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는 좌파도, 우파도, 별 거 없다 좌파들에게는 늘 우파가 새로운 파라다임을 제시하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불안감이 있다. "늘 우파들은 새로운 걸 가지고 오는데 좌파에게는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똑같은 얘기만 한다"
브라질의 대통령 룰라의 말이다. 브라질을 포함한 중남미 지역의 우파들은 60년대 이후 열심히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왔고 이들을 보통은 ‘시카고 보이’라고 부른다. 하에에크를 축으로 밀턴 프리드만이 주장하는 극단적 시장 ‘과정이론’은 확실히 전통적인 케인즈주의와도 다르고 일반균형에 근거한 왈라스주의와도 다르다. 이 시카고 보이들이 장관을 비롯한 각료군을 완전히 장악한 80년대 이후 멕시코를 축으로 중남미 국가들은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달러화(dollarization)라고 하는 엄청난 경험을 하고, 중남미 학자들은 80년대 후반부터의 10년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 마이너스 성장은 기본이고, 언제나 IMF 구제금융으로부터 졸업하고 ‘지급불능’ 상태를 해소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들의 희망이라고 할 수도 있는 룰라 대통령이 좌파에게 새로운 것이 없다는 지적은 가슴 아픈 얘기이다. 결국에는 시카고 보이들의 방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룰라의 수정주의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 궤적이다.
우리나라의 우파들에게서는 사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고민을 종종 듣게 된다. ‘건전한 보수’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건전한 보수와 우파는 무엇인가라는 규정이 어렵기는 하다. 우파만큼이나 좌파도 규정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에서 좌파라는 것은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북한과의 관계에 의해서 좌파와 우파를 구분한다면 조금 쉽다.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기를 바란다면 좌파이고, 북한과 대결구도를 원한다면 우파일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어딘가 좀 이상해 보인다. 성장과 분배라는 조금 이상한 축으로 생각해봐도 우리나라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의 정책 일부가 분배에 가깝기는 한데, 서민경제의 장기침체가 계속되고 경제양극화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는 지금 ‘2만불 경제’에 온 국가가 죽 늘어서 있는 상황이다. 한겨레 신문의 기자들은 좌파일까? 건설경기라도 일으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이 특별한 신문도 오랫동안 하여간 건설업이라도 살려서 경제가 살아야 한다는 기조를 1년 이상 유지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에는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기준은 EU 통합과정과 해외 인구유입으로 인한 ‘민족국가’에 대한 입장이라고 하면 약간 이상은 해도 대체적으로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토니 블레어의 영국 정부가 좌파인가 우파인가? 오랫동안 유럽 신자유주의의 상징처럼 사용된 대처보다 더 강력한 신자유주의에 이라크 파병까지 열심히 한 토니 블레어 정부를 좌파 정부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민족에 대한 담론에서는 확실히 우파들과는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우파에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고, 좌파에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의 애매한 분류기준을 잊어버리고, 21세기에는 민족주의에 의해서 좌우파가 나누어진다고 하면, 우리나라에는 좌파는 이제는 선관위에 등록된 정당이 아닌 사회당 일부와 민주노동당의 소수파들, 그리고 따로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나키스트들과 별로 세력화되지 못한 생태주의 진영의 일부가 있을 뿐이다.
