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여성 정치세력화, 그녀들만의 논의인가
최근 여성 운동의 흐름에 대한 '능력' 없는 여성의 생각
 
정문순   기사입력  2003/12/17 [09:56]

능력보다 인맥

교과서나 언론 매체에서 생산된 공적 담론 중에는 현실을 호도하는 말이 적지 않다. 가령 그들은 재능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남자들이 힘을 똘똘 뭉쳐 자신들과 경쟁하려는 여성에게 훼방을 놓는 일이 비일비재해도, 여성은 노력이 부족해서 실패한다는 말은 좀처럼 타격을 입지 않는다. 공적으로 승인된 언어와 여성의 말이 갈라서는 것은 이런 지점이다. 간혹 입신에는 재능 '못지 않게' 다른 요인도 중요하다는 식의 말도 있지만 이마저도 여성들에게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경쟁 상대인 남자보다 못할 것 없는 여성들이 무수한 좌절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현실을 짚어낼 수 있으려면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재능보다 뛰어난 인맥에 있다."(여성신문 11월 14일자)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성계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한겨레
통쾌한 말이다. 그러나 시정에서 통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 말은 인맥의 덕을 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과는 무관해 보인다. 처세술의 첫 장을 장식하거나 시정에서 불변의 상식으로 통하는 말은 듣기에 시원하긴 하나 치명적인 약점을 모면하기 어렵다. 현실과 당위를 혼동하는 시중의 말이 그렇듯 "뛰어난 인맥" 운운하는 표현에서 인맥과 연줄이 휘어잡는 세태를 꼬집는 뜻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앞의 <여성신문> 기사는 여성들에게 성공적인 인맥 관리 요령을 알려주는 조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경우에서 보듯 선거가 다가올수록 활발해지고 있는 여성의 정치세력화 논의에서 인맥 담론은 예전과 달리 '전향적으로' 검토되는 경향을 보인다. 비판적 접근을 기대했던 이들은 인맥 개념을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기왕의 부정적인 모습은 남성문화의 폐해일 뿐이라는 충고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제 인맥은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연고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수평적인 인간 관계의 확장"으로 새롭게 인식돼야 한다는 것이다. 인맥이라는 말도 부담스러운지 '인적 네트워크'니 '네트워크 시스템'이니 하는 말이 대체 용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남들과 정보를 교류하거나 소통을 확대하는 데 발이 넓은 것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인맥의 긍정적인 기능이 강조되더라도, 근본적으로 법과 원칙보다 사사로운 감정이 지배적인 정실 문화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는가 하는 비판을 넘어설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정작 성공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처방으로 제시되는 인맥이나 리더십 관리를 볼 때 기존의 문화를 뒤엎을 만큼 새롭다거나 특기할 만한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성 공무원들이 회식 등과 같은 비공식적 행사에서 자신들과 함께 어울리기가 어렵고, 친밀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여성리더, 이렇게 하라', 김혜숙, 여성신문 11월 16일자)는 동료 남성들의 지적에 대해 여성들이 '인식'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진단이 나오는 것은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결국 변해야 하는 것이 여성이라면, 그런 지적은 여성의 성장을 바라지 않는 이들이 귀가 아프도록 충고해온 것이니 조금도 새로울 것은 없다. 정말 비판되어야 할 것은 사람의 성공을 결정짓는 데 재능보다 다른 요인이 힘을 쓰는 지금의    세태이다. 그러나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어느 정도 승산을 기대하는 여성들에게는 잘못된 현실을 뿌리부터 반성하는 의식이 빈약하다. 능력만 있으면 초야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라도, 술자리에 어울릴 줄 모르고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라도, 그 나름의 미덕이 없지 않은 내성적이거나 독불장군 유형의 사람이라도 빛을 볼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을 만드는 데 마음이 기울어져야 한다면 지나친 주문일까. 

