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내 배 부르니 종의 밥을 짓지 말라?
신자유주의의 비밀, 시장은 과연 만능인가?(1)ba.info/css.html'>
 
이광석   기사입력  2002/10/10 [22:33]
{IMAGE1_LEFT}단재 신채호는 한국에 어떤 사상이 들어오기만 하면 원조보다 더한 사상이 된다고 한다. 불교가 들어오면 더 불교적이 되었으며, 유교가 들어오면 더 유교적이 되었다고 한다. 기독교가 들어오니 또한 더 기독교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흐름은 시장으로의 회귀이다. 효율을 지상으로 하는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지자 한국의 현실은 시장만능주의로, 신자유주의가 흥행에 성공하자 구세주로 치닫고 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또한 원조보다 더한 사상이 되어 가고 있다.

문제는 지지난 세기의 자유주의와는 달리 신자유주의는 모든 정책의 기준을 시장에 둔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아래 시장의 문제점은 서구에서는 국가개입이라는 정답을 통해 해결하였다. 그것이 바로 복지국가로 이어졌고 이른바 모두를 위한 방법으로 보았다. 이는 어느 면에서는 인간이성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황금기의 잔치는 끝나버렸다. 모두를 위한 사회를 만들려면 더 돈을 내야하며 국가기능도 재조정해야 한다는 게 밝혀졌다. 능력있는 자들은 내 돈을 너무 많이 가져간다고 불평했고 능력없는 자들은 국가가 주는 돈이 작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20세기 후반기 들어와 서구에서는 성장이 멈춘 후, 국가개입이라는 문제점에 대해 시장으로의 회귀라는 정답을 찾아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복지국가의 틀은 유지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킬 방법을 찾는데 머리를 싸맨다. ”부자를 더욱 부자되게, 나머지는 인간답게“ 하려는 게 그들의 소망이다.

흔히들 영국의 대처리즘을 한국이 짝사랑하여 벤치마킹하는 경우를 보는데 대처리즘은 영국에서의 문제점, 즉 지나친 국가복지가 초래한 문제점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이다. 이점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눈감아서는 안된다. 분명한 점은 영국의 신자유주의는 우리보다 훨씬 복지지향적임을 알아야 한다.

“부자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모두가 부자되는 것이 시장에서 가능한 일인가? 냉정히 시장을 분석해 봐야 시장의 한계와 진정한 시장과 국가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경제(학)적 관점의 시장개념 분석은 널리 알려져 있기에 여기선 다른 차원의 시장개념을 이야기해보자.

첫째로, 시장은 가치판단을 배제한다. 따라서 정의(Justice)라는 개념은 시장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성매매를 ‘비즈니스’라고 주장하듯이 시장에만 맡겨놓을 경우 어느 사회의 확립된 사회질서 (또는 흔히 말하는 정의)가 시장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리라는 기대는 접어야한다.
둘째로, 시장은 원자주의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개인에 대하여는 무한한 신뢰를 보내지만 조직이나 제도는 시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셋째로, 시장은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신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선택의 자유는 시장참가자 모두가 자율적이고 자기책임적이라는 가정하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이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장자체가 어떤 경우 자율을 가장한 타율, 자기책임이라는 이름아래 울며겨자먹기 식의 선택을 강요한다. 대체로 강자는 조건을 내걸고 약자는 거부냐, 선택이냐의 자유뿐인 경우가 많다 (실업자를 생각해 보라).
넷째로, 시장은 역사를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준점은 현재이며 현재의 상태가 최선이라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지난날 국가정책에 의해 시장경쟁력을 갖춘 자 (시장의 강자)는 지난날을 생각하지 않고 현존의 질서에서 혜택을 더 누릴 수 있는 시장질서를 선호한다.
다섯째로, 시장은 이기심에 기초하므로 인정이나 이타심을 고려하지 않는다. 시장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가격제도로 묶은 형태이다.
마지막으로, 시장은 강자독식의 세계이다. 약자의 존재형태는 강자의 승리를 빛내기 위함일 따름이다. 따라서 시장탈락자에 대한 배려가 시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재상품화의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IMAGE2_RIGHT}그러면 시장은 악의 화신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시장없이 어떻게 자유경제를 논하겠는가? 시장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효율성극대화이기에 효율을 추구하는 분야에서는 비효율적일 때 시장으로의 회귀는 정당하다. 주장의 핵심은 시장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효율성극대화 패러다임의 관점으로 모두를 규율해서는 안되며 시장만이 효율성을 보장한다는 미신을 떨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조금 전에 언급한 바처럼 시장은 가치중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가치를 지나치게 부여하는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시장은 전지전능한 신으로 둔갑한다. 두루 알다시피 시장이란 정보매개기능이 존재하여 자율적 질서의 형성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런데 시장주의자들은 시장을 모든 제도보다 우선시킨다. 국가나 민주주의도 시장만 잘 작동되면 가능하다고 한다. 바로 이게 문제이다. 시장주의 원조들(예컨대 프리드만)의 시장만능적인 생각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더욱 외곬으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교육에 관한 것도 (교육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 언어에 관한 것도 모두 시장논리를 강요한다. 아파트 값을 잡기 위해 교육과정이나 입시제도를 재정경제부에서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하는가 하면, 국제경쟁력을 높인다고 경제적 관점에서 영어공용화를 떠들어댄다.

그들의 사고의 경직성은 모든 문제를 경제적 관점으로 보니 복지를 인간의 관점이 아닌 시장의 관점으로 본다. 그리하여 “지난 5년간의 개혁이 친시장적이라기보다 정부개입을 강화하는 형태로 심하게 왜곡되었-----노사관계, 공정거래정책, 사회복지정책, 의료 및 교육정책 등에서의 반시장적 정책의 시행과----”라고 주장도 등장한다 (손병두,월간조선 10월호). 그런데 “재벌의 과거형태로의 회귀나 그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이라는 어느 후보의 이야기는 왜 나왔는가? 시장주의자의 눈에는 만족이 없고 점진이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 있어서의 문제점은 원조보다 더 원조가 되어 감에 있다는 단재의 명제로 다시 돌아가 보면 복지수준이 32강도 안되는 주제에 “위하여, 신자유주의! 시장만세!”를 외친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자는 윤리적이든 실질적이든 그렇지 않은 자를 돌볼 의무가 있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자들은 그 책임은 팽개치고, 그렇지 않은 자는 하소연할 데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시장이 강자에겐 기회이지만 약자에겐 더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어느 면에서 시장으로의 회귀는 가장 쉬운 방법이며, 또한 책임 떠넘기기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사회적 약자에게도 이른바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폴라니가 언급한 바처럼 자본주의적 시장기능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복지기능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시장에 참가하는 다수가 시장에서 제외된 소수를 구하지 못한다면 시장도 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시장타령만 한다.

내 배가 부르니 종의 밥 짓지 말라니 될 법한 소리인가? / 논설위원

* 필자는 영국 뉴카슬대학에서 사회정책 박사과정에 있는 연구생으로, 복지정책과 관련해 영국과 한국의 학회에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2/10/10 [22:33]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