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혜의 영화나들이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5·18 광주를 제대로 담지 못한 <오래된 정원>
[임순혜의 영화산책] 80년대의 시대적 아픔과 치유가 없어 완성도 의문
 
임순혜   기사입력  2007/01/06 [17:53]
황석영씨의 소설 <오래된 정원>이 임상수 감독의 연출로 MBC 프로덕션에 의해 제작되어 1월 4일 개봉되었다.

<오래된 정원>은 소설가 황석영이 <무기의 그늘>이후 13년 만에 "80년대에 바치는 진혼곡"이라며 발표한 소설로, 80년대 광주를 배경으로 한국사회 격변기에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살았던 남녀의 삶과 사랑을 그렸는데, 2000년 출간당시 20일 만에 8만부가 팔렸으며, 단재상 이산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 임상수 감독의 영화 포스터     © MBC프로덕션 제공
<오래된 정원>은 5·18로 17년간 수감되었던 남자주인공 현우(지진희)가 출소 후 자신을 숨겨주고, 사랑했던 여인 한윤희(염정아)와 지내던 곳을 찾아가 사랑하던 여인이 딸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되고, 17년 전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시사회에서 처음 공개된 <오래된 정원>은 역사를 영화로 만들 때 어떻게 역사를 영화라는 매체로 재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100억 이상의 제작비를 들였으며 완성도에 의심이 없었으나 흥행에 참패한 <청연>의 경우, 역사상의 실존 인물을 영화가 어떻게 해석하였느냐? 에 문제제기가 따랐고, 결과적으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임상수 감독은 시대가 만나게 하고 헤어지게 한 운명의 연인을 그린 멜로 영화인 <오래된 정원>에서 감독 나름대로의 색깔로 5·18을 재해석하고 있으며, 80년대 학생 운동에 대해서도 재해석을 한다.

역사의 재해석은 감독 나름대로의 특권이자 권한이기는 하다. 그러나 <오래된 정원>은 연인의 배경이 되었던 5·18광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남자주인공 현우의 가슴 아픈 사랑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만, 가슴 아픈 사랑의 원인이자 배경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오래된 정원>는 5·18광주와 그 시대적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인간들의 고뇌를 말해주고 있다.

광주를 말하기 위해서 가슴 아픈 남녀의 사랑이라는 배경을 끌어들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임상수 감독은 이 부분을 주목하지 않았다.

▲ 지난 12월 18일 있었던 시사회에서, 임상수 감독, 염정아, 지진희, 윤희석이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 임순혜

<오래된 정원>은 20대나 30대 관객을 겨냥한 영화는 아니다. 80년대 격동기에 5·18을 경험한 세대를 관객층으로 상정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황석영씨가 "80년대에 바치는 진혼곡"이라고 했듯이 관객은 <오래된 정원>을 통해 80년대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받기 위해 영화관을 찾을 수도 있다. 
 
<오래된 정원>은 역사를 말하지 않고 있으며, 분신장면 후 후배와 정사하는 장면 등, 오히려 당시 학생운동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당시 5·18 장면들과 학생들의 시위 장면, 분신장면 등 많은 장면들이 등장하기는 하나 진지하지 않은 농담처럼 임상수 감독은 던져 놓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너희들이 한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매우 냉소적인 질문을 영화는 던지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임상수 감독의 한계일까? 아니면 아직도 역사를 제대로 말 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일까? 
 
▲ 영화 <오래된 정원>의 한 장면     © MBC프로덕션 제공


<참고> [강준만 칼럼] 오래된 정원(한국일보, 2006. 12. 26)

 
지난 새천년 봄에 출간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1980년대를 '관념ㆍ시대ㆍ역사'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 '현실ㆍ개인ㆍ일상'이라는 새로운 틀로 바라본 걸작이다.
 
