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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저들에게 저들이 원하는 것 주자
[비나리의 초록공명] 이제 비강남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 찾아보자
 
우석훈   기사입력  2006/12/27 [18:16]
1. 강남이라는 개념어
 
'강남'이라는 질문은 슬픈 논쟁이다. '대구'나 '광주'라는 이름으로 추상화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 아닌 것처럼 '강남'이라는, 특정 지역 자체를 개념화시킨 질문은 슬픈 논쟁이고, 또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는다. 똑같은 뉴욕이라고 얘기할 때에는 월스트리트와 금융자본 혹은 세계화의 본산이라는 개념들을 대개 담아서 얘기하고, 워싱턴이라고 표현할 때에는 군사외교적인 뉘앙스를 담게 된다.
 
수다스럽기로 영화감독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 <맨하탄>으로부터 시작된 '맨하탄'이라는 용어는 다분히 문화적인 함의들을 담고 있다. 때로는 건물이 이런 개념어가 되기도 한다. 러시아의 크렘린궁이나 프랑스의 엘리제궁 같은 것들도 나름대로 독특한 함의를 다 가지고 있다. 학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사람들도 간단한 개념어나 추상어를 통해서 의사전달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누가 일부러 시키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추상적인 표현들을 학 마련이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에서 지역을 사유의 대상으로 해서 사용하는 말들이 강남 이전에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서울은 '서울화'라는 파생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세계 역사상 초유의 사례에 해당할 특별시인데,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 서울이라는 단어는 '로마'라는 말에 버금갈 정도로 모든 것의 중심을 의미한다. 반드시 정치나 경제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문화와 기타 '삶의 양식'에 관한 모든 것들 중 맨 앞에 있는 한 흐름을 이 말이 대변하는 듯하다. 학문적으로 엄밀한 표현은 아닐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서울'과 '지방'이라는 두 가지 범주만이 존재한다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게 된다.
 
나는 지난 4년 동안 '풀뿌리 민주주의'와 '삶의 경제학'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이 두 얘기를 '생명평화'라는, 다분히 한국적인 전통에서만 정의되고 사용되는 용어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나의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이 동안에 우리나라의 그 누구보다도 많은 지역과 동네에 자주 방문하게 될 기회가 있었다.
 
나 같은 C급 경제학자가 지방에서 들었던 얘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첫 번째 종류의 표현은 "서울 것들"이라는 말에 집중되어 있다. 서울에서 편하게 살면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읍면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들이나 곤란한 일들 그리고 지방의 사정에 대해서 뭘 알겠느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상 서울이 전국을 수탈하는 현실적 구조에서 "서울 것들"에 대한 원망과 한탄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이 느낌과 가장 비슷한 뉘앙스를 주는 단어는 중남미 경제학자들이 주로 사용했던 "노동귀족"이라는 표현이다. 똑같이 노동자 같아 보이지만 중남미의 소위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원주민들과 유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부등가 교환'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전혀 다른 경제적 재생산 메카니즘을 가지게 된다는 이론이 70년대에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서울 것들'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똑같이 가난해도, 서울에서 가난하다는 것과 지방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사용하는 개념인 셈이다.
 
이 와중에 내가 들었던 또 다른 지칭은 "서울에 계시는 분"이라는 표현이다. 군더더기를 떼어내고 이해한다면, 이 때의 '서울'은 중앙이라는 의미이고, 중앙에서부터 지방을 움직여 나가는 실질적인 대한민국의 의사결정 구조를 반영하는 의미일 것이다. 정치에서부터 경제와 심지어는 언론과 학문까지 실질적으로 '중앙집중형'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그런 작동 방식에서 움직여나가는 한국에서 변화든 저항이든 혹은 새로운 시도든 결국에는 서울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현실은 슬픈 현실이다. 말이 지방자치이지, 분산형과는 아직도 거리가 먼 압축성장이 만들어낸 사회문화적인 잔재가 청산되기는커녕 더욱 강화되면서 확대재생산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을 더욱 쪼개어 표현하는 '강남'과 '강북'과 같은 표현들은 확실히 지명에 관한 이름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개념들이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고급 개념이기도 하다. 서울에는 강남과 강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서도 있고, 강동도 있다. 말장난에 빠져들고 싶지는 않지만, 서울 전체를 하나의 집합으로 볼 때 강남이 아닌 지역을 강북으로 정의하게 된다. 상당히 이상한 표현이다. 강서구나 영등포구 혹은 구로구 같은 곳들도 이 큰 의미의 분류에서는 강북으로 분류될 것이다. 한강을 경계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에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2. 강남과 대한민국의 지배구조
 
가장 편하게 한국의 지배구조를 그려본다면, 강남이 서울을 지배하고, 서울이 경기도를 포함한 수도권을 지배하고, 다시 이 수도권이 전국을 지배한다는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엄밀하고 과학적인 접근방식은 아니다. '지배'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명백한(explicite)' 권력의 위계관계가 존재해야 하겠지만, 그런 식의 법률 관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의 관점에서는 서울도 지역이고, 강남구도 지역이고, 중앙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중앙 행정기구가 중앙을 형성할 뿐이다.
 