현실적으로 노무현 정부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우파를 제대로 규정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좌파를 규정하는 것도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우파를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한국에서의 좌파를 규정하고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노무현 정부를 좌파정부로 규정하고 싶어 하는 강한 욕구를 느끼는 것 같다. 물론 전략적으로는 옳은 판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스스로 우파라고 생각하고, ‘합리적 보수’의 범주에 들어가고 싶은 국민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금 가르기를 할 때 노무현 정부를 좌파정부 쪽으로 더 밀어붙이는 것은 선거를 전제로 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전략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정말로 좌파정부인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사실 ‘인권’에 대한 몇 가지 정책과 ‘공교육 사수’라는 눈에 띄는 점 외에는 그다지 좌파 정부라고 할 정책은 없다. 비정규직에 대한 이해가 좌파의 전통적 이해와는 많이 다르고, 일본식 토목국가주의라고 할 때 건설을 통해서라도 경제를 2만불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해가 전통적 좌파와는 많이 다르고, 농업에 대한 이해는 극단적인 극우파 정부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좌파와는 거리가 멀다. 만약 노무현 정부가 좌파 정부라면 좌파들도 별 거 없고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좌파의 역사는 어디로 올라갈까? 87년이 그 출발점이라면 확실히 노무현 정부는 좌파정부가 맞다. 80년의 5.18이 우리나라 현대 좌파의 출발점이라면 DJ 정부 역시 좌파정부가 맞다. 6.25 동란에서 좌파의 출발을 찾는다면, 조정래의 ‘완화된 민족주의’도 좌파 맞다. 조금 더 올라가 47년에 암살당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이나 월북한 박헌영 혹은 백남운 선생이 열심히 활동하던 시기로 올라간다고 하면, 사실 우리나라에서 좌파의 심장부는 지금 극우파 도시로 깃발 날리는 대구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가장 많은 자본론을 읽었던 도시이고, 헌책방에서 가장 늦게까지 자본론이 발견되었고, 4.19에 불을 당겼던 도시인 대구가 좌파의 메카인 셈이다. ‘만국의 노동자는 평등하다’는 명제는 일제 시대에 민족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이 일본의 강점이 부당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이 땅의 엄연한 역사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친일과 군사독재정권과의 융화 - 혹은 조화 - 로부터 지금의 우리나라 우파를 규정하는 것은 너무 야박한 일이고, 너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나쁜 사람이니까, 여전히 나쁘다는 얘기 외에는 별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21세기의 역사 인식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한 번 우리나라 우파의 자화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우파고 누가 극우파일까? 도대체 우리나라에서 우파를 규정하고, 그 중에서 특별히 떼어내어 극우파를 구분한다면 도대체 뭐가 기준이 될 것인가?
민족주의라는 리트머스를 들이대면 ‘동북아중심국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노무현 정부는 차라리 극우파에 가깝다. 경제주의를 맨 앞에 내세운 손학규와 노무현은 서로 경제를 모른다고 다투지만, 민족주의의 리트머스에서는 둘 다 극우파에 불과하다. “민족주의의 과잉”이라는 “too much 민족주의”의 시각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좌파는 한 줌에 불과하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좌파적인 사람들도 순식간에 유럽에서의 극우파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섬짓한 얘기들도 잘 나온다. “강화된 민족주의”와 “완화된 민족주의”의 구분만이 유효하다.
직접 민주주의라는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잣대를 한 번 대어보자. 68년에 일본을 뒤덮었던 일본의 좌파들은 중앙 정치에서 전면적으로 철수하면서 지역으로 돌아가서 다음 세대의 진보를 위해서 나름대로 헌신을 하고, 비록 국회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중앙정치가 계보정치와 부패정치의 화신처럼 변해가던 80~90년대에 사회의 건전성을 담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지방자치와 풀뿌리 민주주의가 그렇게 잘 정착되어 있는데, 도대체 일본은 "요즘 왜 그래?"라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확실히 일본 사회의 저변은 군국주의 시대의 제국주의의 폭력성으로부터 나름대로 벗어난 상태이다. 일본에도 극우파는 존재하지만, 온 사회가 독도 극우주의에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우리나라 같은 상황은 아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좌파나 우파나 상관없이 별 거 아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연정에 대한 논의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보인 6월 임시국회 본회의가 밤늦게 통과시킨 법 중의 하나가 선거법 개정안이 포함되어 있다. 기초의원도 정당공천을 받게 하는 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중대선거구제와 맞물리면 기초의원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거의 똑같은 형식과 내용을 가지게 되어있다. 지역의 풀뿌리 민주주의에서도 중앙에서 계파정치하는 기존 정당인에게 유리하도록 바꾼 이 선거법은 우리나라의 직접 민주주의 발전의 지난 10년의 역사를 한 번에 뒤로 돌리고, 또 다른 변화가 아예 나올 수 없도록 원천봉쇄한 기존 정당의 이득 지키기에 불과하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풀뿌리 민주주의의 잣대로 보면, 중앙 과잉의 정치적 불균형을 은근히 즐기다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즐기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유럽의 복지국가의 기본틀을 제공한 케인즈주의의 잣대로 보자. 한나라당은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살고, 경제가 살아야 서민도 산다는 70년대 시카고주의로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기업규제를 풀어주면 기업이 좋아진다는 약간은 '아메바' 정도의 사고밖에 없어서 그다지 세련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하여간 약간 후진 시카고주의라고 좋게 얘기해줄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정부의 재정지출이 기업 쪽으로 나가느냐 혹은 복지정책으로 나가느냐에 따라서 케인즈 좌파와 케인즈 우파를 나눌 수 있다고 하면, 현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전형적인 케인즈 우파이다. 케인즈는 특정 기업이나 특정 업종에 재정정책을 집중시키면 분배의 왜곡 - 시장 자체가 만들어놓은 원초적 균형이 있다면 - 이 생겨나기 때문에 차라리 헬리콥터로 돈을 뿌려주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하였다. 물론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소득보전과 공공취업을 강화시키는데, 유럽의 경우는 사회보장 쪽을 강화시켰고, 70년대 이후의 이러한 유럽의 변화를 대개는 케인즈 좌파정책이라고 한다.
