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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나쁜 남자'
수구권벌들이 짓밟은 땅에는 봄이 오지 않는다ba.info/css.ht
 
임흥재   기사입력  2002/09/03 [21:27]
나는 영화관에 거의 가지 못한다. 일부러 가지 않는 편이라 해도 맞는 말일 것이다. 우선 극장에 가서 차분히 영화를 관람할 마음의 준비가 부족한 것이 제일 큰 이유이겠다. 경황없이 분주하던 언제부터인가, 정확히 말하면 결혼한 이후부터 발길이 뜸해지던 극장이란 데가 내게는 점점 어색한 공간이 되더니, 타성인지 관성인지 시간의 여유가 있는 요즘에도 극장이란 곳이 영 낯설기만 하다.

그만큼 나의 삶이 윤기가 없다는 슬픈 고백이기도 하겠다. 비디오 세대가 되가면서 나의 청춘과 열정도 은막의 뒤로 사라졌다. 가끔씩 찾던 비디오 대여점도 해를 넘길 수록 자주 찾지 못한다. 살이를 거듭할 수록 내게서 책이란 것이 낯설어 지듯이 영화도 낯선 지점으로 자꾸만 멀어져 간다. 그렇게 나는 나의 꿈과 열정을 스크린에서 브라운관으로 좁히며, 그리고 이제는 불빛마저 꺼져버린 캄캄한 세상으로 나를 밀어 넣으며 살아간다.

왜소해지고 초조해진 내가 싫어서 나는 극장엘 더욱 가지 못한다. 그 꽉 막히고 어두운 공간에서 바라보는 환한 스크린 속의 세상에서 나는 불안하다. 희망없이 살아가는 것은 힘겹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고 살다가 그 희망을 빼앗기며 살아내기란 더욱 힘겹다. 내가 영화관을 가지 못하는 이유다.

영화는 꿈이다. 희망이며 전망이다. 홍콩의 뒷골목을 비추는 조잡한 느와르(noir)도, 뉴욕 할렘가의 갱스터 무비도, 심지어 파괴된 지구의 암담한 미래를 투사하는 SF도 영화는 본질적으로 밝은 빛으로 만들어진다.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 같은 거장들의 필름이 아니더라도, 3류 재개봉관에 동시상영으로 걸리는 영화일지라도 모든 영화는 눈부신 빛으로 태어나는 꿈이며 동경이며 희망과 사랑이다.


불문학자인 김화영교수의 영화이야기 ‘어두운 방안에서 내다본 밝은 세상’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오직 그 제목에 매료되어 사들고 온 책이다. 너무 그럴싸한 제목만으로 나는 감명을 받았다. 내가 있는 어두운 방안, 밝은 세상을 내다볼 스크린이란 창마저 없다면, 우리는 그 고독과 어두움을 견디기 힘들리라.

간밤에 몰아친 태풍 ‘루사’는 내가 겨우 차지한 밝은 공간, 나와 아내와 나의 아이들이 사는 아파트 베렌다의 유리창틀을 엿가락처럼 구부려 놓았다. 바다가 보여 그나마 내 가슴에 파란 피를 돌게 하던 나와 내 가족의 창(窓)을 루사는 밤새 날선 손톱으로 긁어댔고 기분 나쁜 울음소리로 불면하게 했다.

그 밤에, 나는 그 미친 바람과 싸우듯이, 저 바람 같은 미친 세상을 거역하기 위하여, 눈을 부릅뜨고 (비디오)영화 한 편을 보았다. ‘나쁜 남자’를 보면서 내 안의 온갖 ‘나쁜 것’들과 싸웠고 앞으로 싸우게 될, 아니 꼭 싸워야 하는 세상의 ‘나쁜 것’들에 대한 적의를 ‘미친 바람’처럼 불태웠다. 그러면서 나는 일전에 임순례를 만나며 울었던 그 숨죽인 오열에 몸을 떨었고 김기덕이 드러내는 길들여진 욕망에 치를 떨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 삼류가 되고만 일류의 꿈

