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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으로 본 미디어 변천사
조선일보 김영삼, TV토론 김대중, 네티즌 대통령 노무현ba.info/css.html'><
 
민경진   기사입력  2002/12/24 [21:22]
1987년 양김이 독자출마를 고집하며 도무지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6월 항쟁의 주역인 학생운동권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끝내 두 사람이 후보단일화에 합의하지 않고 독자출마의 길을 선택한다면 운동권의 지도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양김과 마찬가지로 당시 학생운동권도 크게 보아 NL과 PD라는 두 파벌로 나뉘어 있었는데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NL진영은 김대중과 김영삼 지지로 나뉘어 있었고, PD진영은 백기완 후보를 내세웠었다.

김대중이나 김영삼이나 보수 우파 정객이란 점에서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기에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에 대한 이념적 논쟁은 뚜렷한 답이 없는 말싸움에 불과했는데 결국 누가 더 민중의 지지를 많이 받는지 보고 그 사람에게 지지를 몰아주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면 양김 중 누가 더 민중의 지지를 받는지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요새처럼 날마다 여론조사가 발표되는 시절도 아니었기에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웃어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IMAGE2_LEFT}결론은 “여의도 유세를 보고 결정하자” 였다. 당시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후보가 마치 순번을 타 경쟁이라도 하듯이 각기 수백만에 이르는 엄청난 지지자를 지금은 공원이 된 여의도 광장에 불러 모았는데 자발적 지지자가 있을 리 없는 노태우 후보 같은 경우는 엄청난 돈을 들여 수백만 인파를 동원했고 유세가 끝난 뒤 골목에서는 돈봉투를 주고받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결국 약 6백만-DJ측 주장-에 달하는 가장 많은 지지자를 끌어 모은 DJ 쪽으로 지지를 몰아주자는 암묵적 분위기가 형성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후보진영마다 장외집회에 목숨을 걸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고 당시 독재정권의 나팔수 였던 TV방송 역시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어 여당의 노태우 후보는 되도록 많은 군중이 잡히도록 카메라 앵글을 잡고 양김의 경우는 단상 밑의 군중들만 살짝 보이도록 하는 편집기교를 동원, 축소왜곡보도로 일관했는데 당연히 양김 진영에서 TV 뉴스에 대한 불만이 엄청났었다. 돌이켜 보면 참 우스꽝스럽지만 지금처럼 활발한 미디어 선거를 할 수 있는 때도 아니었고 인터넷은 탄생도 하기 전이어서 장외집회는 당시 야당 후보가 동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거운동 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대선은 조선일보가 기획하고 조선일보가 연출하고 조선일보가 진행을 총괄한 조선일보 표 선거였다. 정치부 기자치고 거제도에서 올라온 ‘YS 멸치’ 한 포대 못 받은 사람은 간첩 취급을 받았는데 당시 언론계에는 김영삼 장학생이란 은어가 파다했다. 똑똑하고 입바른 소리 잘해 기자들이 경계하고 싫어했던 김대중과 달리 기자들이 하는 말이면 허허 웃으면서 다 받아들이고 철마다 두둑한 촌지로 후하게 인심 쓰는 김영삼을 추종하는 언론계 파벌이 있었는데 바로 이들을 일컫는 말이 김영삼 장학생이다. 그 중 백미인 조선일보의 인증을 받아 조선일보 표 대통령으로 등극한 김영삼은 5년간 조선일보 사설과 칼럼 읽으며 국정을 운영하다 결국 나라를 IMF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야 마는 혁혁한 업적을 남긴다.

1997년 대선은 TV토론이 도입된 최초의 선거였다. DJ진영은 김한길 미디어 팀장의 지휘아래 신문, 방송, 전단 등을 동원한 입체적인 홍보전을 펼쳤는데 DJ의 가정 배달용 팸플릿은 후보얼굴이 들어가지 않은 신선한 접근으로 선거 전문가들의 격찬을 받기도 했다. 이회창 후보 진영은 그때나 올해나 미디어 전략은 썩 시원치 않았다. 이회창 후보나 이인제 후보 모두 꼭 유신시대의 애국 캠페인을 보는 듯한 촌스러운 선거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DJP연합과 IMF사태의 영향도 있었지만 DJ의 승리는 상대적으로 탁월했던 미디어 전략, 그 중에서도 TV의 덕을 많이 보았던 셈이다.

{IMAGE1_RIGHT}세월은 흘러 드디어 2002년. 일부 호사가들의 취미생활에 불과했던 인터넷은 무려 2천5백만에 이르는 사용자를 확보하고 휴대폰 가입자 역시 3천만을 넘어선다. 매스미디어에서 퍼스널미디어로 상전벽해를 이룬 것이다. 연거푸 낙선으로 정치생명이 끝나는가 싶던 노무현이 열성 네티즌들의 성원으로 재기하고 중견 정치인으로 자라나더니 국민경선에서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뽑히고 끝내는 대통령 자리를 거머쥐고 만다. 정몽준 폭탄이 터진 투표 전야에 한나라당의 100만 당원은 조선일보 뭉치를 들고 새벽 길을 달렸지만 네티즌들은 휴대폰과 컴퓨터를 붙들고 밤을 지새웠다. 그 결과가 노무현 대통령이다.

시대마다 대세를 결정짓는 매체가 있었고 그 매체의 잠재력을 이해하고 유감 없이 활용한 후보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돈과 조직의 노태우, 조선일보 표 김영삼, TV토론 선수 김대중, 그리고 네티즌 대통령 노무현.

2007년 대선의 스타 미디어는 무엇이 될까? 오늘 다르고 내일이 다른 기술발전속도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예측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잘 알겠지만 그래도 틀렸을 경우의 창피함을 무릅쓰고 필자 나름대로 감히 예측을 해 본다면 모바일 테크놀러지가 될 것 같다. 24시간 인터넷에 접속된 차세대 휴대폰, 여기에 유권자의 현재위치를 파악하는 로케이션 테크놀러지가 결합된다면 마치 `87년 대선의 장외집회와 2002년의 인터넷 선거를 결합한 것 같은 폭발적인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5년간 노년세대의 상당수가 세상을 등지고, 지금 휴대폰에 중독되다시피 한 10대 후반이 신규 유권자로 대거 합류하게 된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대선이 끝난 지 이제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차기 대선을 고민하고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오늘부터 차세대 미디어의 향방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참고기사] 민경진, 노무현은 최초의 인터넷대통령 후보[1], 대자보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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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 필자는 [테크노 폴리틱스](시와사회, 2002)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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