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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근대 100년 역사엔 왜 '구라'가 많을까?
[서태영의 달구벌 '메나리'] 일제에 줄 댄 경북대병원 100주년 기념사업
 
서태영   기사입력  2007/02/14 [12:04]
식민의 역사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찾는 넋나간 망동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대구는 그 본부다. 경북대학병원 100주년 기념사업에 일제의 역사가 서렸다. 내부의 노조가 문제삼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경북대학병원의 100주년 기념사업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경북대학병원의 "개원 100주년 기념사업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미화하고 나아가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할 소지가 매우 크므로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인회에 뿌리를 두고 강행한 경북대학병원의 100주년 기념사업은 해방과 독립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란 것이다.
 
▲ 일제에 줄을 댄 경북대학병원 100주년 기념사업이 불명예스럽다.     © 서태영
 
민족연구소는 "일제의 통감부와 그 어용단체가 궁극적으로 조선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설립한 병원들을 자신들의 연원으로 삼고 나서는 것은, 마치 대한민국 정부의 뿌리가 조선총독부라는 이야기에 다를 바 없으며, 이는 1945년 해방과 독립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힐난했다. 
 
경북대학병원측은 정체를 알 수없는 사가의 입을 빌어, 철도의-동인의원-대구 자혜의원-도립 대구병원- 대구의과대학 부속병원-경북대학교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역사 부풀리기에만 안달이다.

▲ 국립대학병원마저 일제의 역사를 자랑삼는 몰역사의 망동이 자행되고 있다.    
"한국 근대 의학교육사를 개관하면 수도인 서울 제외한 지방에서는 평양과 대구가 가장 선진적이었다. 두 도시는 초기의 동인의원에 의한 서당식 의학교가 설치되고 자혜의원의 의학강습소 설치와 도립화, 의학전문학교로의 승격 등 시기가 비슷하다. 이는 1906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철도의 주변 큰 도시였던 두 도시에 철도의가 배치되고 다시 그것이 동인의원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싹튼 것으로 보인다. 이후 대구 동인의원은 한일합방 직후 아시다 시피 대구 자혜의원으로 되었다가 다시 도립 대구병원으로 개칭이 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대구의과대학 부속병원이라는 명칭을 거쳐 경북대학교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계승되었다가 현재의 경북대학교병원으로 발전을 하였다. 대구동인의원은 곧 경북대학교병원의 연원이 되었던 의료기관으로 볼 수 있다고 史家들은 정의하고 있다." <경북대학병원 100주년 개원기념 누리집> 

  
왜 이렇게 대구의 100주년 기념사업들은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을까? 대구제일교회 100주년 기념사업, 대구상공회의소 100주년 기념사업, 국채보상100주년 사업, 경북대학병원 10주년기념사업 등등. 부끄러운 세력의 역사를 날조하려고 하는 청산되지 않은 세력들이 역사를 미화하려고 공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가문의 족보가 아니다. 경거망동해줘서 고맙다.

경북대학병원이 100주년 기념사업하며 헛돈 쓸 때 우리는 학생보호책임 방기하고 경북대학이 죽인 현승효 30주기 기념사업을 조용히 준비한다. 부끄런 100년 역사 위에 빛나는 이름 한줄 남기려 한다. 
  
▲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작정한 듯한 경북대학병원 100주년 기념사업은 올 가을 국정감사 대상이 될 것이다.     © 서태영

대구동인의원의 실체를 밝힌 민족문제연구소 성명 
경북대병원이 스스로 모체로 여기는 대구 동인의원은 그 연원이 1902년 6월 일본에서 조직된 일본인 의사단체에 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일본이 조선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통감부는 조선 지배를 위한 의학체계 재편을 단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단체가 바로 동인회였다.

일본의 대외팽창을 의학차원에서 보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동인회는 1904년 경부경의철도 건설이 강도 높게 진행되면서 부상자가 속출하고 전염병 등으로 공사가 지연될 위기에 처하자 의사를 파견하는 등 일본의 대륙침략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였다. 나아가 1906년 12월 1일과 1907년 2월 10일에 각각 평양 동인의원과 대구 동인의원을 설립했는데, 이 병원들은 일차적으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철도공사 부상자 치료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부차적으로는 조선 민중들의 반일정서를 의료시술 제공으로써 희석시키는 효과도 거두고자 하였다.

특히 동인회가 조선에 진출한 1904년 무렵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한 저항으로 조선 각지에서 의병 봉기가 활발하던 때였다. 대구 동인의원의 경우 경부철도회사의 기부금 5천원이 사용된 점은 대구 동인의원의 설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적으로 보여 준다. 

동인의원(同仁醫院)이란? 

1902년 3월 동아동문의회(東亞東文醫會)와 아세아의회(亞細亞醫會)의 합동으로 발족한 동인회(同仁會)는 아시아의 맹주로 성장하고자 하는 일본의 국가시책에 부응하여 조선과 중국에 서양의학, 약학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에 동인회 의사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때는 1906년이다. 광제원 원장으로 사사키(佐佐木四方支)가 부임하여 광제원의 개편을 주도하였고 사토오(佐藤進)가 파견되어 대한의원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07년 4월에는 통감부와 철도 전역의 의사행정을 담당한다는 계약을 체결하여 동인회 의사들이 철도 촉탁의로 부임하게 되었다. 나아가 1906년에는 평양동인의원 1907년에는 대구동인의원을 개원하여 조선인 치료를 담당하였고, 부속으로 의학교와 간호부, 산파양성소를 설립하여 조선인의 의학교육을 시도하였다. 1910년 강점이 이루어진 후에는 병원 설비를 총독부에 이양하고 사업의 대상을 중국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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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2/14 [12:0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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