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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의 제왕 : 부시와 007의 탑
우린 흔들리지 않는다. 지켜야할 이상이 있기에…
 
김민수   기사입력  2003/02/23 [03:00]
환각과 현실사이

“2002년 겨울 결코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대지는 암흑의 기운으로 뒤덮여 가고… 죽음 앞에 선 전사들이 최후의 칼날을 세운다!”
 

이 말은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나 미아리 점집의 ‘쪽집게 도사’가 한 말이 아니다. 극장 한켠에서 뽑아온 영화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홍보 전단에 찍혀진 문구이다. 왠지 놀랍고도 섬뜩하다. 2003년 새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정말 영화처럼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걸프해 지역에 피할 수 없는 전운이 감돌고, 미국의 대이라크 공격명령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죽음 앞에 선 이라크 전사들. 이 와중에 이판사판 핵카드를 내걸고 칼날을 세운 북한. 피로써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미국. 그야말로 세상은 원작자 톨킨이 그린 혼돈의 중간계(middle-earth)를 방불케한다.

  시끄러운 세상답게 며칠 전 뉴스는 기존 마약과 같은 환각효과를 발휘하는 유사-마약을 불법으로 사먹는 문제를 다뤘다. 한 중독자가 말했다. “약을 먹지 않으면 현실에 적응하기가 어려워요(…)” 어떻게 이런 일이. 허나 누가 이 자에게 돌을 던지랴. 약을 먹지 않은 멀쩡한 인간들도 이미 환각 속에 빠져있는 것을. 신이시여, 도대체 누가 맨 정신이고, 무엇이 허구이고 현실이나이까?

  정신을 잠시 수습해 2003년 세계 정세를 예언한 문제의 영화를 들여다보자.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에는 반지원정대의 여정과 함께 악을 상징하는 두 개의 탑이 나온다. 이 두 탑은 암흑의 제왕 사우론이 지배하는 모르도르의 탑과 사루만이 지배하는 땅 아이센가드의 오르상크를 뜻한다. 1편에 이어 원정대는 인간 욕망의 상징인 절대반지를 제거하러 모르도르로 가던 중 뿔뿔이 흩어진다. 그들 중 마법사 간달프와 무적의 삼총사(인간전사 아라곤, 엘프 궁수 레골라스, 난쟁이 전사 김리)는 사루만의 악의 힘으로 위태로워진 인간왕국 로한을 구하러 에도라스로 향한다. 그들은 사루만의 마법에 걸려 있던 세오덴 왕을 구출하고, 백성들을 헬름 계곡의 요새로 대피시킨다. 그러나 사루만은 중간계에서 인간의 씨를 말리기 위해 모든 악의 힘들을 아이센가드로 총집결시키고, 마침내 공격명령을 내린다. 침공이 임박한 헬름 계곡엔 죽음을 각오한 전운이 감돌고…결전의 순간, 헬름 요새를 지키는 병력은 고작해야 3백명의 인간 전사들과 이들을 구하러 엘프성 리븐델에서 온 요정 궁수들뿐. 이들은 1만이 넘는 어둠의 군단, 오크와 우르크하이들과 맞서는데…….

부시의 탑과 십자군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은 1편보다 훨씬 더 스펙터클한 영화적 재미를 준다. 그러나 어떤 평론가는 <두개의 탑>이 구성에 있어 이야기의 연관성이 없고, 원작을 심하게 왜곡해 마치 한 편의 전쟁 영화를 방불케 한다고 지적했다. “톨킨의 원작과 달리 감독 피터 잭슨과 그 일당들은(…)전혀 다른 내용의 이야기를 병렬로 배치하고(…)<두개의 탑>을 피가 끓어오르고 박진감 넘치는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본래의 줄거리에서 변형되어 “거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살육과 파괴의 흐름에 휩쓸려 버렸다”고 한다(<프로도는 어디로 갔나?>「씨네21」386호 84-85쪽) 글쎄. 영화가 원작 소설과 꼭 일치해야하고, 관객이 영화를 즐기는 데 반드시 원작을 읽어 사전지식을 갖고 있어야하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그 자체로 즐기고 판단할 수 있다.

