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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kDoo의 소름돋기] 유령이란 무엇인가?
악마의 등뼈 (El Espinazo Del Diablo),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길
 
김정곤   기사입력  2004/07/16 [20:50]
1937년 4월 26일 스페인의 작은 마을 멀찍이 떨어져있던 전쟁고아기숙사에 한발의 거대한 폭탄이 떨어지고 바로 직전 한 소년의 생이 무참이 찢겨집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첫 번째 의문을 접하게 됩니다.
 
[유령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정답 없는 질문은 그저 질문으로 남는 법, 우리는 이제 인간과 귀신이 공존할 수 밖에 없는 이질적인 세계를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동양의 장화, 홍련은 머나먼 이국 땅 스페인의 혼란기에서 ‘산티’라는 이름을 얻은 체 끊임없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줄 이를 찾아 나서고 산티는 자신의 한숨에 귀 기울이지 않는 수많은 이들을 무시한 채 고난의 길에 첫발을 들여놓은 ‘까를로스’에게 그의 한숨을 풀어 놓습니다만 허공에 진득한 피를 뿌리고 다니는 유령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요. 더군다나 무엇인가를 전하고자 하는 귀신 혹은 유령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사회에 접근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용감했던 (죽어버린)좌파의 아들 까를로스는 손에 묻은 타인의 피를 닦아내고 과감히 산티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12덩이의 금에 미쳐버린 ‘하킨토’의 광기를 밝혀내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제는 유령이 되어버린 산티가 사용하던 12번째 침대에 자리한 까를로스가 12덩이의 금에 미쳐버린 하킨도의 광기를 막아내는 건 너무나 당연해 보입니다. 12번째 자리를 차지한 까를로스는 ‘유다?’이자 예수의 아이가 아니었으며, 그리하여 “입을 열면 두 동강을 내 버리겠다”는 하킨도의 협박을 배반하는 건 하킨토가 왕이 아니라 ‘버려진 왕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12번째를 부여 받은 까를로스는 사실상 유다의 위치에 올라설 필요가 없었지요. 이미 까를로스가 도착하기 전 12덩이의 황금에 이끌려 스스로 떠났던 기숙사를 다시 찾아온 하킨토는 기숙사 초기의 아이로서 진정한 배신자 유다의 위치를 이미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은 사람’을 볕에 말리는 이유가 다음에 올 정권을 대비하기 위한 것인 것처럼 하킨토는 12번째 사도였던 자신의 위치를 거세당하며 단지 배신자이자 도둑으로서의 위치만을 차지하게 됩니다. 때문에 황금의 광기에 눈이 먼 하킨토를 막아내는 건 까를로스 혼자의 힘이 아니라 아이들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이제 종교적 의미를 제거해버린 공간에 남는 건 생짜의 인간들이며 더군다나 미래가 남아있는 아이들의 연대를 통해 배신자이자 도둑은 제거됩니다.
 
▲악마의 등뼈 영화포스터     ©영화사 포스터
영화에 등장하는 ‘악마의 등뼈’는 척추가 노출되어 사산된 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데올로기의 전쟁에서 상처 받고 죽어간, 기실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민중들에 다름 아니며 전쟁의 광기의 대한 직접적 묘사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좌파와 우파의 전쟁의 와중에 전쟁고아기숙사에 숨어 지내던 ‘지식인’은 민중(악마의 등뼈)의 피(악마의 등뼈로부터 추출한 술!)를 수혈 받지만 그의 각성은 결국 자신의 존재의 ‘중심’을 차지하던 이의 죽음을 통한 직접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이루어집니다(고통 받은 자만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불변의 진리).
 
이제 영화의 마지막 우리는 다시 최초의 질문을 대면하게 됩니다.
 
[유령이란 무엇인가?]
 
결국 너무도 나약하여 ‘네루다’가 될 수 없었던 어느 지식인 유령의 고백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이 영화는, 그러나 한숨짓는 아이인 산티가 죽어가는 하킨토를 끌어안음으로써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지식인 ‘카사레스’는 하킨토를 죽이는 대신 갇힌 아이들의 문을 열어줍니다. 이제 이 참혹한 이데올로기의 전쟁에서 좌와 우, 이 모두는 커다란 화염 속에 묻혀 사라지고 남은 것은 황금을 약탈하려는 도적떼와 전쟁의 상흔이 트라우마로 깊숙이 자리하게 될 남겨진 아이들과의 싸움뿐이나 결국 도둑(들)은 살아남고 버려진 왕자는 죽음을 맞이하며 남겨진 아이들은 다친 몸을 이끌고 걸어서 하루가 걸리며 낯의 작렬하는 태양과 밤의 살을 베어내는 추위를 뚫고 폐허가 된 마을로 고난의 행군을 해야만 합니다. 폐허 속에 무엇이 남겨져 있을지 아무도 모른 채로 말이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쩌면 이모든 건 유령(들)의 꿈일지도 모릅니다. 산티의 죽음 직후 떨어져 내린 거대한 폭탄이 기숙사를 모두 불태워 버릴지라도 이미 죽은 산티는 그가 잠긴 물속에서, 그리고 그를 에워싼 탁한 물의 두께와 그 두께만큼의 돌 벽에 눌린 채 지독한 악몽을 영원히 이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며, 혹은 지식인 카사레스가 죽음 이후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니까 이 모든 끔찍한 이야기들은 이미 죽은 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며 바로 산 자를 위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떨어진 거대한 폭탄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한줌의 재로 만들기에 충분했었고 이를 계기로 일어선 지식인들은 ‘국제 여단’의 이름으로 파시즘에 대항하지만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그리고 2001년, 영화 속 아이들의 놀이터에는 터지지 않은 한발의 불발탄이 있으며 심장박동 소리와도 같은 초침소리를 조금씩 흘리며 끈질기게 뿌리 박혀 있지요. 이제 처음의 질문이었던 ‘유령이란 무엇일까요?’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의 주인공은 자신이 ‘유령’임을 밝히며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아니 사실은 어둠 속에 파묻혀 숨죽인 채 스크린을 응시하던 우리들이 ‘유령’임을 선언하는 말에 다름 아닐지 모릅니다. 기숙사 한가운데 뿌리내려 광기의 초침을 째깍 이던 그 거대한 폭탄이 스스로 폭발하기를 거부하던 그것처럼 그 폭탄을 다시 터트리는 것 또한 우리들 유령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다시, 정답 없는 질문은 그저 질문으로 남는 법. ‘유령’에는 정답이 없으나 ‘악마의 등뼈’를 구성하는 저 고통스런 이야기들, 어디선가 너무나도 많이 들어본 이야기들이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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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7/16 [20:5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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