황석영은 성찰을 시도하면서도 행간을 읽어줄 걸 요청하는 소극성을 보였지만, 이 작품을 토대로 한 임상수 감독의 영화 <오래된 정원>(1월 4일 개봉)은 지난 6년 세월의 무게를 더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주인공 한윤희(염정아)는 운동권 조직과 조직목표를 위해 희생하려는 후배에게 "인생 길어, 역사는 더 길어. 우리 좀 겸손하자. 너 그거 하지마. 조직인지 지랄인지"라고 일갈한다. 이 말을 운동권과 80년대에 대한 냉소로 읽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자유겠지만, 바로 그런 도식주의를 탈피하자는 게 그 말의 뜻임을 어이하랴.
 
● 새로운 틀로 바라본 80년대
 
한국은 본말의 전도가 매우 왕성하게 일어나는 나라다. 인간답게 잘 살아보자는 게 모든 이들의 삶의 목표일텐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적을 죽이는 수단을 쓰고, 얼마후엔 수단이 목적이 된다. 모든 삶의 양식과 행태가 전쟁에 근접한다. 모두 다 목적이 된 수단을 향해 질주하느라 "왜 사는 거지?"라는 의문을 가질 시간조차 없다.
 
한국사회의 시간 속도는 워낙 빠르기 때문에,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100년이 넘는다고 볼 수도 있다. 경제발전이건 민주주의건 다른 나라들이 몇백년 걸린 걸 몇십년 만에 해치워냈다. 뿐만 아니라 갈등과 분열도 초고속이다.
 
2004년 4월 15일 자정 무렵을 기억하는가? 당시 노무현 정권 사람들은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 들었다. 47석의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2석 넘은 152석을 먹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위대한 지도자'로 다시 태어났고, 노 정권 사람들은 피를 나눈 형제들처럼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노무현이 국민적 원성과 조롱의 대상으로 추락하고, 노 정권 사람들이 서로 원수처럼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다. 노 정권 사람들이 공동의 적(敵)에 대한 적대감으로 다시 또 손을 잡고 서로 뜨겁게 껴안는 모습을 보인다 해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놀라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무엇이건 가능하다.
 
영화 <오래된 정원>에서 운동보다는 동료들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때문에 16년 8개월간 감옥생활을 한 '광주의 아들' 오현우(지진희), 미혼모로 그의 딸을 낳고 그를 기다리다 암에 걸려 죽은 한윤희. 이들은 우리 시대에 환영받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이들을 지루하다고 생각할 관객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둘 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투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노 정권 인사들, 이 영화 꼭 보길
 
분배의 정의는 운동권에도 없다. 운동권 출신으로 출세한 이들이 운동하느라 패가망신한 이름없는 운동가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 법 만들어 보상해주는 일? 그건 분배가 아니다.
 
분배란 내 주머니에서 나가야 한다. 내 주머니는 움켜쥐고 불리면서, 이름없는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이런 게 있다면)을 자신들이 부풀려 만들어 놓은 '수구 꼴통'들에 대한 적대감 발휘로 해소하고자 하는가? 혹 계속 출세하기 위한 권력중독성 책략은 아닌가?
 
이름없는 동료들을 생각한다면, 운동권 경력을 앞세워 세상에 대해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훈계하는 건 해선 안될 일이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친노ㆍ비노ㆍ반노'를 불문하고 모든 노 정권 인사들에게 이 영화를 볼 걸 강력히 권한다.
 
80년대의 삶에서 살려야 할 건 죽이고 죽여야 할 건 살리는 일을 해온 건 아닌지, 부디 눈물을 흘리는 기회를 갖길 바란다. 감독은 관객의 눈물을 막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그래도 눈물이 흐른다면 막을 이유는 없다.
글쓴이는 '미디어운동가'로 현재 미디어기독연대 대표, 언론개혁시민연대 감사, 표현의자유와언론탄압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표/ 운영위원장, '5.18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특별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 심의위원을 지냈으며, 영화와 미디어 평론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7/01/06 [17:53]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