  1편 <반지원정대>를 처음 보았을 때, 체감적으로 받은 느낌은 마치 피터 잭슨이라는 총잡이가 쏜 ‘황금 탄환’ 한 발이 내 심장에 박혀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순간들을 음미하는 듯했다. 구조에 있어서 <반지원정대>의 여정과 작은 반지의 존재가 서로 인터랙티브하게 맞물렸었다. 무엇보다도 사악함과 절대악은 반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문학적 감동이 장면의 ‘부분에서 전체로’ 퍼져갔었다. 반면 이번에 2편 <두개의 탑>은 솔직히 기가 막힌 영상에 비해 몇 군데 감동적인 대사를 제외하고 보고 난 뒤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마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영화 <아바론>(2001)에서 총에 맞은 게임 속 캐릭터가 입자로 분해되어 허공에 멈췄다가 사라지듯, 혹은 다연발 자동화기 발칸포에 맞아 내 몸의 살점과 의식이 공중 분해된 느낌이다. 영상 테크놀로지로 완벽하게 부활된 북구 신화의 스펙터클과 헬름 계곡의 전투장면에 취해 관객의 자아가 사라진 이른바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실상에서 나라는 것은 없다”는 불가의 가르침)의 현전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두개의 탑>을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영화에 빠져있는 와중에도 세속의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누구 말대로 이 영화가 한 편의 장중한 ‘전쟁 영화’ 같아서였을까. 아니면 애들과 함께 보는 ‘건전 영화’답게 선악의 기본 구도를 하고 있어서였을까. 이 영화는 세계 정의의 화신을 자처하는 부시 미대통령과 그의 활극을 떠오르게 한다. 9.11 사건 직후 그는 마치 절대반지를 제거하러 대원정을 떠나는 주인공 프로도와 같았다. 그러다 작년 1월 세 개의 ‘악의 축’을 언급하면서 세상을 뒤집어놓기 시작했다. 부시는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으로 못박고, 앞으로 이들 국가와 ‘테러와의 전쟁’ 을 수행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엔 판타지소설의 용어가 공식 외교용어로도 사용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용어의 원조는 구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불렀던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대통령이라고 하니, 배우였던 그의 전직을 실감케 한다. 어쨌든 악의 축 발언의 배후에는 영화적 환각이 있는 게 분명하다. 부시 미대통령은 악의 축 3국을 지구에서 박멸하겠다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맹세했다(그의 아버지 부시 전대통령은 걸프전의 시조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악의 힘에 맞서 싸우는 반지원정대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프로도 역할을 자처한 미대통령은 어느 순간 아이센가드의 탑 꼭대기에서 사악한 힘을 끌어 모으는 악의 군주 사루만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프간에서의 빈라덴 소탕작전이 흐지부지 끝나자, 입증되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핑계삼아 이라크를 응징한다고 난리다. 현재 헬름 계곡, 아니 걸프 지역엔 사루만의 친위대인 20만 명의 미지상군과 첨단무기 엑스포를 방불케하는 각종 육해공 무기들이 배치되었다. 오크족 호주군은 지상군 1천5백 명, 전투기 14대, 전함 3척, 해상초계기 2대를, 또한 우르크하이족 영국군은 저 유명한 ‘사막의 들쥐’ 부대라 불리는 제7기갑 여단을 포함해 2만 6천 명의 지상군과 첼린저탱크 120대, 수송장갑차 150대를 걸프지역에 지원 투입한단다. 이렇듯 포진한 대병력들을 보며 부시 대통령은 아랍 이교도를 박멸하러 떠난 십자군 총사령관의 느낌인 모양이다. 실제로 그가 테러와의 전쟁을 ‘제2의 십자군 혹은 성전(聖戰)’에 비유하고, UN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국제 사회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모습은 가히 ‘역사적’이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십자군에 참여하면 금전적 보상과 죄를 사해준다”고 부추겨 이슬람을 침략했던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민 말루프 저, 2002)은 성전이 아니라 이교도의 인육을 삶아 먹고 구워먹었던 야만적 유럽인들이 저지른 대살육과 약탈에 불과했다. 이 역사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최근 로마 교황이 십자군 원정을 일컬어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저지른 큰 과오였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훗날 누군가 21세기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도 고해성사를 해야할지 모른다. 세상은 미국의 속셈이 세계 제2위의 석유 매장국인 이라크의 자원을 장악해 자신의 국익을 챙기려는 사악한 것임을 안다. 그동안 절대선으로 위장된 미국의 가면이 벗겨진 것인가. 아니면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끝없는 싸움에서 잠시 악이 이겼을 뿐인가. 바로 이것이 <반지의 제왕>이 시사하는 바이다. 절대반지로 표상된 악한 욕망 속에서 갈등하는 존재들. <두개의 탑>에선 그런 존재의 모습이 이중적 자아를 지닌 캐릭터 스미골/골룸으로 잘 그려졌다. 몸 속에 깃든 악한 골룸이 자신을 지배하려 하자 착한 스미골이 소리쳤다. “넌 거짓말쟁이. 도둑놈. 살인자. 우린 네가 필요치 않아. 당장 사라져!” 걸프만의 피를 부르는 자여, 정신 차리고 골룸에서 스미골로 돌아오라. 우린 석유를 위해 피를 부르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또 다른 싸움