이런 관계는 한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와 일견 비슷하다. 미국이 한국을 지배하는가? 국제법상 그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고, 무역관계상으로도 한국은 미국에 대해서 오히려 흑자를 달성하는 국제 경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큰 자동차와 큰 거주공간이 그렇고 교육관계 등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인 모델에서 한국은 이미 미국의 모델을 따라가고 있는 셈이고, 세계화라는 이름과 '미국화'라는 용어가 많은 경우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한국은 사실상 미국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 있고, 또 사회모델과 경제모델을 매우 빠른 속도로 미국 모델로 전환하는 중이다. 이런 한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정확한 말이 있다면, 강남과 서울 그리고 지방 사이의 관계가 유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에는 사회과학에서 이런 관계를 '수탈(appropri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었는데, 제국주의 혹은 유사제국주의의 관계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썩 적합한 용어는 아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일단은 '부동산'을 매개로 이런 일들이 진행되기는 하는데, 아직까지는 적절한 표현과 분석이 잘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경제학 교과서의 표준 용어로 설명하자면, '재산효과(wealth effect)'를 발생시키는 정책의 부정적 폐해의 문제라고 표현된다. 특정한 정책이 가격효과만이 아니라 부의 분배를 변화시키는 일이 벌어질 때 좋지 않은 정책이라고 하는데, 부동산의 경우는 특정 지역의 상승과 인플레이션이라는 두 가지 장치가 결합되면서 부의 재분배 효과를 크게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 정도 개념으로 '강남 현상' 같은 것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어색하고 부족해 보인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자들의 다양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워도 이런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며, 이걸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거나 혹은 해소할 관계라는 받아들이거나라는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 이런 특수한 메카니즘이 존재한다는 것들은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다. 이걸 '좋은 학교' 때문에 발생하는 교육 문제라고 생각했던 재경부 관료들은 자립형 사립고 등 하여간 좋은 대학에 잘 들어가는 학교를 다른 지역에 만들어주면서 문제를 해소하려고 했던 것 같다. 영어 공부만 잘 시켜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영어마을을 경기도에 만들어서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려고 한 것 같고, 심지어 지방에 골프장을 만들어주면 될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도 있었었다.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과 해소하려는 접근에는 차이가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소위 '강남 현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 '강남'에 대한 질문에는 '서울대'에 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소통의 장벽 같은 것이 존재한다. 서울대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 서울대에 대해서 질문하기가 껄끄러운 것처럼, 강남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도 유사한 종류의 껄끄러움이 있다. 강남에 살지 않느냐? 그렇다면 도대체 네가 뭘 안다고 강남에 대해서 아는 척 하는 것이냐! 강남에 사느냐? 강남에 사는 주제에 변명이나 늘어놓을 것이라면 얘기하지 마라! 참 곤란한 질문이기는 한데, 이 질문 앞에 서서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무너져 내렸고, 심지어는 정권의 근본 근간이 흔들려버리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좀 넓게 보자면, 노무현 정부가 내걸었던 수도 이전 공약은 서울 중심의 중앙형 시스템을 조금이라도 분산해보자는 취지였고, 이 힘으로 집권에 성공한 정권인데, 강남의 '비싼 아파트'에 대해서 세금 좀 물리자고 나섰다가 이젠 정권의 기반 자체가 무너진 셈이다. 게다가 정작 소위 강남 및 버블 세븐에 세금 물리는 일에 앞장섰던 많은 관료들 중 상당수가 정작 자신들은 이 지역에 비싼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야말로 꼴사납게 된 셈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참 답변하기 곤란한 상황이다.
 
3. 강남의 고밀도화, 어떻게 볼 것인가?
 