현 정부는 건설업 특히 도로와 도시건설에 돈의 대부분을 사용한다. 농업의 경쟁력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30년대의 농업정책은 직접 소득보전 방식인데, 이러한 미국의 방식보다도 훨씬 극우파적인 것이 노무현 정부의 케인즈우파 경제정책 기조라고 할 수 있다. 우파인가? 우파보다도 더 극우파에 가까운데, 자꾸 한나라당에서 좌파 정부라고 하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약간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어떤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사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책 담론에서 - 정책이 아닌 이데올로기로 들어가면 얘기가 좀 다를 수 있다 - 좌파 정책은 없고, 극우파 정책과 우파 정책만이 있다. 그리고 불행히도 지금의 경우에는 집권하지 못한 한나라당의 정책이 전통적인 우파 정책에 가깝고, 집권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정책은 그 내용만으로는 극우파 정책에 가깝다. 누가 더 극우에 가까운가라고 논쟁하고 있다면 현 상황이 딱 맞는 것 같다.
만약 노무현 정부의 뿌리가 좌파에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나라의 좌파도 별 거 없고, 더 파쇼냐 덜 파쇼냐의 차이만 있지, 그야말로 별 내용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정책의 일관성과 국토생태를 포함한 종합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사실 박정희의 유신경제보다도 더 성장 이데올로기에 가깝게 와있다. 산업화에 따른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린벨트와 조림정책에 대한 이해만큼은 박정희는 종합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그보다 더하면 더하지 경제주의가 덜 하지는 않다. 금융정책과 부동산 정책 그리고 장기투자 전략으로 비교하자면, 7년 간을 요상한 방식으로 이 나라를 지배한 전두환 시절의 경제보다 더 근시안적으로 단기실적주의에 매몰되어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 시절과 산업정책을 비교하는 건 상당히 미안한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낫다고 하기는 어렵다.
좌파도 현 상황에서는 “민족주의” 담론에 기대어서 우파 혹은 극우파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의 우파도 노무현 정부는 좌파정부라는 말 말고는 별도로 내놓는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의 좌파는 노무현 정부 2년 반을 지나면서 밑천을 다 보인 셈이다. 더 이상 새로운 생각도 없고, 마지막 남은 것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 밖에는 기댈 곳이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이 왜 올랐는가? 농지도 풀고 열심히 ‘국토의 합리적 이용’을 위해서 도시도 새로 만들고, 아직은 중립적인 연기금을 전부 건설하는데 쏟아붓고, 토지수용하는 보상비로 내어주겠다는데 부동산 가격이 안 오르고, 거품이 안 생긴다면 이상하다.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 이상한 이데올로기 논쟁 - 실제로는 지난 2년간 우리나라에는 이데올로기 논쟁같은 고급스러운 철학논쟁은 거의 없었다 - 이나 하는 동안에 그야말로 이 땅의 “건전한 보수”들은 이 정부가 실제로 하는 일은 우파 혹은 극우파와 다를게 없다는 점을 다 이해해버린 셈이다. “그래도 아파트 값은 오를거야...” 대중은 무섭도록 현실파다. 좌파정부라고 해서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지방의 아파트 값이 도시별로 언제 평당 2천만원을 넘을 것인가 예의 주시하고 있다. 이 무서운 현실적 대중 앞에선 정치인과 학자는 좌파든 우파든 그야말로 발가벗은 백면서생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기술주의 - 혹은 기술중심주의(techno-centrism) - 의 잣대를 놓고 들여다보자. 황우석이 국민적 영웅이 된 것에 대해서 기분 나쁠 일만은 아니지만, 이 논의 속에서 전 세계는 한국민을 유태인만큼 똑똑한 민족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야만스러운 국가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청자를 만들고, 훈민정음을 만든, 예술적이면서도 소란스럽지 않은 예술적 민족이고 지혜로운 민족이고, 그래서 그 연장선 속에서 체세포 복제에 성공한 민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물론 황우석에게 기술적 진보가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이나 심지어 미국마저도 유전자 기술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이유로 스스로 조절하고 있던 “조심스러운 균형”이 유지되고 있던 상황인데, 몇 년만에 돈이면 최고이고 “국익”이라면 파병도 감수한다는 사람들이 지배를 하니까 한국이라는 곳에서 그 금기를 깨버렸다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이제는 그 균형이 깨어졌으므로 온 세계가 이 길로 가기는 간다. 이 사건은 대충 “우익 꼴통”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간주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놀란 사건이다. 부시보다도 더 극우파의 기술중심주의라는 입장에 정치인은 물론이고, 좌파니 우파니 할 것 없이 다 늘어선 형편이다.