“헬름 계곡에서의 전투는 끝났지만 중간계에서의 싸움은 다시 시작된다.” - 간달프-

마법사 간달프의 예언은 적중했다. 선과 악의 싸움이 <007 어나더데이>에서 또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제 무대는 헬름 계곡이 아니라 현실의 한반도로 옮겨졌다. 이를 입증하듯 첫 장면에 낯익은 지명이 자막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북한 북청 해안선.’ 제임스 본드를 포함한 세 명의 요원이 엄청난 파도를 뚫고 폼나게 서핑 보드에 몸을 실어 해안선에 침투했다. 간혹 한국말 대사도 나왔다. 해안선을 순찰하던 북한군이 말한다. “중국담배 싸게 사줄게.” 자오(릭윤)에게 정체가 발각된 007은 ‘북한군 호버 크래프트’를 뺐어 타고 도망쳤다. 추격하는 문대령(윌윤리)이 본드에게 외친다. “대영제국이 아직도 세계를 지배하는 줄 착각하지마.” 그는 007과 추격전 끝에 누각을 들이박고 절벽 밑으로 사라진다. 제임스 본드는 체포되어 전례없이 처참히 구타당하고 고문당하는데…마침내 영화의 타이틀이 음악과 함께 떠오른다. ‘Die Another Day’

  이 영화에 대해 말들이 많다. 이미 물 건너갔지만 한쪽에선 영화가 “한반도를 비하하고 냉전 시각으로 남북한을 묘사했다!”고 <007>영화 안 보기 캠페인까지 벌였다. 한편 다른 쪽에선 다급해진 배급사가 “그냥 영화로 봐달라!”고 애원하고, 자오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릭윤이 “북한이라는 특정 국가가 아니라 한 개인이 적으로 나오는 이야기였다!”고 항변했다. 심지어는 일부 언론은 “천만에 말씀, 그렇지 않아. 오히려 북한은 최첨단 레이저 위성까지 보유한 국가로 그려지잖아. 이 영화 그런 영화 아니야. 정말 재미있다니깐. 좀 보란 말이지!”하고 열심히 나서서 선전까지 한다.  

