을 만큼 발전했구나 하는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중국 만세'까지 부르짖을 리 없는 것처럼, 올림픽이든 월드컵이든 체육 행사가 아닌 문화 행사든 국가적 역량이 온통 쏟아 부어져 근사한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하여 외국인들이 단발성 행사에서 한민족의 위대한 역량을 발견해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광기 어린 민족주의는 자국 바깥의 사람들이 그런 상식적 사고를 할 것이라는 판단마저 마비시킨다. 세계적인 규모의 스포츠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자기도취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만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인들 눈에 자신들이 어떻게 비치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달아야 하는 건 중국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민족주의, 국민 동원, 정치권력의 옹호 등 정치와 스포츠의 결합은 대체로 불행한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정치적으로 순수한 스포츠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글러먹었는지 양자택일이 있을 뿐이다. 이왕 불순할 바에야 정치적으로 정당한 스포츠가 되는 게 나을 것이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시상식 단상에 올랐던 미국의 흑인 선수 2명은 성조기를 보며 감격하기는커녕 주먹을 치켜듦으로써 당시 자국내 흑인 시위에 개를 풀어놓을 정도로 야만적이었던 미국의 인권 유린에 저항했다. 그와 비슷한 장면을 베이징에서도 보는 기대를 해본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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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5/02 [17: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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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08/05/03 [02:14] 수정 | 삭제
  • 중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비난해봐야 달라질 가능성 없거든.

    저들 민족주의 보며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고 해봐야 자위행위하는거나 마찬가지거든.

    이건 정치적 시각으로 봐야지 당신네들처럼 앉아서 중국 보고 외쳐봐야
    속으로 갸들의 비웃음 대상밖에는 안돼

    그들을 실제로 변화시킬 능력없으면 우리도 긴장하고 대비해야지 넋놓고 앉아서 '대범한 훈계'해봐야 아무도 안 알아준다.
    그게 국제관계야.

    그리고 한국에 제대로 된 우파나 제대로 된 민족주의가 있기나 했나?
    실체도 없는 대상 가지고 비판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도록.

    난 이 땅에 제대로 된 우파가 없어 제대로 된 좌파도 안 섰다고 보는 사람이야. 전부 사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