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술자리 도중 최후를 맞게 되는 집권자는 젊은 여자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무력하고 풀어진 노인에게서 철권통치자의 그림자를 찾기는 어려워 일말의 안쓰러움이 일기도 했지만, 그런 모습은 피 말리는 권력욕에 지친 독재자의 초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남을 배려하기보다 뭐든지 자신이 독차지하는 것이 남성다움으로 권장되는 세계는 독불장군 노릇하느라 피곤에 짓눌린 무기력한 남자들을 양산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세상이 자기 것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힌 남자는 술의 기능이 그렇듯 자신을 달래주어 긴장을 풀어줄 여자들을 찾는다. 권력 다툼질하는 남자들의 영토에 여성의 출입이 허락되는 경우는, 피로를 호소하는 남자들에게 여성의 몸이 위안과 휴식의 거처가 될 때뿐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여자들의 품은 남자들의 무덤으로 전락하며 아비규환 속에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이들은 여자들뿐이다. 남자들의 파멸은 여자의 몸을 위안거리로 삼은 데 따른 대가인 셈인데 현실은 영화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여성의 역할을 남자를 위무하는 데 묶어두려는 경향은 비단 권력자의 음습한 밀실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의 모든 영역은 여자의 품에서 고단한 몸을 쉬고 싶은 남자들의 욕망을 거스르지 않는다. 가정이 노동력의 재생산 공간이라는 말은 집에서 아내의 시중만 받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남자들한테나 맞는 말이지 어디 여자한테도 그런가. 그렇다고 가사노동의 전임자라는 주부의 역할이 집 안에서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여성들은 일터에서도 가정과 같은 '화목한' 직장 문화를 가꾸기 위해 남자 동료들에게 커피 수발 등 업무와 무관한 접대 노동을 바치도록 강요받는다. 세상은 그런 일에 순응하지 않는 직장 여성들을 여성답지 못하다거나 이기적이라고 쉽게 매도하지만 굴욕적인 업무 앞에서 여성들이 겪는 갈등과 괴로움의 크기를 헤아리지 못한다. 여성들에게 자신들의 쉼터 이상의 기능을 바라지 않는 남자들이 있는 한, 성매매가 뿌리 뽑히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남성을 ‘모시는’ 서비스 역할에 여성성을 묶어두는 악습이야말로 성매매의 가장 강력한 존재 기반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남성들이 성매매 문제에 둔감하고 그것의 범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은 일상에서 어디에서나 여자의 시중을 받는 데 길들여진 그들 처지에서는 무리가 아닐 수도 있다. 성매매 특별법을 반대하면서 성적 욕구의 자유를 운운하는 남자들은 자신들이 여자의 몸을 착취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소모된 노동력을 충전하기 위해 여성의 몸에서 휴식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마저도 대가를 지불했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 남자의 불만을 달래주는 데 여자의 역할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라면 여성의 몸이 성적인 대상일 뿐이냐는 항변을 알아들을 리는 없다. 성매매와 관련하여 개인의 태도를 결정짓는 건 거창한 도덕의식이 아니라 사소하게 보일 수도 있는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인 것이다. 봉사와 접대는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이 자신과 대등한 경쟁자가 되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남자들의 심리에 힘입어 여성의 미덕이자 타고난 자질인 양 간주되어 왔다. 남자들이 일상에서 여성의 위무를 받는 데 적응되어 있는 한, 여성이 남성의 노동력을 보조해주거나 부족하고 빠진 것을 채워주는 하위 파트너에서 벗어나 대등한 경쟁자나 동반자가 되는 길은 그만큼 멀고 험하다. 그러나 남자들이 여자들과 공정하게 맞붙기 싫어 전통적인 성별 고정관념에 기대는 습성을 떨치지 못할수록 남성 내면의 피폐와 피로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갈 것이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선 남성들의 자멸적 참극은 영화의 상상력이 아니라 엄연히 우리가 숨쉬었던 현실이었음이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남자 스스로 여자로부터 업무 지시를 받는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는 ‘사소한’ 생각을 갖는 건 혁명보다 세상을 더 크게 바꾸어 놓게 될 것이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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