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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일탈의 빛무리, <숭어의 꿈>
삶의 현장에서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보고서
 
박준영   기사입력  2003/12/20 [11:19]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그리고 바다로 간다. 산란을 하러 온 사람들은 거기서 한때의 꿈을 방류하고 갈 것이다. 살다보면 제 자식들을 놓아 두고 온 그 바다가 그리울 때가 있다. 김하경의 소설 {숭어의 꿈}은 그렇게 방류한 꿈에 대한 얘기다. 그러나, 그것이 '한때'의 일이었다면, 이 소설은 그 매력을 금세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숭어의 꿈 / 김하경 저     ©도서출판 갈무리
'그럼에도 이 책에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장의 시계는 멈춘지 오래다.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다.'(p. 13)

일탈은 다시 반복된다. 숭어라는 물고기가 그러하다. 초겨울이 시작될 때쯤 그녀들은 은빛 뱃살에 제 자식들을 가득 품고서 민물에서 바다로 간다. 그리고 물길 찰랑이는 바위너설 근처에 산란을 하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막 알을 밴 그녀들을 기다리는 낚시꾼들의 미끼가 연안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숭어는 미끼를 물지 않는다.' 그물로도 그녀들을 잡기는 용이치 않다.

'그나마 배 두 척이 양 쪽에서 그물을 던져 삥 둘러싸고 막대기로 막 휘젖고 억수로 시끄럽게 소리를 내마 숭어가 겁이나 소리 나는 반대쪽으로 몰려다니다 그물 안으로 걸려든다 이기라.' (p. 35)

작가가 얘기하는 주인공들은 이렇게 일탈의 한가운데서 낚시꾼들과 한 판 드잡이하기도 하고, 뒤돌아서서 울분을 삭이기도 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작가의 목소리는 우리가 시위 현장에서 느끼는 격앙된 감정보다 그들의 일상 속에서 울리는 조용한 함성에 더 가깝다. '밭은 기침을 하면서 이불을 더욱더 힘껏 잡아당'(p. 108)기는 세상의 모든 해고자들은 이 소설 안에서 그러한 조용한 함성의 때 묻지 않는 현실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에게 절절한 것은 그 벗은 현실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이 소설의 복수인지도 모른다. 내면으로 다가오는 여기 한 떼의 숭어들은 우리 가슴 언저리에 몰려 왔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시 사라져 간다. 내년 초겨울 그녀들은 다시 올 것이다. 아니, 언제나 우리와 한마음으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자유롭게 할지도 모른다. 그녀들의 일탈의 힘으로 말이다.

비로소 우리가 깨닫는 것은 삶이 이러한 평범한 것들의 약동과 솟구침이 아니라면 의미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쾌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요한 바다에서 각자 숭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서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쾌할함이 작가에게는 처음에는 가슴 아릿하게, 그리고 문득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무관심과 '슬픔, 분노, 절규'또는 죽음조차 넘어서는 노동의 활력이 거기 있다.

'노동현장 얘기만 나오면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표정이 굳어진다…… 나도 그랬다. 살림살이가 스산한 철거현장을 찾아가기 전에도 그랬고, 구사대에게 두들겨 맞은 조합원들을 방문하기 전에도, 열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도 그랬다. 솔직히 피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참 묘하다. 막상 현장을 찾아가보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참담한 비극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붕대 감은 손으로 여전히 먹고 마신다. 다리를 절룩이며 웃고 떠들고 농담까지 나눈다. 슬픔, 분노, 절규만이 가득 차 있을 거라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다.' (p. 14)

그물에 걸려 이미 횟감이 되거나, 비늘 여기저기 생채기 붉게 드러난 사람들을 여기서 '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우리의 '빗나간 예상'을 미리 숙고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에게 술이나 한 잔 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축제에 어울리라고, 이 넓은 노동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지느러미 힘차게 뛰어 올라 보자고 말한다. 어깨 툭 치며,

'원래 뛰는 고기는 미끼를 물지 않는 법이다. 알긋나?' (p. 35)

암, 알고 말고다. 누구나 '빛나는 삶의 한 순간' (p. 16)이 있다. 그것들이 세세년년마다 모인다. 달빛 교교한 바다, 은빛 빛무리 가득하다.


[작가 소개]

작가 김하경(1945~ )은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인일여고, 봉천여중, 신림여중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주간시민』에 칼럼을 연재했고 1978년에 교육평론집 『여교사일기』를 냈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는 동아방송, 한국방송공사에서 방송 작가로 일했다.