그들만의 세력화인가

누군가와 알고 지내느냐의 여부가 팔자를 바꾸어놓기도 하는 사회에서 사람을 죽을 때까지 같은 끈으로 묶어주는 인맥의 효력은 사안에 따른 연대나 결속이 낳는 결과와도 사뭇 다르다. 한국 사회에서 내가 누군가와 안면을 틔운 사이라는 것은 그와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이 꺼려지거나 좀처럼 이해 관계를 달리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요즘 뜨고 있는 '네트워크 여성운동'도 인맥의 효과에 힌트를 얻어 여성끼리의 맹목적 결속을 통한 정치적 진출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대학에서 여성 리더십 교육을 받은 졸업자들이 모인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성 100인 국회 보내기 운동'을 선언한 <맑은 정치 여성네트워크>, 현역 여성 정치인을 성차별로 인한 불이익으로부터 지켜낸다는 <여성정치인 경호본부>, 그리고 '여성리더 1만명' 캠페인을 벌이는 등 여성 정치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 팔을 걷어붙인 <여성신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동료 여성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당파를 초월한" 연대를 다짐하며 "어느 정당이라도"(고은광순) 들어가자는 목소리를 낳는다. 그러나 아무리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지지하는 데는 일정한 기준이 없을 수는 없다. 그 잣대는 "사회적 성공"을 따냈거나 이 사회에서 "리더십 역량"(여성신문 논설위원 신혜수)을 행사하는 여성인가의 여부에 있다고 한다. 그러니 기득권층의 도덕적 해이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 장상 전 총리서리의 낙마에 대해 "심히 유감"(맑은 정치 여성연대)이란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것도, '여성리더 1만명' 캠페인에 김영삼 정부 초기 임명되자마자 땅 투기가 드러나 경질된 박양실 전 보사부 장관과, 노동 탄압으로 일관한 역대 정권에 30여년 봉직했고 노사정 위원회에서 주 5일제 근무제를 만신창이로 만드는 데 기여한 김송자 전 노동부 차관 및 기득권 유지에 열 올리는 이런 저런 이익 단체의 여성들이 여성의 손으로 키워봄직한 리더로 이름이 올려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과정과 내용은 제쳐두고 어쨌든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이라면 정치적 성장의 날개를 달아주자는, 대놓고 말하면 금뱃지를 달아주자는 것이 여성의 정치 세력화라면 씁쓸하다. 최소한의 원칙은 잃지 않던 여성 운동은 이제 옛말이라고 보아야 할까.

어떻게든 여성들을 정치권에 많이 보내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힌 지금의 여성 정치세력화 논의는 선거철이 눈앞에 다가온 탓도 있지만 노무현 정부에 4명의 여성이 입각한 사실에서 여성계가 크게 고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도 개혁적 성향이 강한 여성계의 주류가 노무현 정부와 잘 지내고 있는 것은 이 정부와 끝 모를 대립으로 치달은 노동계와 매우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여성 장관이 4명'이나' 나온 '친여성적' 정권에서 여성 노동자의 생리 유급 휴가가 날아가버린 것쯤은 지식인 여성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지 모른다. 

여성계에서 한창 피어오르는 인맥이니 리더십이니 하는 논의는 솔직히 나 같이 무능한 사람에게 그리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선불 맞은 멧돼지의 질주를 무심히 지켜보듯 어리둥절한 느낌이라고 할까. 저돌적인 힘에 충만한 것도 운동의 생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능력' 있는 엘리트 여성이 주체나 중심인 것이 분명한 여성 리더를 키우자는 논의에서 '능력' 없는 일반 여성의 이해와 요구는 어쩔 수 없는 소외를 감수해도 좋은 것일까. 하루아침에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오경숙 전 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의 예에서 보듯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여성의 정계 진출로만 협소하게 이해되는 움직임도 염려스럽다. 무엇을 위하고 어떻게 실현해야 되는 여성의 정치세력화인가 하는 논의를 건너뛴 결과는 현실에 투항하는 여성을 막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차근차근히 처음부터 논의하는 것이 쓸모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숨을 좀 고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3/12/17 [09:56]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