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는 쉽지만 독후감 쓰기는 힘든 김규항의 글 ‘B급 좌파’ 김규항의 글을 읽으면 머릿속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필자가 김규항에 대해서 얘기한 것은 고작 2년 전 김씨가 펴낸 어린이잡지 <고래가 그랬어>의 창간호를 소개한 정도였다. 그의 글은 읽기는 쉽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독후감 쓰기는 곤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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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좌파를 자처하는 김규항 씨의 칼럼집 <나는 왜 불온한가> © 돌베개, 2005 |
지난 가을에 출간된 그의 칼럼집 <나는 왜 불온한가> 또한 미루고 미루다 이제서야 읽기를 결심했고, 내가 믿었던 길이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면서 어긋났음을 확인해야만 했다. 김규항의 글은 한 인간의 사유를 짚어주는 GPS 기능이 탁월하다.
그 페미니즘 얼마 전 ‘대안있는 진보’를 표방한 싱크탱크에 합류한 한 소장학자를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가 페미니즘, 환경 등의 시민단체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작업은 외면하고 자신의 단체를 알리는 이슈제기에만 집착한다는 비판이었다. 이 근본장벽을 깨뜨리지 않는 이상 현재 논의되는 시민단체들의 주장은 현 체제를 유지시켜주는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다.
김규항은 ‘그 페미니즘’이란 칼럼에서 “주류 페미니즘은 다른 이의 사회적 억압에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주류 페미니즘은 모든 사회적 억압의 출발점인 계급문제에 대해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그들은 아마도 여성이라는 계급이 일반적인 의미의 계급보다 더 근본적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
주류 페미니즘이 그런 저급한 사회의식에 머무는 실제 이유는 그 페미니즘의 주인공들이 작가, 언론인, 교수(강사) 따위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이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는데 필자와 소장학자의 대화에서도 현 페미니스트들이 한국의 시공간과 적합하지 않은 미국의 주류 여성학을 공부하고 온 ‘중산층 인텔리 여성’이 빌딩에서 저임금으로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에 대해서 고민하느냐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유한하기 짝이 없는 그들(페미니스트)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을 일반화하여 카타르시스하는 데 열중함으로써, 모든 여성이 제 억압과 싸워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에 이르고 정당하고 필연적인 기회와 가능성을 성실하게 차단한다.”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빌딩 아주머니에 대한 맹점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가부장제와 싸운다는 주류 페미니즘은 실은 그 선전 장치의 성실한 일부다”는 김규항의 지적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밤의 주둥아리들 “밤의 주둥아리들...” 필자를 두고 한 소리 같다. 김규항은 인터넷 논객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오늘 적지 않은 한국의 청년과 노동자들(물론 사무직을 포함한)은 밤마다 인터넷의 복덕방에 모여든다. “노무현이 말야....” “정몽준이 말야...." "이회창이 말야....” 신문 쪼가리에서부터 출처가 불분명한 풍문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사 자료들을 꿰찬 채 그들은 밤이 새도록 한국 정치의 운영자 노릇을 하는 것이다.” 지방선거와 대선 시즌이 되면 또다시 인터넷 정치토론사이트가 불붙을 것이다. 필자 또한 한때 “한국 정치의 운영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정치평론이 아니라 정치공학에 집착하는 내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서글픈 일은 그토록 정치에 열중하는 그들이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 당하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정치에 당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열중하는 정치가 실은 그들의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칼럼사이트 <서프라이즈>를 기점으로 한 인터넷 민주주의 실험의 의의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노무현 씨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겪었던, 지금 짚고 있는 현존재를 돌이켜 볼 때 기성정치에 올인 할 ‘시민계급’이 아니라 노동자의 입장에서 농민을 엄호하고 빌딩 아줌마에 대해서 이주노동자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밤의 주둥아리”가 되어야 한다.
대안있는 진보 최근에 ‘대안있는 진보’를 내세운 싱크탱크들이 속속 출범하고 있다. 비판은 쉽지만 대안 만들기는 정말 어렵고 막막한 작업이다. 공부의 양을 잡더라도 사유의 시간으로도 비판할 때의 두배, 세배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마도 아니 당연히 공부의 그 끝은 없을 것이다. 지리를 전공하는 필자가 중심국이 아닌 ‘주변국의 지정학’을 공부하려는 것도 ‘대안있는 진보’를 향한 일환이다. 김규항과 같은 논객들에게 욕을 먹고 머릿속이 불편하지 않으려면 부단히도 노력해야겠다.
필자가 받았던 자극을 다른 독자들도 체험하여 공유하고 싶다. 김규항의 <나는 왜 불온한가>의 일독을 강력히 추천한다. 제도권 지면을 떠난 김규항의 글이 다시 제도권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필자와 같은 “밤의 주둥아리들”이 함부로 나불되지 못하도록...