1985년부터 서울 사당3동 세입자대책위원회에 참여했고 1988년까지 서울시 철거민협의회, 전국 빈민협의회 등에서 빈민운동을 했다. 1988년 계간 『실천문학』 봄호에 단편 ?전령?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1989년부터는 월간 『노동해방문학』 5?1 문예창작단에 참여했다. 1990년 11월 『합포만의 8월』로 제3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고 이 작품은 이듬해 『그해 여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꽁트집 『호루라기』(과학과 사상사, 1992)와 장편소설 『눈 뜨는 사람』(일터와 사람, 1994)을 냈고, 마창지역 노동소설 모음집 『그래! 다시 하는 거야』(1994)를 엮었다.
1999년 한국 민주노동사 연구의 소중한 모범이자 치열한 보고문학인 『내 사랑 마창노련』(갈무리) 상?하권을 출간했다. 경남도민일보 상임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보르헤스와 마르께스의 환상적 리얼리즘 소설들과 아라비안 나이트를 정독하고 분석한 후 2003년 7월부터 진보네트워크(
http://go.jinbo.net/commune/index.php?board=1001) 참세상에 <김하경이 들려주는 천일야화>를 연재중에 있다.

[작가의 머리말]

비상구란 없다

2003년 10월 17일 부산의 한진중공업노조 김주익 지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9일 동안 35미터의 크레인 위에서 사상 초유의 초특급 태풍 ‘매미’에도 끄떡 않고 버틴, 마흔 살 사나이가 세 아이와 아내를 남겨 두고 차디찬 시신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아직도 크레인에서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시신을 떠나지 못한 그의 영혼 역시 크레인 상공에 매달린 채 구천을 헤매고 있다. 깃발로 상징으로 펄럭이고 있다.

6일 후 2003년 10월 23일이다. 이번엔 대구에서 세원 테크 이해남 노조지회장이 마흔 한 살의 목숨을 불살랐다. 또 사흘 뒤 2003년 10월 26일 서울에서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이용석 광주지역본부장이 서른 한 살 아까운 목숨을 뜨거운 불 속에 던졌다.

대기업노동자, 중소기업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가 똑같이 죽음을 택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30년 넘게 노동자의 죽음이 계속되는 나라 대한민국. 카드 빚에 몰린 도시 서민들, 농가부채에 허덕이는 농민들과 황폐화된 어장에 한숨짓는 어민들 모두가 벼랑 끝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 2003년 지금, 이 나라 대한민국에는 비상구가 없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1990년부터 수년 간 수많은 사람들이 제3자 개입금지를 철회하기 위해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피를 철철 흘리고, 정문에서 쫓겨나고, 철창에 갇히고, 심지어 하나뿐인 목숨까지 제단에 바쳤다. 그러나 세상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던 1996년 12월, 엄동설한의 매서운 추위를 뚫고 뜨거운 총파업의 열기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1997년 5월 노동법개정이 이루어져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은 스르르 제 풀에 사라져 버렸다.

손해배상청구 소송제도가 시행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손에 피를 안 묻히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서운 칼이다. 칼날도 보이지 않는 이 칼에 목이 베인 사람들이 그 얼마던가. 살아남은 사람들의 운명은 또 얼마나 참담하게 뒤바뀌었던가.

2003년 1월 두산중공업의 배달호 열사가 죽었을 때 정부는 가압류의 남용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입에 침도 마르기 전에 정부는 철도 노동자들에게 가압류를 남용했다. 그리고 이제 줄줄이 노동자들이 피를 바쳤음에도 가압류는 풀리지 않고 있다.

이 책은 10년 동안 현장을 발로 뛰어다니며 쓴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장의 시계는 멈춘 지 오래다.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다.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다.

아니다. 더 나빠졌다. 점점 더 넓게, 모든 일터로 확대되고 있다.

하기야 삶의 현실뿐인가. 역사도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태풍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던 100년 전의 우리 역사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똑같다. 보수와 진보의 날선 대립은 여전하고, 미 일 중 러 등 열강에 포획된 채 북 핵과 이라크 파병 등 나라 안팎이 전쟁의 위협 속에 떨고 있다. 지구제국 전체가 길을 잃고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다. “어제의 불행은 끝! 오늘의 행복은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현실의 이야기를 끝낼 수가 없다. 멈출 수가 없다.
강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그러나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다.

역사도 똑같이 되풀이 되어 계속된다. 그러나 과연 오늘의 우리는 어제의 우리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어제의 우리보다 오늘의 우리는 더 지혜롭고 더 깊고 넓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노동소설
노동현장 얘기만 나오면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표정이 굳어진다.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긴장한다. 주눅이 들어 몸을 움츠리기도 한다.

불편해하며 도망가거나 피하기도 한다. 가해자처럼 부채의식을 느낀다. 동참하여 함께 싸우든가, 하다못해 위로나 용기를 주는 말 한 마디, 물질적 도움이라도 줘야한다는 부담을 갖는다. 좋을 리가 없다. 안 보고 싶고, 안 듣고 싶어 한다. 알고 싶지 않아 도리질하고 외면한다.

