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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공화국'의 공존공영을 위하여
[강준만의 세상이야기] '음지의 문화' 연고주의, 공익적 성격 가미하자
 
강준만   기사입력  2008/02/22 [16:00]
태안의 자원봉사 기적
 
이른바 '태안의 비극'은 '태안의 기적'을 낳았다. 언론은 유출된 기름 제거를 위해 태안에 밀려든 자원봉사자의 물결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한국이 곧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쳤다.

한국은 참으로 묘한 나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고생들의 강요된 엉터리 자원봉사를 비판하면서 나라의 장래를 개탄하는 기사가 흘러넘치지 않았던가? 당시 부모가 자녀 대신 잡일을 해주고 확인서를 받아다 주는 경우도 많았고 아예 연줄을 동원해 확인서만 거저 받는 경우도 있었다.2) 그랬으니 학생들이 '자원봉사'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원봉사' 개념을 더 타락시킨 건 선거판 자원봉사였다. 지난 2005년 열린우리당 의원 김덕배는 한 달간 '자원봉사자'를 200명 동원하는 데 3억 원이 든다며, 인간적인 차원에서라도 돈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선거법이 엄격해졌다고 하지만 자신을 도와주는 참모와 조직원, 자원봉사자들에게 '맨입'으로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하철역 앞에 나가 하루 종일 허리 굽히고 홍보물 나눠주며 큰 소리로 지지를 호소하다 보면 다음날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미안해서라도 최소한의 '성의' 표시를 안 할 수 없죠."3)

그랬던 자원봉사 문화가 이렇게 빨리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이와 관련, 어느 신문은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아름다운 전통이 자원봉사로 되살아난 것이다"라며 "추악한 싸움으로 지새우는 정치판은 우리의 진정한 영웅들을 본받아라"고 호통쳤다.4) 그러나 그 '진정한 영웅들'은 상황에 따라선 '추악한 싸움으로 지새우는 정치판'의 문법에 충실한 삶을 살기도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건 없다. 한국인은 스스로 내켜야 하는 사람들이다. 법이나 규칙의 제정보다는 분위기 조성이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태안의 기적'엔 수많은 감동 스토리가 줄을 이었지만, 내가 가장 주목한 건 어느 동창회가 연말 모임을 태안에서의 자원봉사로 대체했다는 걸 알린 기사였다. 
 
'음지의 문화'로 번성하는 동창회
 
동창회, 동문회, 또는 교우회로도 불리는 학연 문화는 한국의 모든 연고 문화 가운데 참여율과 영향력이 으뜸이다. 2006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회적 자본 실태 종합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회적 관계망 가입 비율은 동창회가 50.4%로 가장 높고, 종교단체 24.7%, 종친회 22.0%, 향우회 16.8%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공익성이 짙은 단체들의 가입률은 2%대에 머물렀다.5)

언론은 사회적 관계망 가운데 시민단체의 활동에 가장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지만, 한국 사회의 실세는 동창회지 시민단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동창회는 '음지의 문화'로 취급받는다. 아니 '이중성의 문화'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사적으론 동창회를 가장 사랑하고 가장 많은 신경을 쓰지만, 공적으론 감추려 든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사건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주범들이 대부분 학연으로 똘똘 뭉쳐 있다. 어느 조직에서건 인사 문제로 잡음이 일어나는 걸 보면 대부분 '학연 마피아'의 독식과 관련이 있다. 대학의 총학장 선거에서부터 학회 회장 선거에 이르기까지, 비정치적인 엘리트 집단의 선거에서도 가장 큰 힘을 쓰는 변수는 바로 학연이다.

한국의 대학입시 경쟁이 '전쟁'으로 불려도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열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좋은 학연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믿음은 한국인의 신앙이 되었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우리는 여전히 학연을 음지의 문화로만 다루려고 한다. 학연주의에 대한 포괄적 비판은 흘러넘치지만, 이런 비판으로 학연 문화가 달라질 수 없다는 건 이제 분명해졌다. 학연주의 비판에 앞장섰던 사람으로서 갖게 된 확신이다.

