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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저항한다!
[기획-창살없는 감옥, 보안관찰 ⑤] 보안관찰처분대상자 김경환의 편지2
 
김경환   기사입력  2006/10/10 [11:24]
나는 한 마리 산양이 되어야 했다

인도 민화(民話) 한편을 옮기면서 글을 시작할까 한다.
어느 날, 산양이 개울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쪽에서 물을 마시던 호랑이가 산양을 보고 소릴 질렀다. "야, 너! 왜 내 개울물을 흐리는 거야?"
"제가 아래쪽에 있는데 어떻게 윗물을 흐리나요?" "어제 그랬잖아, 이놈아!"
"어젠 저 여기 없었는데요." "네 어미가 그랬겠지?"
"울 엄마는 죽은 지 오래됐어요." "그렇다면, 네 아비구먼."
"전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요." 산양은 도망갈 기회를 엿보면서 대꾸했다.
"상관없어. 네 아비가 아니면 네 할아비나 증조할아비가 그랬을 거야! 내 물을 흐렸으니 잡아먹을 수밖에!" 호랑이는 으르렁거리며 산양에게 덤벼들었다.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호랑이는 오직 잡아먹으려는 의도와 목적만 있을 뿐이다. 이때 산양의 처지나 생각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고려되지도 않는다. 약자의 진리는 강자의 궤변 앞에 무력하다. 약육강식은 동물의 세계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세계에도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인간사회의 경우 보다 세련되게, 잡아먹으려는 자의 의도를 은폐하는 장치를 동원한다는 것뿐이다.

또 하나의 족쇄가 기다리고 있었다. 3년 8개월 만에 가까스로 국가보안법의 족쇄를 풀고 감옥 문을 나서자마자 보안관찰법의 족쇄가 다시 채워졌다. 나는 그렇게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 되고 말았다. '왜' 라는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 냉전시대의 사고방식과 법 제도를 고수하려는 자들이 그렇게 규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또다시 '호랑이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졌다. 나는 한 마리 '산양'이 되어야만 했다.

헌법과 국제규약 위반 행위에 동조할 수 없다

보안관찰법은 국가보안법 등의 일부 죄목에 대한 위법행위 등을 한 이들을 대상자로 하여 형집행 후 "보안관찰해당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이유"(법 제 4조 1항)가 있는 경우, "재범의 위험성을 예방하고 건전한 사회복귀를 촉진하기 위하여 보안관찰 처분을 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사회의 안녕을 유지함을 목적으로"(법 제1조) 하는 법이다.

보안관찰처분은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법무부 소속의 '보안관찰처분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법무부 장관이 결정한다. 보안관찰처분의 기간은 2년이며 무제한으로 갱신할 수 있으며, 보안관찰처분대상자의 지위의 해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는 바가 없으므로, 재범의 위험성이 명백히 없는 경우에도 처분대상자라는 지위는 영원히 지속되며 따라서 현재 처분을 받지 않고 면제가 되었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다시 처분결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보안관찰대상자가 국가권력의 감시와 의심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보안관찰처분을 받은 이는 자신의 모든 인적사항과 3월간의 주요활동사항을 정기적으로 신고해야 한다. 검사나 경찰은 피보안관찰자의 재범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지도와 회합, 통신을 금지하거나 집회 또는 시위장소의 출입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할 수 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신고를 하지 않는 등의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아직 처분이 내려지지 않은 대상자의 경우에도 신고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형사처벌 할 수 있다. 
 
  © 에큐메니안 제공

"보안관찰처분 대상자"가 된 나는 이 법이 규정하고 있는 의무를 이행할 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이 법을 지킨다면 결과적으로 개인에 대한 국가권력의 과도하고 부당한 개입을 용인하는 것이며, 악법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개인의 존엄과 양심을 지킬 시민적 의무와 권리가 있다. 부당한 법에 동조하고 복종하는 것은 '준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 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법을 지키는 것은 헌법과 국제인권규약 위반 행위에 동조하는 것이다.

보안관찰제도는 이미 처벌받은 사람들에 대해 '재범'이라는 행위로 인한 처분이 아닌 '재범의 위험성'이라는 내심을 추지하여 불이익을 가하는 것으로 '양심(헌법 제19조)과 사상의 자유'를 명백히 침해하고 있다.

보안관찰처분에 따라 부과하는 의무의 내용 또한 매우 광범위하고 자의적이어서 피보안관찰자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헌법상의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약하고 있으며, 교우관계와 재산 내역까지 신고해야 하므로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보안관찰처분은 법원의 재판에 의하지 않고 법무부 장관의 결정으로 행하기 때문에 헌법상 적법절차의 원리와 법관에 의해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되어 위헌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이는 시민·정치적 권리를 명시한 국제규약(제12조, 제17조, 제18조)에도 위배된다.

길들여지고 싶지 않은 나는 저항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출소 전 신고'와 '출소 사실 신고' 의무를 이미 위반하고 있다. 경찰은 이미 두 차례 전화와 등기우편으로 출석을 요구한 바 있다. 앞으로도 수차에 걸쳐 이런 '일상'이 반복될 것이며, 끝까지 거부한다면 기소당할 것이다. 가족들과 아이들은 내가 다시 잡혀갈까봐 불안해 하고 있다. 나도 항상 이 법을 의식하게 되며, 내심의 자유와 정상적인 생활을 침해받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물적·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할 것인지 걱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기가 이다지도 어렵다는 말인가. 국가는 이른바 '사상범'에게 얼마나 가혹하며 잔인한가. 나는 이 법을 수호하고 유지하고 집행하려는 자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당신들 같으면 이런 법을 지키겠느냐고.

변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자들은 언제나 굳어진 의식과 시각으로 사물을 판단한다. 그들의 눈에는 사물의 존재 방식이 변화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한번 '사상범'은 영원한 '사상범'이며, 따라서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히 격리돼야 한다고 믿는 그들에게 나는 암담함과 절망을 느낀다. 세계에는 60억이 넘는 인류가 살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은 전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상'은 주어진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데도 누가 누구의 내심을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일찍이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킹 목사가 말한 것처럼 악법은 오직 불복종하는 것으로만 깨뜨릴 수 있다. 사실 나에게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주어져 있지 않다.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죄인처럼 끌려 다니고 싶지 않다면 정당하게 항의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의 처지와 생각이 무엇이든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뿐인 것으로 보인다. 길들이는 것, 완전히 정신적으로 무장해제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길들여지고 싶지 않은 나는 당연히 저항하는 수밖에 없다. 불편하고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나는 인간의 존엄과 양심을 지키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내게 말한다. 법을 지키라고. 그러면 모두가 편안하다고. 나는 그 말을 고스란히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당신들이야말로 제발 법을 지키라고. 왜 당신들의 머리 속에는 으뜸법이자 바탕법인 헌법에 대한 기억이 그토록 희미해져 가고 있느냐고. 
* 본 기사는 개혁적 기독교 인터넷언론인 <에큐메니안>(www.ecumenian.com/)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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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0/10 [11: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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