{IMAGE1_LEFT}내가 영화라는 것을 떠올리는 한,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시종 울었다. 눈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가슴에서 철철 흘러 내리는 눈물을 나는 주체할 수 없었다. 주연배우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나는 성우인가 하는 주인공에게 빨려 들어갔고 그의 기타소리 올겐소리에 나의 영혼은 사로잡혔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그대로 내 안에서 들려오는 지나간 시간의 절규였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서는 싸구려 밤무대는 그대로 토막토막난 내 삶의 흔적이었다. 스크린 속의 성우는 삼류 악사 성우일 수 없었다. 그는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우리들의 슬픈 모습이었고 여전히 울고 있는 나의 그림자였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먹고 살기 위하여 꿈을 팔았고 철들며 고이 간직한 아름다운 희망들을 빼앗겼다. 우리는 늘 성우처럼 진실한 꿈을 꾸었으나 탈을 쓰고 둔갑한 가짜들의 농간으로 언제나 후진 뒷골목의 싸구려 밤무대를 전전해야 했다. 그는 사랑하여 노래할 뿐이었으나 세상은 그 노래를 들어 주지 않았고 제 맘껏 노래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밀려나고 쫓겨나며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울음이 되어 갔고, 그는 울기 위해서 노래하며 옷을 벗었다. 울지 못하면 그는 살 수 없음으로 울었다. 그의 곁에서 함께 노래하던 친구들 혹은 노래벗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가짜 세상의 편에 서면서 노래를 버렸다. 그들은 탈춤을 추는 가짜들을 위하여 이제는 풍악을 울렸다. 그들은 노래할 수 없었다.

우리도 노래하지 못했다. 아니 육성으로 부르는 진실한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배운대로의 진실한 믿음과 선한 사랑을, 느낀대로의 아름다운 마음을 담아 부르는 노래를 우리는 부르지 못했다. 빈들판을 울리는 담대한 가슴으로 나설 용기가 없었다. 적당히 타협하고 포기하며 세상의 음율과 곡조에 나를 맡기며 흥얼댈 뿐이었다.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웅얼대거나 가성을 써가며 억지 옥타브를 높이는 것이 우리가 부른 노래였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우리는 누군가 메모리칩에 입력해 놓은 정해진 박자와 템포와 리듬에 맞춰 노래할 뿐이다. 매카니즘에 가두워진 우리는 그 매카니즘을 만든 자가 선택한 번호의 곡만을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울 수 있고 소리칠 수 있으면 차라리 그는 행복하다. 우리는 왜 울어야 하는지도 이미 잊어버렸다.

적어도 ‘와이키키 부라더스’의 성우는 울줄 안다. 비록 노래인지 울음인지 모르는 자신의 외침을 위하여 알몸에 기타를 친다. 기타 현의 날카로운 떨림에서 소리가 만들어지고 그 소리는 내 가슴에 송곳처럼 박힌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노래는, 그러나 누구도 쉽게 가지지 못하는 일류의 꿈이다. 그의 노래는 곧 낙원 ‘와이키키’가 되고, 그가 저주하지 않고 아직도 노래 부름으로 인하여 그의 곁에 있거나 떠나 있거나, 우리들은 그의 브라더스가 된다.

그래서 그가 서는 싸구려 3류 무대는 일류의 꿈이 서는 무대다. 우리가 부끄러워 할 것은 서있는 우리들의 무대가 3류인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꿈이다.

나쁜 남자 - 어긋난 사랑(애착)과 길들여진 욕망

{IMAGE2_RIGHT} 김기덕은 기인이다. 정직히 내가 본 김기덕의 영화는 단 두 편에 불과하다. 또한 서두에서 말했듯이, 나는 영화를 자주 보지 않으며, 따라서 나는 문외한이다. ‘나쁜 남자’를 보게 된 것도 매스콤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조재현 때문이라고 말해야 솔직하다. 그럼에도 내가 감히 기인 운운 하는 것은 그의 영화의 독특함 때문이다.

성에 대한 탐구와 그의 집요한 영화작업은 곧 인간에 대한 해부학적 시선에 가깝다. ‘나쁜 남자’에서의 한기와 선화의 사랑은 어긋나 있다. 이는 사랑이 아니라 애착 혹은 집착이다. 선화와 한기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부류의 인간형으로, 섞일 수 없는 유전자를 가지고 이 땅에 던져졌다. 그래서 선화는 대학생이고 한기는 창녀촌의 깡패(기도)다.

무엇이 그들을 만나게 하였나? 숙명 혹은 운명? 아니면 우연. 세상에는 우리의 말과 생각과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아귀 맞지 않아도 또한 돌아가는 수레바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 세상에 선화가 있었고 한기가 그녀를 보았다. 그것 뿐이다. 한기는 선화를 욕망하였으며 선화는 한기를 욕망할 수 없었고 욕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록 한기는 집착하였다. 단지 그것 뿐이다.

한기는 자신의 방식으로 선화를 욕망한다. 그래서 선화는 창녀가 되고 한기는 그녀를 훔쳐보는 것으로 자신의 그릇된 사랑에 탐닉한다. 생김새보다 더 강한 출신성분의 유혹은 한기의 똘마니마저 선화를 욕망하도록 한다. 그는 사랑한다고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스크린 어디에도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기덕에게 있어서 성이란 사랑의 욕망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야수의 본능이다.