학연주의는 일종의 '경로(經路) 의존' 현상이다. 그 경로는 '동창회 공화국'을 만들었고, 이제 한국인의 유전자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대거 가담했던 학력 위조·위장 사건이 그걸 입증해주는 건 아닐까?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사회적 반응은 크게 보아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 사회의 학력·학벌 숭배주의가 문제라는 시각, 또 다른 하나는 각 개인의 거짓말이 문제라는 시각이었다. 처음엔 후자의 시각이 설득력 있게 들렸겠지만, 학력·학벌을 속인 유명 인사들의 수가 크게 늘면서 전자의 시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다.

한국은 세계에서 교육열이 가장 뜨거운 나라다. 긍지를 느끼고 자랑할 만하다. 그러나 그 그림자가 있으니, 그게 바로 학력·학벌 숭배주의다. 자신만 숭배하고 끝나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자신의 숭배심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차별한다는 게 문제다.

학력·학벌이란 무엇인가? 그 본질은 '제도·조직의 권위'다.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국의 독특한 입신양명(立身揚名) 문화는 사실상 제도·조직 숭배주의다. 제도·조직 중에서도 권력 분야를 제일 높게 평가하는 문화다.

어디엔가 무엇을 문의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보라. 당신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말을 한다. 그 조직의 권위가 얼마나 강한가에 따라 답을 해주는 사람의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다.
 
'엘리트' 개념의 이중적 속성

 
학력·학벌 위장 사건에 가장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당사자들을 제외하곤 '제도·조직의 권위'에 안주해 그걸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권위의 보호막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나름대로 목숨 걸다시피 하면서 싸워온 그들이 책임감을 느끼긴 어려울 것이고, 또 느낀다 한들 "뭘 어쩌란 말이야?"라고 항변하지 않겠는가.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나마 '제도·조직의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을 면박 주는 게 우선 당장 실현 가능한 해법일까?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 한 통 걸어줘 도움을 줄 수 있는 권력이 있는 바, 이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정치가 국민적 냉소와 혐오의 대상이 되면서도 계속 성장 산업으로 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력·학벌이 높고 강할수록 학연은 더욱 끈끈하고 질기다. 그만큼 학연에서 얻는 게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연을 오직 그런 벌거벗은 이해타산의 개념으로만 접근하면 그 실체가 온전히 규명되지 않거니와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일단 학연을 선의로 해석해보자. 좋은 점이 많다. 자신이 잘 알거니와 배짱이 잘 맞는 사람과 일하고 싶어 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효율을 기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무슨 마피아 집단을 형성해 인사와 자원 배분을 독식하겠다는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늘 인사와 주요 의사결정 때마다 학연이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현실이 사람들의 일상적 행태에 규정력을 발휘한다는 데에 있다. 오랜 학습효과를 통해 학연을 강화하고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경쟁력을 높이는 최상의 수단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그 일에 쓰인다. 그런 행태가 자신도 알게 모르게 온몸에 프로그래밍 된다. 그래서 명문 학교 출신들의 학연주의 행태에 대해 비판을 해봐야 씨알이 먹히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도무지 수긍·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 산다는 게 뭔가? 친목과 우정, 이 얼마나 중요한가. 문제는 이게 '불공정 경쟁'과 '공공 영역 사유화'의 매개가 된다는 것인데, 그건 사회과학적 분석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뿐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누가 그렇게 꼬치꼬치 따져가면서 살겠는가. 자신의 학연이 너무도 아름답고 귀여워 미칠 지경인 사람들한테 사회적 차원에서 그 부작용을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그들의 귀엔 들리지 않는다.

사정이 그러한 만큼 비판보다는, 차라리 그런 현실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소위 명문 학연 구성원들에게 '엘리트로서의 책무'를 요청하는 게 현실적인 해법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즉, 당신들의 선의를 인정하겠으니, 부디 리더십을 잘 행사해달라고 주문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다. '엘리트' 개념의 이중적 속성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론 엘리트를 인정하면서도 그걸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좀 단순화해 말하자면, 누군가가 "나 엘리트요" 했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 엘리트답게 처신해달라는 말도 하나 마나 한 말이 되고 만다. 공적으론 겸손해야 하니, 엘리트답게 나서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선 엘리트가 음지의 개념으로 전락하고 만다. 엘리트 집단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결속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자랑할 만한 평등주의 문화의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고려대 교우회부터
 