  결과적으로 <007>은 멋진 북청 침투장면과 달리 비난의 파도를 못 넘고 개봉관에서 곧 동네 비디오 가게로 물러날 판이다. 내버려두었으면 좀더 덜 봤을 영화가 괜시리 보지 말라고 떠드는 바람에 호기심을 자극한 부분도 없지 않다. 장르로 치면 이 영화는 코메디 액션영화에 불과할 따름이다. 만일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면 <007>의 실패는 타이밍을 잘못 잡은 팔자 탓으로 돌려질 수밖에 없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터진 격이라고나 할까. 작년 말 개봉을 앞둔 시점은 두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촛불 반미시위가 한창 불붙던 때였다. 또한 개봉하던 연말은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과 이라크전 설로 가상과 현실의 식별이 어렵고, 설상가상 북핵 문제가 세계를 초긴장시켰던 때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실패의 원인은 개봉 시점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그 자체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그렇다해도 관객의 마음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영화’가 존재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 즐긴다는 것은 문화와 삶 속에서 경험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간 활동이기 때문이다. 멋진 새로운 영상을 받아들일 때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은 긴밀한 상호작용을 한다. 따라서 “영화는 영화일 뿐, 그 자체로 봐달라”는 말은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인지적 소통이 일어나는 일체의 과정을 배제해 달라는 불가능한 주문이다. 그것은 영화를 눈감고 보라는 것과 진배없다. 영화를 볼 때 그런 ‘순수한 상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군부 강경파 문대령이 온건파 문장군을 살해하는 장면에서 김정일과 김일성 부자의 은유를 읽고, 레이저 위성으로 세계를 위협할 때 이를 현재 북한이 앵벌이용으로 쥐고 흔드는 핵카드 위협의 상징적 코드로 읽는다. 그것은 자연스런 ‘영화 독해법’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제임스 본드와 본드걸의 침투복이 우습게도 창천동 예비군복이고 논두렁의 소가 한국의 황소가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물소임을 식별해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전자 치료를 통해 그레이브스란 백인으로 환생한 문대령의 존재에서도 왠지 백인 우월주의의 냄새를 지울 수 없다. 자오 역시 백인으로 변신하기 위해 유전자 치료를 받고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이 영화에선 과거 <007>시리즈에서 수평적 협력관계였던 미 첩보대와 영국 정보부의 관계가 수직관계로 바뀐 모습까지 읽혀진다. 본드걸 징크스(할리 베리)가 소속한 미 첩보대의 위상이 007이 소속한 영국 정보부보다 훨씬 더 막강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요즘 유럽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부시의 푸들이 되어버린 영국 블레어 총리”란 말의 의미를 확인시켜주는 것은 아닐런지.

  이처럼 우리가 영화를 보며 느끼는 모든 이미지는 마음속에 내재된 경험과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따라서 영화를 포함해 모든 인공적 이미지는 의미를 유발하는 언어적 기능을 수행한다. 예컨대 최근 미국의 50여 개 학교에서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동맹군의 상징을 그려 넣은 셔츠를 입지 못하게 하자 일부 백인 학생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고 한다. 이 옷은 젊은이들이 과거 남부동맹군이 지녔던 집단 소속감을 상징하며 인종차별은 물론 배타적 의식을 형성하는 등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일부 학교에서는 흑인 청소년들이 말콤 X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 착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여기서 <007 어나더데이>가 단지 영화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옷은 옷일 뿐”이라고 한다면 미국에서 이런 문제가 제기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을 주목하라.

  또 이렇게 가정해 보자. 만일 누군가 아일랜드 이민자 관련 영화를 만들면서 ‘아무 생각 없이’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St. Patrick's Day)를 낙엽지는 10월로 잡고, 거리 축제에 사람들이 빨간색 옷을 입고 장미를 들고 나왔다고 하자. 과연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어떨까. 이 영화가 뉴욕에서 상영되었다면 다혈질인 아일랜드인들이 가만히 있을까. 아마 감독은 물론 영화관에 표파는 사람까지 성치 않을 것이다. 이 날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패트릭이 죽은 3월 17일을 기념하고, 옛 켈트족 시절부터 봄의 환생을 뜻하는 초록색과 클로버를 상징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무지와 무성의의 소치에 대해 “단지 영화는 영화일 뿐. 재미로 그냥 봐달라”는 변명은 통할 수 없다. 아무리 하찮은 영화 한편을 만들어도 자신은 물론 남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필요한 법이다. 

이처럼 영화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도 무시하는 영화 <007>의 오만함이 오늘날 부시와 미국이 패권주의로 치닫는 문화적 원인일 것이다. 가상과 현실이 뒤범벅되어가는 요즘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마지막 장면의 대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두려운 시간도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 우린 두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반드시 지켜야할 이상이 있기에……

* 필자는 아웃사이더 편집위원/디자인문화비평 편집인입니다.
* 본문은 격월간 [아웃사이더 http://www.eoutsider.co.kr ] 11호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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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2/23 [03:0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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