황우석 교수의 체세포 복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나름대로의 기술적 진화가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 문제는 황우석 교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선전선동하는 좌파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부시 대통령 수준의 종교적 신념이나 최소한의 이론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우파들에게 있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나라의 좌파는 별 거 없다. 새로운 것도 없고 신념도 없을뿐더러 일관성은 더더군다나 없다. 좌파의 “진보”라는 개념을 “2만불의 국익”이라는 단어로 치환해서 생각해보자. 매우 일관되게 국가주의와 경제주의 그리고 “전문가주의”로 열심히 행군하는 중이다. 박정희의 유신경제와 많이 다른가? 박정희에게도 영세민 대책이 있었고, 계획경제(planification)이라는 전형적인 좌파정부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에게는 어쨌든 좌파적 요소가 있던 셈인데, 소위 좌파정부라고 하는 노무현 정부에게는 어떤 좌파적 요소가 있던 것일까? 정통적으로 ‘사이비’ 혹은 ‘정부 관변단체’라는 닉네임이 따라붙던 한국노총의 강경한 자세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 것일까?
나의 판단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좌파는 이제 별 거 없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별 거 없을 것이다. “지역주의 타파”라는 대표 간판 하나를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현 정부는 우파 정부수준을 뛰어넘어 극우파 정부에 가까워진 상태이다. 풀뿌리와는 더 멀어져 있고, “정의”와는 더더군다나 멀어져 있고, “건설경제”에 더 가까워져 있고, 대통령의 유신적 의미에서의 리더십에 더 가까워져 있다. 시간을 돌이켜, 74년도로 돌아가보자. 그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말하면 온 국민이 지지하고 기뻐했었던가? 지금보다 더 많은 반대와 정서적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진짜 문제는 좌파에 있는 것은 아니다. 뿌리도 짧고 현실적으로 여건도 부족해서 별로 공부할 수도 없고, 그저 현장에서 몸으로 때우는 것과, 어른들의 명망을 이용해서 재야인사의 명망가 운동을 할 수밖에 없던 좌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별 거 없다고 해도, 핑계는 많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우파 소위 “건전한 보수”의 자화상을 보자.
정부 프로젝트 따먹기로 일관하고, 인맥 챙기기와 자기 사람 챙기기,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농지투기와 부동산투기도 하고, 온갖 사보타쥬(일종의 태업-편집자 주)를 통해서 별 볼일 없는 것을 ‘엄청난 것’으로 둔갑시키는 집단 마케팅과 PR 전략 외에 도대체 이 땅의 건전한 보수들이 하고 있는 일이 뭐가 있는가? 좋은 학교도 나오고, 좋은 학벌과 사회의 온갖 자양분을 다 섭취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서 사회 각계에 뻗어있는 좋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는 이 땅의 건전한 우파 지도자들과 우파 학자들이 지난 2년 반 동안 도대체 무얼 했는지 한 번 돌아보시기를 바란다.
좌파의 생명은 순수성에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초반 혁명의 시기에 좌파들은 기본적으로 다 불법자들이었고, 법을 어기는 것으로부터 처음 사람이 된다. 그래서 순수하지도 않은데 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냥 범법자에 불과하다. 백두산의 국경가지고 북한과 시비 붙지 말라는 통 큰 외교를 한 주은래의 순수성을 의심하여 중국 혁명의 대장정 시기에는 주은래나 주덕도 모두 범법자였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파의 생명은 도덕에 있을지도 모른다. 별로 도덕적이지도 않은데, 많은 권한과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좋아할 이유가 없다. 최소한 교육의 기회는 “형평”하게 주겠다는 것은 좌파 이념이 아니라 우파들의 이념이다. 유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별로 도덕적이지도 않은 것이 우리나라 우파들의 현 주소가 아닐까?
