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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말글(국어)정책은 약효가 다 됐는가?
외국인을 위해 언어정책을 강행하는 사람들ba.info/css.html'>
 
이광석   기사입력  2002/09/30 [03:32]
현재의 넓은 의미의 국어정책은 말과 글의 정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글의 정책은 한글전용 정책을, 말의 정책은 국어전용 정책을 기조로 한다.

한글 전용정책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전통적 보수주의에 기초하였고 그 실용적 기반은 일본에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대사관의 문정담당관은 한글전용정책을 뒤엎으려고 노력하였고 한자를 함께 쓰려고 하는 한국보수주의 운동에 일본 신문들은 ‘서양에 도취되었던 한국의 언어정책’이 그들의 영향권에 들어왔다고 환호하였다. 글의 정책에서 보수주의자들은 전통문화의 계승이라고 주장하면서 낱낱의 한자에 집착하고 있었으나 시대의 대세는 보수주의자보다 훨씬 앞서가 이제는 한자를 점점 박물관으로 보내고 있다.

한글전용은 글자의 기계화라는 명제에서 보여주는 효율성과 누구나가 알기 쉽게 접근 가능하다는 민주성과 보편성의 결합이었다. 이러한 한글전용의 이론적 기초는 언어학에서 얻고 (특히 소쉬르 언어학) 또 민족적 언어철학관 (특히 훔볼트)에서 정당성을 확인받았다. 한편 그 실용적 기초는 같은 표음문자인 영어에서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 명제는 글자의 기계화 (또는 컴퓨터화)가 이루어지니 효율성은 추구해야 할 원리로 더 이상 여기지 않고 있다. 또한 누구나가 알기 쉽게 접근가능하다는 민주성과 보편성도 일단 이루어지니 보편성을 업신여긴다. 즉 한글전용정책의 성공이 보편성 대신 수월성의 추구로 이어지게 하였으며 그 수월성의 추구는 영어로 향하고 있다.

{IMAGE1_LEFT}말의 정책 즉 국어전용 정책은 고난 가득찬 지난 역사 (예를 들면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배운 말의 역사성과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말의 공통성에 기초하였다. 대체로 말에 관한 정책은 한글전용론자나 국한혼용론자나 일치하였다. 그런데 말에 관한 정책의 변경을 꾀하는 주장은 신자유주의로부터 나왔으며 그 신념은 신자유주의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언어학과 그 유사학문의 토론범위를 넘어 경제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다 알다시피 신자유주의의 공격은 어떤 나라의 고유성을 보존할 공간을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집요한데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말의 역사성과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공통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은 말의 역사성과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공통성은 불가침의 영역처럼 견고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 경제적 이익 앞에서는 그 역사성도 잊혀져 가고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말의 공통성 또한 인류구성원으로서의 영어공통성으로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 아래서 국어전용 정책은 영어의 실용성의 위력과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해 국어학자들과 국어에 관련된 단체는 국어정책에 대해 외면적으로는 한 목소리를 내는 듯하나 실상은 지난날의 대립구도를 되풀이하는 것 같다. 영어권이 세계를 이끌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겐 중국의 등장은 우리 말글 정책에 전환을 요구하는 압력을 더더욱 가하고 있다. “한자는 한문을 위하여”라는 한글전용론자들의 주장은 중국어라고 하는 국제화된 그리고 보다 실용적인 말의 공격 앞에 당황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는 “한자는 중국어를 위하여”라는 주장이 널리 퍼지고 있다 (예를 들면 여러 회사에서 회사 들어올 때 요구한다는 한자검증시험). 이 틈을 이용하여 국한혼용론자들은 한글전용을 훼손하려 한다. 하지만 “한자는 우리말을 위하여”라는 주장을 편 국한혼용론자들도 딜레마에 빠졌다.

{IMAGE2_RIGHT}중국어의 압력이 국한혼용을 주장하는데는 유리하지만 한자가 우리와 다른 간결체 (간화자)라는 사실이다. 중국어는 말(외국어)로써 따로 배워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또 중국의 글자개혁 노력 (즉 한자의 상형성이나 표의성을 포기하고 한자의 표음성만을 인정하려는 운동)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더욱이 영어의 압력에는 같은 논리로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정책당국자의 의지의 문제이다. 경제적 이유로 한글날을 폐지하는데서 보여주는 바처럼 "언어주체성이 밥을 먹여주지 못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하여 간판에 한자의 삽입이 보여주듯 '우리를 위한 언어정책'이 아니라 '남을 위한 언어정책'에 입각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관광은 문화에 앞선다’고 외친다.

옛날 독일 국민이 나폴레옹 군대의 군화에 짓밟혀 신음할 때 철학자 피히테는 희망을 잃은 자기나라 국민에게 전국을 다니며 삼엄한 나폴레옹 군대의 감시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강연을 하였다. “지금은 우리가 힘이 없어 굴복하지만 100년을 기약하고 젊은이를 교육시키자고”. 그것이 바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약속한 세월(100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 염원을 이루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일반백성들이 갈곳 몰라 방황할 때 방향을 제시하고 그 염원을 이루도록 안내하는 것이 엘리트의 의무가 아닌가?

우리나라의 지난 엘리트 가운데 서재필은 그런 면에서 돋보인다. “낮은데로 임하소서”를 지향하는 엘리트이었기에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만들 때 그는 외쳤다. “이 신문은 남녀노소 상하귀천이 다 볼 수 있도록 함이라고”. 그 이상을 이룩하였기에 지금의 국어정책을 팽개치려는가, 그 이상이 꿈이기에 팽개치려는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평범한 진리이다.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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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9/30 [03:3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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