부동산 폭등 과정을 놓고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그리고 경제관료 사이에서 설전이 오고갔지만, 그 핵심에 놓여 있는 내용은 사실 강남의 고밀도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 불과하다. 말은 '공급론'이라고 멋지게 표현되어 있지만, 일반적인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관한 내용은 아니고, 결국 강남의 재건축 시장에 대한 규제를 풀어주고 고밀도화를 추진할 수 있게 하여주라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반면에 경기도 전역에 대한 거의 무제한적 주택건설을 감수하고라도 청와대와 경제관료가 지키려고 한 것은 강남의 고밀도화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녹지율과 용적률 같은 약간 기술적 논의들이 끼어들기는 하지만, 따져보면 논쟁의 핵심은 고밀도화라는 개념에 녹아 들어가 있다. 재경부를 축으로 한 정부가 마지막으로 내어놓은 안은, 강남의 고밀도 개발은 계속해서 막는 대신에 경기도에 신도시를 '아주 많이' 지어주겠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일보를 축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의 경제적 처방은 "공급을 인위적으로 막지 말라"라는 말인데, 그냥 편하게 사람의 말로 번역하면 강남의 재개발 규제를 완화시키고 고밀도화를 추진하라는 말이다.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경기도 전역에 대한 주택공급 증가방안은 현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최악의 결정이다. '수도권과밀화 방지'라는 오랫동안 우리나라가 지켜온 정책의 기본 기조는 '지방 시대'라는, 달성하기 어렵지만 그야말로 정책적인 목표라는 정신을 농축시킨 것인데, 이제 집값 안정이라는 단기 목표를 위해서 국토 전체의 균형틀을 전환한 것인 셈이다. 현 상황에서 가장 타격을 입은 사람들은 지방 거주민들이고, 지역의 소위 '내생적 발전'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각 지역발전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을 세우고 추진하던 사람들이 가장 큰 장애에 부딪힌 셈이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5만 이상의 거주지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도시화율이 95% 이상이고, 또한 전국민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사는 이상한 시스템이다. 이 황당한 상황이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강화시키겠다는 것을 보면서, 멀쩡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주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경기도 전역을 풀면서 기본적인 국토계획과 지방경제에 관한 틀까지 흔들어야 할 정도의 문제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보다는 차라리 강남 고밀도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순수 정책의 시각에서라면 더 '비용효과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순수하게 주택공급의 관점에서 현재 시행되는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세를 정확하게 현실화시킨다면, 강남의 밀도를 높인다고 해서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강남의 고밀도화를 막는 것일까?
 
도시생태라는 관점에서는 단기적으로는 교통문제가 생기고, 장기적으로는 생태적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쉽게 표현하면, 한 도시가 수용할 수 있는 인구와 에너지 그리고 물자 기반을 벗어나게 되면, 더 이상 도시는 '지속가능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거주가 불가능한 지역으로 전환되게 된다. 물론 그 전에 슬럼화가 먼저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강남구를 포함한 이 지역의 생태적 수용능력이나 교통포화 그리고 보건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강남의 슬럼화를 생각하는, 대부분의 오래된 도시에서 발생하는 이 문제 같은 질문은 현재의 강남에 대한 엄청난 선호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너무 한참 후의 질문인 것처럼 보인다.
 
4. 저들에게 저들이 원하는 것을 주소서...
 
우리나라 도시의 고밀도화가 지난 4년 동안 급격하게 진행된 것은 일반적인 도시공학이나 도시경제학에서 얘기하는 도시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에 따라 일어난 현상은 아니고, 포틀란드조 시멘트 건물이라고 하는, 80-90년대 우리나라 아파트에 주요 사용된 공법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요즘 많이 시공하는 철골조 건물처럼 수명이 100년 혹은 '스틸 하우스'처럼 200년 이상의 수명을 가진 건물들에서는 생겨나지 않을, 30년 안팎의 짧은 기술적 수명을 가진 날림 아파트들이 만들어낸 기이한 현상이다.
 
수명이 짧다보니 '재건축'이라는 아주 독특한 '펀딩' 방식이 생겨나게 되었고, 70년대와 80년대, 압축 성장 과정에서 아파트 건축이 집중된 강남 지역에서 생겨난 이 재건축 현상이 이제는 국민경제는 물론 정치적 지형까지 흔들게 되는 아주 독특한 현상이 벌어진 셈이다. 대치동에 부실시공으로 유명했던 어느 아파트에 살게 된 사람과 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주 튼튼하게 잘 지어진 아파트의 입주자의 경제적 운명이 지금 극과 극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건축물안전검사를 통과하지 못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로또' 같은 재건축이 행운이 오는 이 묘한 상황은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매우 독특한 시스템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단편일 뿐이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편하고 잘 짓고, 튼튼한 건물이 좋은 것인지만 지금 대한민국, 정확히는 강남에서 잘 지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연일 자신들이 건물을 한탄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이상한 일이 언젠가는 정지할 것인가?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적절한 조세 장치가 개입되기 전까지는 무한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시스템의 수혜자가 유독 현재 강남에 많이 거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문제가 강남 대 비강남의 문제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법은 '고밀도'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하게 해주는 것이다. 고밀도 개발로 인해서 생겨날 생태적 재앙과 교통 문제 혹은 기타의 문제를 스스로 받아들이겠다고 할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리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해소하기 어려울 때에는 투표하는 방법이 가장 손쉽다. 강남구에 대해서 주민투표를 실시하면 어떻게 될까? 이 방법은 유럽이나 일본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신의 지역에 대한 발전방안을 찾을 때 쓰는 방법인데, 이렇게 하면 많은 경우 고밀도 개발안이 토론에서 진다. 일본이 재개발 한 번 할 때 30년씩 걸리고 순환개발과 같이 조금씩 접근하게 되거나, 파리나 런던 같은 곳들이 고층빌딩으로 도시를 확 늘리지 않는 이유들도 대개 비슷하다.
 