하버드 대학이 좌파 대학인지 우파 대학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거리가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시카고 대학이라고 하면 무조건 우파 대학이라고 하지만, 막상 시카고의 여러 교수들이 전부 그렇게 경제주의에 집착하는 우파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좋은 대학이라는 점이고, 미국의 좋은 대학에서는 모교 출신을 교수로 임용하는 법은 없다. 우파들이 스스로 부패하는 점을 막기 위해서 스스로 만든 제도인데, 우리나라 우파들은 스스로의 부패를 막고 도덕적으로 건전하기 위해서 어떠한 장치도 만들지 않는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나라 우파들이 딱 한 번 움직인 건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수도이전 반대”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이유들을 만들어내던 시기이다. 물론 수도이전이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기준은 아니지만, 겨우 이 정도 일을 위해서 우파들이 자칭 “시민단체”를 만들고, 연대체를 구성하는 것은 너무 우스웠다.
21세기에도 좌파와 우파 논쟁이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아마도 중앙정치에서 사이비 공중전이 정치 담론의 전부라면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좌파에게는 별 거 없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었고, 심지어는 순수성도 별 거 없다는 것이 지난 2년 반동안 드러난 셈이다. 그렇다면 우파에게는 별 거 있냐는 질문에 우리나라의 우파들이 대답할 차례이다. ‘국토의 효율적 활용’에 죽 늘어서 있는 우파 전문가들, ‘동남아 중심국가’의 패권주의적 발성에 열광하는 우파 전문가들, 그리고 황우석 교수야말로 민족의 보배라는 열광에 죽 늘어서서 박수치는 우파 언론들, 이 속에서 과연 이 사회의 미래가 있다고 보는가? 집권만 하게 되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고, 좌파정부가 집권해서 지금 사회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라고 보는가? 오히려 이데올로기 장치에 숨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지금의 우파들의 현 주소 아닌가?
좌파 때문에 뭐가 안 된다는 아메바 같은 발상은 접고, 상식적이지만 도덕과 근면으로 스스로를 무장한 건전한 우파의 논쟁을 보고 싶다. 짧은 역사 속에서 이 땅의 좌파들은 최소한 민주화에는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긍정적인 평가도 지금까지이다. 그렇다면 긴 역사를 자랑하는 이 땅의 우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가?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에 기여를 했다고 자랑하지만, 그것도 지금까지이다. 21세기에 우리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서 도대체 우파가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지 스스로 대답하고 고민할 때이다.
땅투기와 실업 일반화 그리고 중산층의 보편적 붕괴와 전국토의 난개발과 농업붕괴가 자칭 좌파 정부 2년 반이 만들어낸 이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좌파도 별 거 없다고 말해도 할 말은 전혀 없다. 그러나 우파도 이 시기에 “기업 규제 완화”와 “행정수도 이전 반대” 외에 도대체 만들어낸 담론이 뭐가 있는가? “서민”이라는 말 뒤에 숨고 싶은 이 땅의 우파들에게 상식적이고 건전한 것을 위해서 그대들은 무얼 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지난 2년 동안 좌파는 분열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면, 우파는 부인들이 다단계 판매와 부동산 투기에 열 올리고, 기러기 아빠 되느라고 정신없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30년 된 레파토리는 21세기에 더 이상 안 통한다. 10% 이상의 고성장으로 서민들도 과열화된 경기에 묻어서 잘 먹고 살 수 있었던 70년대 경제호황은 현 세계경제 구도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입만 열면 중국이 추격하고, 베트남이 추격하고, 기술력은 낙후되어 있다는 당신들이 레파토리 역시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별 거 없다.
좌파에게는 아직은 “평화”와 “극우파 반대”라는 개척되지 않은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있다. 우리나라 우파들은 극우파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야 하고, 도덕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또한 아직은 “별 거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우파는 아직 건전하므로 이 사회에는 희망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나도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우파들은 매일 새로운 것을 가지고 온다”는 진단에 동의하겠다.
선진국의 우파들은 당신들처럼 매일 증권 가격표나 부동산 시세표나 들여다보거나 부인과 자식까지 외국 유학 보내고 월급에 매달려서 허덕거리면서 살지는 않는다. 하다못해 프랑스 우파의 정점에 있는 기 소르망도 아직은 책을 보면서 독서량에 혀를 내두르도록 “좋은 유럽”을 위해 나름대로는 고민을 한다. 막상 자칭 좌파 정부도 집권 2년만에 극우파 정책으로 선회한 이 나라에서 정작 우파들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민족주의? 기술중심주의? 아니면 고도성장 시기로 복귀를 위한 경제구상?
내 눈에는 우리나라 좌파에 별 거 없는 것처럼 우리나라 우파에도 별 거 없어 보인다. / 논설위원
* 필자는 경제학박사로 초록정치연대(
www.greens.or.kr) 정책실장입니다. 최근
<아픈 아이들의 세대 - 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뿌리와이파리, 2005)를 출간했습니다.
* 필자의 블로그안내
http://blog.naver.com/wasang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