피학과 가학, 매저키즘(masochism)과 새디즘(sadism)이 스크린을 채운다. 투명거울로 나뉘어진 공간은 밝음과 어둠으로 대조를 이룬다. 밝은 방안에 내동댕이쳐진 선화는 가리고 싶은 것이 많아 슬프고 어둔 밀실에서 훔쳐보는 한기는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아 괴롭다. 선화는 불을 끄고 혼자 있고 싶고 한기는 불을 켜 함께 있고 싶다. 모두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본능이다. 본능이 잠재되어 있거나 조화롭게 균형을 이룰 때, 인간은 평화롭다.

그러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본능의 발현은 평화를 깨트린다. 인간은 곧 야수가 된다. 뒤틀린 욕망의 폭발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의 욕망은 상승이다. 오르가즘이란 영어의 절정은 그대로 한국어의 '오름'과 동의어다.

반대로 폭발할 수 없는 욕망은 타락, 곧 떨어짐이다. 선화와 한기는 스스로의 욕망을 폭발시킬 수 없음으로 인하여 선화는 욕망하지 않았던 그 성욕에 자신을 길들인다. 타락하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었던 선화는 이제 스스로를 길들이며 스스로 욕망하고 있는 자신이 된다.

철저히 선화를 짓밟음으로 복수하려했던 한기 역시 어느새 고통스러움과 죄책감으로 선화를 보아야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양아치 한기에게는 이것 또한 타락이다. 그렇게 둘이는 애초에 서로가 원하지 않았던 정반대의 방향으로 타락해 간다. 선화는 ‘애욕’하고 한기는 ‘애착’함으로, 드디어 둘 사이를 갈라 놓았던 유리거울을 깨트린다.

나쁜 남자는 칼을 찌른 동생을 용서함으로 냄새나는 시궁창을 벗어나고 치마 끝단을 여미던 선화는 거추장스런 치마를 걷어 올림으로써 시궁창의 냄새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마침내 그들은 어둡고 밝은 방안에서 벗어나 뭍과 물의 경계선, 즉 상승의 욕망과 타락의 욕망의 접점에서 만난다. 함께 트럭을 몰며 더 이상 훔쳐볼 것도 부끄러워 할 것도 없는 욕망을 싣고 어딘지 모를 길을 간다.

두 편의 영화가 남긴 것

영화에 대하여 아는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내가 꽤나 긴 글을 썼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영화의 인상이나 비평은 더욱 아니다.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면서 노래하지 못했고 또한 내 노래를 잃어버린 나를 보며 울었다. 나쁜 남자를 보면서는 나도 모르게 길들여져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분명 노래하고 싶다. 목청껏 세상을 향해 나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다른 사람이 써준 가사에 남이 가르켜 주는대로 음정을 맞추어, 내 음색이 아닌 소리로 노래 부르고 싶지 않다. 또한 나는 세상에 떠도는 노래들이 아무리 듣기 좋고 감미로와도 그 노래가 악마의 궁전으로 나를 부르는 노래라면, 듣고 싶지도 부르고 싶지도 않다.

나는 비록 싸구려 밤무대를 전전하는 성우 같은 삼류일지라도, 기왕 글러버린 소위 출세를 위하여, 어차피 따라지 인생은 마찬가지인 것을, 성우의 곁을 떠나 업소의 주인(권력)에게 빌붙어 부끄러운 삶을 조금 더 연장하는 그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다. 내 노래를 들어주는 이 아무도 없고 나의 능력부족으로 제대로 된 노래 하나 만들지 못하여 삼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할 지라도, 나는 단 한 명의 팬과 함께 노래를 계속하는 성우이고 싶다. 나의 아이들과 아내에게 들려줄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느낌의 노래를 죽는 날까지 만들며 부르고 싶다.

나는 길들여지는 삶을 의심하고 싶다. 어린왕자의 여우가 말하는 길들여진다는 것은 내가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가짜들이 쳐놓은 그물과 사이비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어 서서히 자제력을 잃어가며 길들여지고 싶지 않다. 선화가 타락한 욕망에 길들여지듯이, 한기가 깡패답지 않은 모습으로 변질되어 가듯이, 추락하는 정력과 정심을 당연시하며 어느새 세상에 맞추어 사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태풍 ‘루사’가 할퀴고 간 곳곳에도 내년 봄이면 어김없이 새순이 돋고 꽃은 필 것이다. 그러나 수구권벌(守舊權閥)들이 이 땅을 또 한 번 짓밟고 지나간 후에는, 우리에게 봄은 다시 오기 힘든 계절이 될 것이다.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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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9/03 [21: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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