나도 그랬다. 살림살이가 다 부서진 스산한 철거현장을 찾아가기 전에도 그랬고, 구사대에게 두들겨 맞은 조합원들을 방문하기 전에도, 열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도 그랬다. 솔직히 피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참 묘하다. 막상 현장을 찾아가보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참담한 비극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붕대 감은 손으로 여전히 먹고 마신다. 다리를 절룩이며 웃고 떠들고 농담까지 나눈다. 슬픔, 분노, 절규만이 가득 차 있을 거라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다. 심지어 시신을 옆에 놓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화장실에도 간다. 사람이 참 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사랑하는 동지가 다치고, 죽었는데…….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인생이 뭔지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한 병원 안에도 산부인과에서는 새 생명이 태어나고 영안실에서는 죽은 시신이 누워있다. 살다보면 슬픔이, 행복과 불행이, 믿음과 배신이, 희망과 절망이 어울려 찾아오지 않던가. 한 인간 속에도 사랑과 미움이, 용기와 비겁이, 장점과 단점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어울려있지 않던가.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때로 가증스럽게 남의 불행과 절망을 보면서 나의 행복과 희망을 확인한 적도 있다. 그런 나 자신을 혐오하면서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나는 이것이 사람의 진짜 참 모습이란 걸 알았다.

그러니 도망쳐 봤자다. 좋은 것만 보고 살고 싶겠지. 하지만 그건 진실을 피해 가짜에게 도망치는 것과 같다. 일시적 도피일 뿐 언젠가는 진실과 맞닥뜨리게 되어 있다. 진실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내가 주로 치열한 투쟁현장을 다루는 것은 그곳이 긴장과 갈등이 폭발하는 마지막 극점이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는 진실과 허위가 가장 잘 보인다. 인간의 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편의 짧은 이야기 속에 담아내는 건 쉽지 않다. 복잡하게 뒤엉킨 삶의 미로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애매하게 흐려지고, 전형으로 단순화하면 도식적이 된다. 정말 어렵다.

이야기의 재미, 표현의 미학, 문학적 감동, 새로운 형식의 창조 등 모든 문학이 요구하는 것은 노동소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럼에도 다른 소설에 없는 특별한 요구가 또 하나 추가된다. 뚜렷한 목적을 가진 주제의식이다. 노동소설을 노동소설이게 하는 차별성이 이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한계를 드러내는 노동소설의 치명적 약점이기도 하다.

사상과 윤리가 아닌 현실로, 교육과 계몽이 아닌 감동으로, 이 한계와 약점을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예술의 다의성, 미학적 탄력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예술과 사회의 절묘한 결합을 이루라고 주문한다. 그것도 불완전한 언어를 가지고서 말이다.

허공에서 가느다란 외줄을 타고 있는 기분이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균형감각을 잃는 순간 그대로 땅으로 추락한다. 진땀이 난다. 피가 마른다. 하긴 글 쓰는 것뿐인가. 산다는 것 자체가 그렇긴 하다.

숭어의 꿈
잠시 눈을 돌려 시원한 바다를 바라본다. 숭어 한마리가 파란 바다 위를 솟구쳐 오른다. 그 역동적인 힘찬 몸짓에 가슴이 설렌다.
사진을 찍듯이 숭어가 바다 위로 솟구쳐 오르는 순간을 포착하여 글 속에 영원히 담아둘 수는 없을까. 인간과 삶의 몸짓으로 흉내 낼 수는 없을까.

힘찬 도약을 꿈꾸며 한때나마 그 솟구침 속에서 삶의 황홀함과 환희를 맛볼 수만 있다면, 마지막 죽음의 그물을 흔쾌히 맞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모두가 죽음이라는 그물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불멸의 삶을 욕망하는 건지도 모른다.

비록 자신의 존재를 위험에 노출하면서도 숭어는 힘차게 물 위로 솟구쳐 오른다. 이 도약이 숭어를 숭어답게 하는, 벗어날 수 없는 숭어의 운명이다.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수평의 바다 위를 수직으로 힘차게 솟구쳐 오르고 싶은 인간의 꿈, 그 솟구침을 위해 인간은 스스로 위험한 모험 속으로 온 몸을 던져 뛰어든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숭어처럼 힘차게 뛰어오르는 순간들을 포착하여 그 몸짓들을 여기 실은 건 이 때문이다. 빛나는 삶의 한 순간들을 멈추게 하여 영원히 살아있는 불멸의 삶으로 지속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오늘도 모든 숭어들의 꿈, 모든 평범한 인간들의 꿈이, 욕망의 바다 위로 꿈틀대며 솟구친다. 그리고는 다시 미끄러진다. 나는 숨 죽여 기다린다. 다시 한번 황홀한 솟구침의 그 순간을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어느새 나는 숭어가 된다. 숭어의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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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2/20 [11:1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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