'고밀도'라는 말을 쉽게 표현하면,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과 자연이 줄어든다는 말이기도 하고, 더 피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건설교통부에서 밀도에 대한 기준안을 제시하고, 이걸 지키도록 하고 있는 구조이다. 왜냐하면 강남만이 아니라 전국 어느 도시에서라도 고밀도와 저밀도를 놓고 주민투표에 붙인다면, 당연히 고밀도 개발방안이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올까?
 
그건 바로 우리나라 지역의 의사결정 과정이 '재산권'을 가진 사람 중심으로 되어있다는 한 가지 이유와 도시 특히 서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에 살고 있지 않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집 없는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소외되고, 또 원주민들이 원하는 것과 잠깐 머물다 갈 사람들이 지역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이런 작은 차이들 때문에 자신이 사는 곳, 그리고 자신이 '자는 곳'에 대해서 접근하는 과정이 외국과 전혀 다르게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밀도 개발을 통해서 자신의 '토지권'을 극대화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생태학 모델을 빌리자면 "장수말벌 모델" 즉 지역의 꿀벌은 물론 다른 말벌까지 초토화시키면서 자신의 종족의 개체수를 극대화시키고, 계속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나가는 경우가 이 모델에 해당한다. 급격한 도시화를 통해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풍요의 시대를 만났을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지금 한국의 주요 의사결정자 계층에 강남을 고향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강남의 고밀도화를 막는 유일한 논리는 교통과 생태에 대한 고민 그리고 부당소득에 대한 재분배에 관한 '사회 정의'의 논리, 딱 두 가지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 교통과 생태 같은 '배부른 시절의 논리'가 서 있을 공간이 손톱만치라도 있는가? 어차피 전국적 파국을 일으킬 경기도의 무제한적인 주택 공급에 대해서 세금을 쓸 요량이라면, 차라리 강남의 고밀도화를 저들에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주민투표를 통해서 저들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고, 50층이든 100층이든, 원하는 대로 올리고, 강남에 거주를 원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반드시 주민투표를 통해서 진짜로 그러한 방식의 삶을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가지 조건과 양도소득세를 통해서 땅에서 얻은 것은 땅에다 두고 가도록 하는 또 다른 조건이 구현된다면 나는 강남의 고밀도화를 반대하지 않을 것 같다. 자신들이 그토록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대신에 황당한 경기도의 '제 2분당' 혹은 '강남 대체 신도시' 같은 계획은 접어들이고, 강남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국민들의 세금이 사용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 강남에 못가니까 경기도에라도 가겠다고 하는 지방 거주민들을 위한 일들은 경기도에 아파트를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향에서 살 수 있도록 근본적인 정책 방향을 변경하는 일이다. 더 이상 인구가 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도로 끝없이 유입되는 인구가 어디에서 왔겠는가? 간단히 전국 인구이동 통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인데, 강남을 막고, 경기도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국민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국을 파국으로 몰고 갈 일이 아닌가?
 
그야말로 지금은 '슈퍼펀드'라고 만들어서 지역에 삶의 기반을 만들고, 강남으로, 서울로 가는 흐름들을 반전시킬 계기를 만들어야 할 순간이다. 그런데 이 사람과 물자의 흐름을 수도권으로 전면적으로 수도권으로 향하게 하고 도대체 어떻게 지방에서의 삶이 가능할 것인가? 한국 사회에 던져진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정부가 내놓은 답변이 가슴을 무겁게 한다. 저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라... 그 대신에 나머지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좀 찾아보자.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7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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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2/27 [18: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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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남제비 2007/01/05 [21:26] 수정 | 삭제
  • 물좋은 강남에서 우리모두 살아요. 땅이 모자라면 더욱 높게 올리고요. 그래도 모자라면 천막이라도 치고 살아요.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 이제 모든것 다 개방하면 어짜피 안되는 산업은 다접고 모두들 강남으로 오세용. 친구따라 강남가자.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