이는 비단 동창회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나의 문제의식은 개혁이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시도가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보루라 할 동창회·종교단체·종친회·향우회 등과 따로 노는 현실에 대한 성찰이다. 동창회·종교단체·종친회·향우회에 공공적 성격을 가미하는 시도를 하지 않고선 사회적 진보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걸 인정하고 기존 '모드'를 한번 바꿔보자는 뜻이다. 사회를 향해선 연고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적 영역에선 연고주의의 단물을 빨아먹는, '범국민적 쇼'를 그만두고, 이젠 좀더 실천 가능한 대안을 모색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확신에 근거해 '실천 가능한 방안'으로 동창회 활동에 공익적 성격을 가미하자고  주장해왔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회비의 1%라도 떼내어 공익적 목적을 위해 쓰자는 것이다. 한번 버릇만 들이면 되는 일이다. 그 돈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상징적 행위가 동창회의 공공적 품질을 높일 수 있다는 데에 주목하자.

이 타협책은 학연주의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이 비분강개 이외에 어떤 현실적 대안을 내놓고 실천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비분강개는 필요한 덕목이지만, 오직 비분강개 일변도로만 나가면 탈 난다. 비분강개하면서도 현실적인 해법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도 키우는 게 좋겠다.

어느 동창회가 연말 모임을 태안에서의 자원봉사로 대체했다는 건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준 큰 '사건'이다. 보통 성인 1인당 여러 개의 동창회 모임에 참여하므로 매년 한국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동창회 모임은 수억 건에 이른다. 동창회 문화에 1% 변화만 일어나도 그 총합 효과는 엄청나다.

신문 단신 기사로 나오는 동창회 관련 보도부터 당장 뜯어고치자. 동창회의 공익적 활동을 꼭 밝힘으로써 공익적 활동이 없는 동창회를 쑥스럽게 만들자. 명문 경쟁을 졸업생들의 공익적 활동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자. 동창회 문화가 1%라도 바뀌면 한국 사회에 엄청난 긍정적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걸 믿어보자.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로 구설수에 오른 고려대 교우회부터 조만간 멋진 공익적 활동으로 명예를 드높이길 기대한다. '동창회 공화국'의 공존공영(共存共榮)을 위해서 말이다.



[각주]
 
1) 이 글은 『한국일보』 2008년 1월 16일자에 기고한 칼럼 「동창회가 1%만 변해도」를 늘려 쓴 것입니다.

2) 안원준 외, 「'입시에 눈먼' 봉사활동」,『세계일보』, 2006년 2월 4일, 7면.

3) 「불출마 의원들이 말하는 후보 감별법: 자원봉사자 세 과시에 속지 맙시다」, 『동아일보』, 2005년 4월 3일, A3면.

4) 「[사설] 자원봉사자, 우리의 진정한 영웅이다」, 『중앙일보』, 2007년 12월 19일.

5) 오관철, 「소득·학력 높을수록 '연줄 중시'」, 『경향신문』, 2006년 12월 27일, 3면.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 2008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이며, 출판사의 허락하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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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2/22 [16:0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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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바리 2008/02/24 [18:12] 수정 | 삭제
  • 강준만씨 당신도 태안사태 봉사활동자 100만을 감상적 자기만족적 시각으로 보시는구랴.
    씨벌.. '태안의 기적' 운운하면서 만면에 미소를 짓는 순간
    삶의 터전을 잃을 사람들, 복구 불가능한 자연생태 는 어찌되는가?
    당신이 다 해결해 줄거인가?
    놀고 있네...
    동창회?
    놀고잡아 연고 찾아 하하호호 하는 사람들에 너무 정치적 의미 부여하는 것 아닌가? 왜 배 아픈가?
    동창회는 동창회고 정치는 정치인거시여
    왜 동창회를 끌어다 정치 자기불만족을 해소하려고 난리인가
    당신의 그 좁디좁고 풍선같은 정치식견에 식상한다
    강단에서 학상들이나 잘 갈치시길... 헛 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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