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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지걸'과 신정아의 ‘몸’이 만나는 곳
[정문순 칼럼] 정치인과 신문이란 공적 매체가 앞장선 성폭력의 일상화
 
정문순   기사입력  2007/12/07 [18:33]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태국인 ‘마사지 걸’을 통한 ‘인생의 교훈’ 학습담은 공적인 자리에 있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적 침해 양상을 잘 보여준다. 온갖 의혹의 안갯속에 실체가 가려져 있는 도곡동 땅과 BBK 문제에 비하면 ‘미사지 걸’ 발언의 문제성은 명백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문제의 수위에 걸맞지 않게 발언 당사자는 사과나 반성보다는 변명과 말 바꾸기로 일관했으며, 심지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마사지 걸’ 발언은 주인공이 해명할 때마다 내용이 달라지더니 결국 자신의 직장 선배들한테 얻어들은 이야기로 안착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슬슬 무뎌지고 있다.
 
공적인 담론을 생산해내는 위치에 있는 남성의 경우 자신의 성 인식이 저열함을 인정하는 건 스스로의 명예에 치명적이므로 필사적으로 발뺌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떨어뜨리려고 애쓴다. 성추행까지 벌어지는 정치인의 술자리를 볼 때 ‘마사지 걸’ 발언은 대단찮게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청와대 입성의 꿈에 부풀어 있는 유력한 남성 정치인과, 그의 입에 의해 비틀리고 일그러지는 저개발국 여성의 극명히 대비되는 몸의 구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 참여하는 일자리 중 유흥 산업은 여성의 외모가 가장 중시되는 곳이다. 여성의 성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곳에서 용모는 오로지 성적인 것과 연관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가 자신의 옛 직장 선배들로 언급한 사람들은, 안마시술소에서 얼굴이 예쁜 여자가 선호되는 것의 허점을 알고 있었다. 유흥업소에 가서 실속을 차리는 그들은, 손님이 많은 가게가 불친절할 때가 있는 반면 물건이 잘 팔리지 않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덤으로 더 얹어주기도 하는 현상을 여성의 몸에다 그대로 적용할 줄 알았다. 이 후보가, “덜 예쁜” 여성일수록 오히려 ‘서비스’가 좋다고 했다는 선배들의 말을 거론한 건, 그 서비스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실용주의를 표방한 정치인답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의 외모가 실속 없음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그렇게 선택된 여성의 몸이 성 상품화와 무관해지는 것은 아니다. 유흥업소에서 남성들에 의해 구매되는 건 어차피 성애적인 여성의 몸과 무관할 수 없다. 유흥업소에서 여성의 몸은 외모야 어떻든 남성 구매자들의 성적 만족을 위해 제공되는 상품화된 몸의 처지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 몸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받을 만한 몸이 아니다. 이명박 후보의 선배들은 여성의 외모를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덜 예쁜” 외모를 택함으로써 여성의 용모를 가지고 장난을 쳤을 뿐이다.
 
자신의 발언이 술자리 밖으로 흘러 나와 햇볕을 쪼이자, 자신은 발 마사지만 받았을 뿐 성구매를 하지는 않았다거나, 자신의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을 뿐이라고 한 이 후보의 변명은 변명이 아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둘러대든 성매매 혐의를 피할 수 없는 안마시술소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언급하고, 마사지 업소 여성 몸의 상품적 가치를 재단하는 경지의 여성 의식이 면죄부를 받기는 어려우리라.
 

더욱이 해당 여성들로서는 “덜 예쁜” 것이 되레 선택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용모가 빼어난 여성보다 더한 성적 비하를 당한 것이 돼버렸다. “덜 예쁜” 여성의 좋은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후보의 논리대로라면 그녀 스스로 미인이 아니라는 자격지심이다. 예쁘지 않은데도 선택된 것이 구매자를 만족시키는 서비스를 낳는다고 믿는 것은, 남의 약점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태도라고 할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덜 예쁜” 여성의 나은 서비스를 통해 “인생의 교훈”을 발견했음을 자랑하는 자의 천박한 발언에서 여성 비하는 정점에 이른다. 대권을 꿈꾸는 남성 권력자의 입에 의해, ‘마사지 걸’로 불릴 뿐인 특수서비스직 여성의 몸은 이중 삼중으로 굴절을 겪다 더 떨어질 곳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한국의 대통령 자리를 꿈꾸는 자에게 다른 나라 여성들의 몸은 국민의 지위 바깥에 있는 존재들이다. 저개발국 여성인데다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일을 한다는 것은, 힘 있는 정치인 남성에 의한 모멸적 대우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가난한 나라의 마사지 업소 여성에게 드리워진 이명박 후보와 그 주변에 의한 몇 겹의 성적 억압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겹겹의 약점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성의 상품화와 연관된 몸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비천한 몸이라는 인식이 특정 직업군의 여성을 모욕할 권리를 낳을 뿐만 아니라 모욕당한 여성의 몸에 대해서도 아무도 관심이 없게 만든다.
 
약점 있는 여성의 몸이 성적 침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유흥산업에서 일하는 여성뿐만 아니라 최근의 신정아 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씨는 현재까지 드러난 바로는 권력형 비리 사건과 관계있는 사람일 뿐이지만 유독 여성이라는 점만 세상에 부각되었다. 그러나 권력 비리에 가장 많이 발을 담그는 부류는 단연 남자들이 아닌가. 남성이 ‘사고’를 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권력에 기대어 그것을 자신의 입신과 물욕에 이용한 것이 신씨만도 아니건만, 한 여성의 약점에 대해 사회는 엉뚱한 방식으로 응징하려고 했다. 나쁜 여자의 몸은 발가벗겨 조리돌림을 해도 무방하다는 인식이 <문화일보>의 신씨 누드 사진 게재라는 보기 드문 사건을 낳은 것이다. 
 
▲9월 4일 오후 여성 언론단체들이 문화일보 사옥 앞에서 신정아 씨 알몸사진 게재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자보

유흥업소 종업원이나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는 여성처럼 다소곳하고 정숙하기를 기대하는 남성들의 로망과는 거리가 있는 여성들은, 몸의 존엄성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희롱과 징벌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인이 술자리에서 유흥업소 여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농락하는 것을 자랑하는 일이 큰 하자가 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여자의 몸이 발가벗겨져 대중 앞에 전시되어 능멸당하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정치인이라는 공적인 인간과, 신문이라는 공적 매체가 앞장서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일상화를 조장하고 있다는 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남성들의 성적 지배에 대한 욕망은 공적인 영역에서도 거침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적인 부분을 장악한 남성 권력은 성적지배욕을 합리화하는 데도 애꿎은 공공성을 덧칠한다. 하나는 한 대선 주자의 실용주의 정치 노선이, 다른 하나는 독자의 알 권리 보호라는 것이 명목이었다. 하필 약점 있는 ‘만만한’ 여성들이 희생타가 된 것은,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빌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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